< 내가 왜 살아야 합니까, 윌 듀런트 >
* 이 시대에 가장 중요한 문제는 '공산주의냐? 개인주의냐?' 하는 것도, '유럽이냐? 미국이냐? 하는 것도, 심지어 '동양이냐? 서양이냐? 하는 것도 아니다. 바로 인간이 신없이 살아갈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1)
어느 날, 한 남자가 당시의 저명한 철학자이자 역사가였던 윌 듀런트를 찾아왔다. 그는 듀런트에게 삶이 주는 의미가 무엇인지를 물었고, 그것을 자신에게 말해줄 수 없다면 자살할 생각이라고 했다.
듀런트는 남자에게 직장에서 열심히 일을 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어보라고 조언을 해줬지만, 그는 그렇게 해봐도 아무 소용도 없었다고 말했다. 통상적인 위로밖에 할 수 없었던 듀런트는 학자로서의 정체성을 고민하게 되었고, 그 문제를 풀기 위하여 당대에 알려졌던 '명사'들에게도 조언을 요청했다. 그들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사회적 위치에서 대답에 응했고, 어떤 이들은 듀런트의 시도에 비꼬는듯한 뉘앙스를 보여주기도 했다.
이 절망의 철학에 대한 당신 자신의 답변을 성실하게 작성해 보라! 최악을 인지하고 최선을 칭송하며 의식 있게 살아가기를 바라는 우리가 이성적 삶이라는 허울을 유지하려면 이 모든 회의에 답을 제시하여야 하기 때문이다.2)
자신의 의지로 바로 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의심과 질문들이 항상 주변을 맴돌았고, 그것은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커져만 갔다. 익숙했던 루틴이 갑작스럽게 무너지기 시작했을 때, 지금까지 믿고 의지했던 것들이 부담으로 느껴졌고, 주변은 점점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남자가 겪고 있는 문제는 지난날의 '나'와 다를 것이 없었기 때문에 그 딜레마가 그대로 전해졌다. 하지만 나는 어떻게든 살기 위해서 몸부림쳤다.
죄를 지어야만 죄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세상이 내미는 기준에 답하지 못하는 것도 죄가 된다는 것도 그때 겨우 깨달았던 것 같다. 그런데 뭔가 억울했다. 그리고 갑자기 오기가 생겼고, 그러한 잣대를 들이미는 세상이란 게 어떤 것인지 알고 싶어졌다. 그래서 다니던 교회대신 도서관을 갔고, 신문을 읽고 있던 중 '윌 듀런트'와 '문명이야기'를 소개하는 글을 읽고 책을 찾아보게 되었다.
'문명이야기'가 특별하게 느껴졌던 것은 다른 역사서와는 달리, 철학 사상과 종교 교리에도 상당한 비중을 두었고 문명별로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하며 세밀하게 평가했다는 점이다. 나는 책을 읽으면서 흩어져있었던 생각과 감정을 추스를 수 있었고, 문장을 받아 적다 보면 손목이 시큰거릴 때도 있었지만, 가슴속에 깊이 전해지는 울림들을 멈춰 세울 수가 없었다. 결국, 삶이란 어떠한 단서와 단서들이 연결되어 있는 것이고, 그것들이 분기점에 도달할 때 하나의 형태로 드러나게 되며, 그것을 어떤 의미로 받아들일 것인지는 각자의 해석에 달려있는 것이었다.
나는 세상이 던져주는 잣대들을 문장으로 소화하기 시작했고, 서서히 그것들을 서사로써 엮어가기 시작했다.
