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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짜라고?

#기억

by 비루투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 깨진다 카더라.

우짜겠니? 와?
내보고 우짜라고?

지는 뭐 있나?
느그는 우짤낀데?

어차피 베린 거,
힘 빼지 말그라.

별 하나에 내 하나,
별 두 개에 느그 둘.


치아뿌라. 고마

너만 아프나?
나도 아프다.

니도 그렇고,
내도 그렇다.

내보고 우짜라고?
내갖고 지랄이고?

웃기고 자빠졌네.
즈그도 그렇다 아이가.

우야노.
우짜겠노.
우짜란 말이고?

뭐 어짜기는.
이왕 이래된 거,
고마, 개겁게 웃짜고!



— 우짜라고, 웃자고


“우짜겠노? 와? 내보고 우짜라고?” 이 말은 질문이 아니다. 그건 탄식이고, 절규이며, 반항이다.
「우짜라고」는 경상도 사투리라는 지역어를 통해 삶의 무게를 견디는 한 인간의 내면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거친 말맛 속에 담긴 감정은 섬세하고 깊다.

“재수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 깨진다 카더라.” 시의 첫 구절은 이미 세상이 공평하지 않다는 선언이다.
운이 없다는 말은, 노력으로도 바꿀 수 없는 현실의 벽을 뜻한다. 그 벽 앞에서 화자는 묻는다.
“우짜겠노? 와? 내보고 우짜라고?”

이 질문은 세상에 던지는 반문이자, 자기 자신에게 되묻는 절규다. ‘우짜라고’는 반복될수록 그 의미가 깊어진다. 처음엔 체념처럼 들리지만, 점차 분노로, 공감으로, 그리고 마지막엔 웃음으로 변모한다. 이 시는 사투리를 단순한 지역어가 아닌 시어로 승화시킨 작품이다.

“지랄이고”, “자빠졌네”, “치아뿌라” 같은 표현은 거칠지만 진짜다. 그 말들 속엔 가식 없는 감정, 살아 있는 말맛, 그리고 버티는 자의 유머가 있다.


“너만 아프나? 나도 아프다. 니도 그렇고, 내도 그렇다.” 이 구절은 시의 정서적 전환점이다.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고, 그 고통을 서로 알아보는 순간, 우리는 공동체가 된다. 하지만 시는 그 공감에 머물지 않는다.
“내갖고 지랄이고?” 이 말은 다시금 세상의 요구에 대한 반발이며, 자기 존재를 향한 방어다.

“이왕 이래된 거, 고마, 개겁게 웃짜고!” 이 마지막 구절은 시 전체를 관통하는 정서의 반전이다.
그 웃음은 체념이 아니라, 삶을 비웃는 웃음이며, 그럼에도 살아내는 자의 유쾌한 저항이다.


이 시는 정돈된 언어보다 정직한 감정이 먼저다.사투리와 속어는 거칠지만, 그 안에 담긴 감정은 누구보다 섬세하다.‘우짜라고’라는 말 하나에 화자의 분노, 슬픔, 체념, 그리고 웃음까지 모두 담겨 있다.
이 시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다. 불공평한 세상 앞에서, 무너지고, 자빠지고, 다시 일어서는 그 모든 순간에 우리는 묻는다.


“우짜라고?”



& 이 시는 반복되는 '뭐라카노'로 유명한 박목월 시인의 「이별가」를 오마주했다. 아마도 꾸준히 내 시를 읽어본 분들은 형식 면에서 스펙트럼이 넓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건 나에게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다. 이 시험 저 시험 전전하다 보니 육법을 다 공부했고, 국어도 9급부터 7급, 심지어 임용고시 영역까지도 건드렸다. 고대시가부터 현대시까지, 어휘부터 문법, 띄어쓰기까지 샅샅이 섭렵했었다. 억울한 건, 몇 년 지나니 그렇게 힘들게 공부했던 것들이 가물가물해졌다는 것이고, 더 억울한 건 그런 것들 때문에 내 인생의 황금기가 고스란히 날아가버렸다는 것이다. 눈앞에서 미끄러졌던 게 몇 번이었던가. 그때 버티기 위해 이를 너무 악물어서 치아도 멀쩡한 것이 없다. 아무튼 이런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꺼내놓는 건, 한마디로 더럽게 재수 옴붙은 인간이었다는 거다.