윌 듀런트는 1885.11.5에 태어나서 1981.11.7까지 거의 한 세대를 바라보고 죽었다.'문명이야기'가 학자로서의 윌 듀런트를 널리 알린 책이라면 '내가 왜 살아야 합니까?'는 그가 자신의 삶을 정리해 가는 과정에서 겪게 된 에피소드와 다른 사람들과의 서간을 묶어, 독자들과 함께 고민해 보자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책으로, 우리나라에서는 팬데믹 상황과 맞물리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내가 주일학교에서 얻은 것은 기독교 신앙이 그저 명백한 불합리로 가득하며, 기독교의 신은 미신적이라는 확신뿐이었습니다. 그때 이후로 신학책을 여러 권, 아마도 보통의 성직자보다 훨씬 많이 읽었습니다만 결코 내 마음을 바꿀만한 이유를 찾지는 못했습니다.3)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믿고 있던 종교와 그것에서 파생된 가치관에 따라 사는 것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다 터진 세월호 사건은 내게 충격으로 다가왔는데 아마도 피해자와 그 가족들에게 가해졌던 유. 무형적 폭력들과 더불어 종교와 관련된 사건이라 더 크게 느껴졌을 것이다. 평소와 달리 어떤 언급도 없이 침묵하고만 있는 담임목사의 태도에 의아함을 느꼈고, 선거 결과가 자신에게 달려있다는 취지의 설교를 듣게 되면서 홧김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버렸는데, 적어도 그들이 신을 진정으로 믿었다면 그러한 말을 절대로 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내가 알고 있는 여호와는 정의와 공의를 대표하는 신이고, 그의 아들인 예수는 힘없고 약한 사람들을 포용하고 사랑하는 신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층 나를 더 거슬리게 만드는 것은 그런 말을 듣고도 아무런 의심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성도들의 태도였다
모든 목회자가 그렇다는 말은 전혀 아니다. 나는 소신 있고 열정이 넘치는 젊은 사람들을 많이 알고 있고, 그들과 이야기를 자주 나누기도 했었다. 기본적으로 교회의 존재 이유와 사회에서의 역할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지금까지도 그 명맥이 유지되는 것은 지금도 선한 목적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밝은 미래에 대한 소망만을 꿈꾸며 인류가 걸어온 자취를 무시하는 것은 그들의 가장 큰 병폐이며, 자신의 약함을 외부의 탓으로만 돌리고 사랑과 평화라는 가치에만 매몰되어 전체적인 관점을 조망하지 못한다면 현실적인 문제점에 계속 부딪히게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보고 싶은 것만을 보고 싶어 하고, 믿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것은 그들만의 문제는 아니지만 어떤 경우이든 기본적인 틀이 완전히 폐기되는 경우는 없으며, 진실은 보이지 않는 않을 뿐, 그 자리에 처음부터 그대로 있었다.
책을 읽어가면서 칼린 지브란의 '인간의 아들, 예수'에서 받았던 인상들이 떠올랐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신의 아들로만 묘사하고 있지만, 신약성서 곳곳에서는 스스로 '인자'라고 칭하는 대목들이 상당하다. 지브란은 그러한 역설 가운데에 예수를 두었고, 주변 인물들은 자신이 처한 위치와 입장에서 각기 예수를 다르게 정의 내리고 있었다. 나에게 예수는 십자가와 구원자의 이미지였지만 지브란이 묘사하는 예수는 보는 관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스승이자 구원자였고 동시에 죄인이자 사기꾼이기도 했다. 하지만 예수는 정작 자신뿐만 아니라 그 누구에게도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았다.
믿음에 불순물이 섞여 있지 않으면 희망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4)
진리는 영원불변할 것 같으면서도 그것을 보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한 특성들은 대칭적이면서도 상호교차하기도 하지만 궁극적인 단계에까지 치닫게 되면 하나의 꼭짓점에 도달하게 된다. 각자가 정의하는 명칭은 다르겠지만 나는 철학적인 관점에서 '일자'라는 표현을 쓰기로 한다.
나는 듀런트의 책에서 그러한 단서들을 찾을 때마다 필사했고, 공통분모를 찾아서 하나씩 연결해 가기 시작했다. 만물에는 신의 의지가 깃들어있다는 어떤 힌두 사상가는 아이러니하게도 '유일자'를 언급했고, 나는 의상대사의 '일즉다 다즉일'이라는 개념을 통해 그 논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 각각의 진리들은 여러 영역에서 의미가 중첩되기도 하고, 그 시원성을 좇아가다 보면, 결국에는 같은 것을 다르게 표현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그것에 대해 종교는 '신'이라고 부르고, '물리학'은 힘이라고 표현하기도 하며, 관념론과 유물론의 입장에서는 각각의 해석에 따라 받아들이는 의미가 달라지게 될 뿐이다.