노량진에서 공부할 때는 그래도 상황이 좀 나았다. 그러나 연이어 시험에 떨어지고, 집에서 눈칫밥 먹는 건 편하지도 않았다. 경험해보면 알겠지만, 가장 가깝게 생각되는 사람들이 가장 함부로 대한다. 내가 기독교를 증오하는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그놈의 기도 때문이다.

나는 다른 이들에게 기도해달라고 부탁한 적 없다. 부담만 더해질 뿐이다. 가족이야 그렇다 치자. 수시로 엄마한테 전화 와서 내 얘기하면서 기도해준다는 사람들은 뭔가? 그 사람들이 정말 나를 걱정해서 그랬을까? 아마도 나를 빌미로 우위를 점하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아무튼 그때마다 우리 집은 날 가지고 싸움을 했고, 의견이 합치되는 건 자기들 집안에는 나 같은 인간은 본 적이 없다는 거다.

나는 그때 기도나 위로가 전혀 필요 없었다. 차라리 악담과 저주가 필요했다. 행복과 천국만을 기다리는 그들은 오히려 내겐 독이었다. 나는 그 독을 뽑아내기 위해 절치부심했고, 그러지 않았으면 지금 이 글을 쓰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왜 내가 기도 대상이 되고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하는가? 내가 무슨 죄를 지었는데? 어쩌면 인간은 태어남 자체가 죄인지도! 그런데 그러면 태어나게 만들지나 말든지!

그래서 니체가 매력적으로 여겨졌는지도 모른다. '신은 이미 죽었다'는 대담한 선언, 그리고 기존의 가치에 대한 전복적 시도...

나는 도서관에 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무슨 말인지 이해도 못하면서 읽었지만, 달게 느껴졌다. 그 다음엔 『안티크리스트』를 읽은 것은 물론이다. 그때 나는 구원받았다.

신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만든 종교를 믿지 않는다. 그리고 성경의 권위를 무시하는 게 아니라, 구약을 제껴놓고 무조건적인 사랑만을 부르짖는 그들이 가증스러울 뿐이다. 그들은 고개도 들지 못하던 신의 이름을 아무 데나 갖다 붙였고, 신을 만만하게 보며, 그의 아들을 또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것이다. 좋은 복은 자기 것, 나쁜 것은 주께 던지고 은혜를 바란다. 내가 알기로는 아브라함은 자신의 기도를 드리기 위해 자신의 아들을 바쳤다. 당신들은 그런 믿음이 있는가? 그냥 당신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하고, 나머지를 주의 뜻에 맡기고 기다리는 것이 진정한 신앙이다.



니체는 어떤 상황을 맞게 될지라도 긍정하고, 다시 그것이 올 것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니체의 말이 옳았다. 그런 상황들은 반복되다 보니 익숙한 패턴이 되었고, 그 패턴을 분석하고 이해하다 보니 자연스레 내 일부가 되었다.

나에게는 약한 자들의 천국은 필요없다. 저 위대한 단테처럼 위대한 스승들과 함께 -베르길리우스뿐만 아니라 여정속에서 만난 이들까지 포함하여- 지옥을 지나 연옥을 거쳐 내 발로 천국에까지 걸어가겠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벽에 부딪치고 한계 상황에 처하는 게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것이다. 부딪칠 때마다 깨닫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 생각들을 그냥 날아가게 둔다면 그저 잡생각에 불과하다. 하지만 그것에 의미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적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책을 읽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당신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아주 가까이에서 기다리고 있다.



그러니 걱정만 하지 말고, 한 번쯤은 크게 웃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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