관점의 폭이 넓어지면서 사물과 심성을 연결하여 인간과 우주의 관계를 연결하고 있는 설명하는 '이기론'이 얼마나 심오한 이론인지 깨닫게 되었는데, '문명이야기'에서 전혀 언급되지는 않았지만, 조선은 철학의 변방에 있는 나라가 결코 아니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외부 세계는 추상적이고 보편적인 '리'와 구체적이고 상대적인 '기'로 구성되어 있다. 보통 '리'는 만세 이전부터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보편적 원리를 말하며 반대로 '기'는 상대적이고 일시적인 측면이 강한 특징이 있다는 원리인데, 심성론 쪽으로까지 확장되면서 '사단칠정론'으로 발전하게 된다.
사단은 '수오지심, 사양지심, 시비지심, 측은지심' 같은 개념으로 '리'의 속성을 가지며, 대체로 '선'하거나 '귀'하다고 평가된다. 이와 반대되는 속성으로 '칠정'은 우리의 감정적인 특성이 있으며. 주로 '희, 로, 애, 락' 등과 같은 요소들로 이루어져 있고, 일시적이며 휘발성이 있어, '악'하거나 '천'하다고 평가되는 측면이 있다. 이러한 전제 속에서 '이기이원론', '이기일원론' 같은 학술논쟁이 나오게 되었고, 어떤 기준에 주안점을 두는가에 따라 관점과 결론이 달라진다. '베다'와 '우파니샤드'도 근본적인 것에 있어서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내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어둠과 악한 세력에 맞서 투쟁하는 일에 있습니다.5)
'내가 왜 살아야 합니까?'에서 언급되고 있는 인물 중에서 나에게 무한한 영감의 원천이 되는 인물은 바로 '간디'이다. 그는 '완전한 깨달음을 향한 노력이 계속 살아가게 한다.'는 말로써 듀런트의 질문에 간단하게 답변했다.
간디는 보수적인 성향이 짙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개방적인 사고를 가진 인물이었고, 영국의 지배하에서 자신의 입지를 다지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기도 했지만, 식민치하에서 겪게 되는 차별과 모멸감으로 인해 민족이 처한 진실에 눈을 뜨게 되었다. 그것은 개인의 문제를 넘어 민족과 세계, 그리고 진리의 영역에까지 인식의 폭을 넓히게 만들었고, 가해지는 고통의 단계가 높아질수록 간디는 진리에 대한 확신은 더욱 깊어져만 갔다.
간디는 대외적으로는 다신교인 힌두교를 믿는다고 했지만, 종교와 철학의 근본적인 가치는 진리 안에서 하나라고 생각했다. 윌 듀런트는 그러한 간디를 역사상 가장 합리적인 사고를 가진 종교 지도자라고 평가하기도 했었다.
간디는 양자적인 관점에서 균형을 조율하려고 했고, 그러한 노력은 '나의 진리 실험 이야기'라는 자서전에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철학자들이 말하는 '세계'는 눈에 보이는 것을 넘어 '완전'한 것을 의미하는데, '완전'이란 단어는 통상적인 뜻으로 받아들이는 '완벽'의 의미가 아니라 '완전히 채워져 있다.'는 정의가 합리적인 해석에 가깝지 않을까? 인간은 완전하게 구성된 세계와 달리 불완전한 존재로서 던져지지만, 세계를 모방하고 더 가까이 다가가려는 노력 속에서, 더욱더 나은 존재로 거듭나게 된다는 의미를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간디는 진리 앞에 바로 서기 위해서는 도덕관념이 정립되어야 한다고 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선과 악이 구별될 수 있고, 인간은 선한 것을 택함으로써 함께 이상적인 세상을 이루어나갈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칸트와 루소의 '일반의지'와도 궤를 같이한다고 볼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악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라, 대립하는 가치도 함께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나 사이비 이론과 교리들은 이러한 '총체성'과는 거리가 멀고, 자신의 것만을 '절대선'으로 인식하면서 상대방을 '악'으로만 간주하려는 경향이 강하다. 처음에 어느 정도까지는 그 주장들이 설득력 있게 들릴지 몰라도 부정할 그 대상이 사라지게 되면 스스로 자신을 부정하게 될 것이다.
윌 듀런트는 종교와 사회주의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다만 집단화되면서 변질된 모습들을 지적했을 뿐이다. 물리학에서 '+'는'+'를 밀어내고. '- '는 '-'를 밀어내는 속성이 있다. 그리고 '+'는 '-'와 양립할 때 공존할 수 있다. 세상은 그렇게 맞물리며 다시 돌아가게 될 것이다.
나는 멈추지 않기를 바랍니다. 계속 움직이면서 모종의 아름다움과 완벽함을 추구하고 싶습니다. 설사 내게 재능이 부족하다 해도 움직이는 기쁨을 누릴 수 있겠지요. 게다가 희망은 항상 존재하니까요. 적어도 젊고 멈추지 않는 사람에게는 말이지요.6)
많은 사람은 진리라는 가치가 고귀한 의복을 두르고 있는 것처럼 상상하고 이해하고 있지만, 정작 진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이 막상 초라하고 벌거벗은 상태로 나타나게 되면 사람들은 그것이 진리가 아니라고 부인할 것이다.
현대사회는 분명히 이전 사회보다 자유롭고 평등해졌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행복하지 못하고 압박감을 느끼는 이유는 끊임없이 결과물을 산출하도록 강요받고, 무의식까지도 '자기계발'이란 명목으로 착취당하는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이제는 우리가 신성한 것이라고 믿고 있던 영역까지도 수치화가 가능해지게 되었다.
마약중독과 자살률이 높아지고 사이비들이 판치고 있는 현실에서, 사람들을 위로하고 다독여주는 '에세이'나 '강연'들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그러한 입에 발린 듯한 말에 귀를 기울이기보다는 아픈 부위가 어디인지 알아보는 것이 더 우선이 되어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프리카의 동물들은 아픈 부위를 스스로 태양볕에 내맡기어 치유받는다.
모범적인 인생을 살고 있다고 보이는 사람들조차도 '삶'이 주는 묵직한 질문에 대해 명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추구하는 '어떤 것'을 향해 찾아가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와 목적을 발견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들은 철학과 과학이 영혼을 인정하든 말건 상관없이 꿈과 이상을 믿었고, 진실은 합리적인 일반화가 아니라 직관적 상상력에 있으며, 그 가능성에 대한 신뢰야말로 가장 끔찍한 환멸의 순간에도 나아가는 원동력이라고 고백했다. 종교인들은 신이 주는 황홀경으로써 이러한 순간을 묘사했고, 철학자들은 보편적 진리에 이르렀을 때 경험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윌 듀런트는 그러한 경지로 인간을 인도하게 되는 것은 바로, 직관적인 상상력에서 비롯되는 것이며 그것은 모든 '예술'의 원동력이라고도 했다.
이상과 현실이 일치하는 경우는 거의 없고, 있더라도 극적인 순간에 잠시 머무는 것에 불과하며, 인간은 모순 속에서 천국과 지옥을 경험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이러한 딜레마와 직접 맞닥뜨리게 되었을 때,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언어로 처해있는 상황을 해석하려고 노력하게 되는데, 카뮈와 사르트르는 이를 '실존'이라고 표현했다. 비로소 인간은 사물과 자신과의 관계 속에서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삶'에 있어 적어도 몇 번은 바닥에 패대기 당하는 것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그럴 때마다 자신의 한계가 드러나게 될 것이고, 그러다 보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조금씩 구별할 수 있는 지혜가 생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왜 살아야 하는지에 관한 질문은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고민해야 하는 문제임과 동시에 누구도 대신해 줄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그것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에 겪게 되는 문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제 다시 자신에게 질문해 보자. '당신은 왜 살아야 합니까?'
삶이 주는 의문 속에는 삶이 가져다주는 환희가 숨겨져 있고, 그것을 깨닫게 되는 날은 이전과 다른 하루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하루가 쌓여가면서 당신의 역사를 이루게 될 것이다.
♧ 참고도서
< 내가 왜 살아야 합니까, 윌 듀런트, 유유, 2020.01.14.)
1) 51-52p
2) 54p
3) 63p
4)146p
5) 135p
6) 62p
7) 170p
공산주의 vs 개인주의, 유럽 vs 미국, 동양 vs 서양보다 근본적인 질문.
윌 듀런트에게 삶의 의미를 묻는 한 남자의 절망적인 질문.
단순한 위로로는 해결되지 않는 실존적 고민.
듀런트의 저서 문명이야기의 특징: 역사·철학·종교를 종합적으로 다룸.
개인적 경험: 교회 대신 도서관에서 책을 접하며 삶의 단서들을 연결.
삶은 단서들이 모여 분기점에서 의미를 드러내는 과정임을 깨달음.
듀런트의 생애와 저작: 『문명이야기』와 『내가 왜 살아야 합니까?』.
종교적 회의: 기독교 신앙의 불합리성에 대한 확신.
세월호 사건을 계기로 종교와 사회적 책임에 대한 의문.
목회자의 태도와 성도들의 무비판적 수용에 대한 비판.
칼릴 지브란의 『인간의 아들, 예수』와 예수의 다양한 정의.
진리는 변명하지 않고,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게 드러남.
믿음과 희망의 관계.
진리는 위치에 따라 달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 하나의 꼭짓점에 수렴.
‘일자’ 개념: 종교·철학·물리학에서 다른 이름으로 표현되는 동일한 본질.
조선 철학의 ‘이기론’과 ‘사단칠정론’: 리(보편적 원리)와 기(상대적 현상)의 관계.
다양한 학문과 종교가 결국 같은 진리를 다른 방식으로 설명.
간디의 답변: “완전한 깨달음을 향한 노력이 계속 살아가게 한다.”
개인적 경험에서 민족·세계·진리로 인식의 폭을 확장.
종교와 철학의 근본 가치는 진리 안에서 하나임을 강조.
도덕관념을 통한 선과 악의 구별, 이상적 사회의 가능성.
칸트·루소의 ‘일반의지’와 연결.
집단화된 종교·사회주의의 변질에 대한 듀런트의 비판.
세상은 대립 속에서 균형을 이루며 돌아감.
진리는 고귀한 의복을 두른 듯 보이나, 실제로는 벌거벗은 모습일 수 있음.
현대 사회의 압박: 자기계발, 수치화, 착취.
현실의 문제: 마약, 자살, 사이비 종교.
삶의 질문에 명확한 답은 없지만, 과정 속에서 의미와 목적을 발견.
직관적 상상력 → 예술의 원동력, 인간을 진리로 인도.
실존주의적 깨달음: 카뮈·사르트르의 ‘실존’.
바닥에 패대기 당하는 경험을 통해 지혜를 얻음.
“왜 살아야 하는가”는 각자가 스스로 답해야 하는 문제.
삶의 의문 속에 환희가 숨겨져 있으며, 그것이 역사를 이루어감.
인간은 역행할 수 없습니다. 인간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자신이 살아가는 우주, 어느 정해진 운명을 향해 나아가는 우주의 필수적인 일부분입니다. 인간의 생명이 우연의 산물이었다는 이론에는 나도 수긍합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그 생명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7)
< 어느 수형자가 듀런트에게 보낸 편지 중에서 >
섭리
어떤 이들은 보는 것으로
보이기 위한 삶을 선택하고,
어떤 이들은 듣는 것으로
들리기 위한 삶을 선택한다.
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것이 그의 뜻
듣는 것으로, 들리지 않는 것을
들리게 하는 것이 그의 뜻
사람은 변하는 것으로
변하지 않는 것을 말하려 하고,
그는 변하지 않는 진리로
변해버린 이들을 보게 하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