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 수국

#감정

by 비루투스

비 내리는 오후에 네 미소가 떠올라
상처처럼 지워지지 않는,

발걸음을 따라잡지 못한 채 슬픔은 속삭이고,
함께했던 날들은 어둠 속에 사라져 가고 있어!

이제 들을 수 없는 그 따뜻한 목소리도,


파란 수국에 물방울은 반짝이는데...
파란 수국에 추억들은 남아있는데...



— 감정을 담아내는 기억의 그릇


비 내리는 오후, 그 시간은 언제나 감정을 불러낸다.
「수국」은 그 비 속에서 떠오르는 미소와 상처, 그리고 지워지지 않는 기억을 수국이라는 이미지로 응축시킨다.

“비 내리는 오후에 네 미소가 떠올라 / 상처처럼 지워지지 않는” 이 첫 구절은 기억의 이중성을 보여준다. 미소는 따뜻하지만, 그것이 상처처럼 지워지지 않는다는 말은 기억이 곧 아픔이 되는 순간을 암시한다. 기억은 아름다울수록 더 오래 남고, 더 오래 남을수록 더 아프다.

“발걸음을 따라잡지 못한 채 슬픔은 속삭이고 / 함께했던 날들은 어둠 속에 사라져 가고 있어!”
여기서 슬픔은 능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뒤처지고 속삭이는 잔존하는 감정이다. 기억은 앞서가고, 감정은 뒤따르며 화자는 그 사이에서 흔들린다. 함께했던 날들은 어둠 속으로 사라지고, 그 따뜻했던 목소리조차 이제는 들을 수 없다. 그리고 시는 전환점을 맞는다.


“파란 수국에 물방울은 반짝이는데 / 파란 수국에 추억들은 남아있는데”수국은 이 시에서 기억의 상징이다. 특히 “파란 수국”은 그리움의 색이자, 감정의 냉정함과 깊이를 담은 이미지다.

물방울은 반짝이고, 추억은 남아 있다. 즉, 감정은 사라졌지만 기억은 남아 있다. 수국은 그 기억을 조용히 머금고 있는 존재다.

수국은 문학에서 자주 등장하는 꽃이지만, 그 의미는 매우 복합적이다.
- 색이 변하는 꽃: 수국은 토양의 산도에 따라 색이 달라진다.
→ 이는 감정의 변화, 기억의 다층성을 상징한다.
- 여름의 꽃: 장마철에 피는 수국은
→ 비와 함께하는 감정, 젖은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 둥글게 피는 구조: 꽃잎이 모여 하나의 덩어리를 이루는 모습은
→ 조각난 기억들이 하나의 감정으로 응축되는 형상이다.


& 비가 내리던 날, 나는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메이션 《언어의 정원》을 보았다.

타카오와 유키노는 우연히 정자에서 마주친다.

그 만남은 몇 번이고 반복되고,

비가 내릴 때마다 같은 장소에서 서로를 기다리게 된다.


비 내리는 정원은 영화 전체에 고요한 정서를 입히고,

그 빗방울은 두 사람의 마음에 조용히 스며드는 듯했다.


*


고등학생 타카오는 구두 장인을 꿈꾸며,

비 오는 날마다 학교를 빠져나와 신주쿠 교엔의 정자에 앉는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유키노라는 미스터리한 여성을 만나게 된다.

그녀는 타카오의 고등학교 교사였고,

자신을 따르던 학생의 시기와 질투에 상처 입고 학교를 떠난 사람이다.


비 오는 날마다

우연은 기다림이 되고,

기다림은 그리움이 된다.


두 사람은 마치 이끌리듯,

비가 오는 날마다 정자에서 다시 마주친다.

우연이 반복될수록, 그 만남은 기다림이 되고,

기다림은 어느새 그리움으로 바뀌어 있었다.


*


영화를 보는 내내, 문득 태종대에서 보았던 파란 수국이 떠올랐다.

그곳에는 다양한 빛깔의 수국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파란 수국이 유독 기억에 남았다.


파란 수국.

수많은 색 중

유독 기억에 남은

그 푸른 빛.


신비로우면서도 어딘가 쓸쓸한 그 색은

학교에서 어우러지지 못하고 방황하던 유키노의 모습과 겹쳐졌고,

영화 속 정원의 청록과 회색, 짙은 녹음과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마치 그 정원 어딘가에도 파란 수국이 피어 있었을 것만 같았다.


*


수국은 장마철에 피는 꽃이다.

《언어의 정원》이라는 제목은 ‘말의 잎새가 피어나는 정원’이라는 시적 은유에서 비롯되었다.

말로 다 하지 못한 감정과 마음이 조용히 피어나는 공간.


수국은

비와 함께 피고,

비와 함께 기억된다.

겹겹이 쌓인 꽃잎 속에


비가 그치면

그 색은 더욱 선명해지고,

물방울은 햇살에 반짝인다.


파란 수국을 바라보고 있으면,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겹겹이 그 안에 숨어 있는 듯하다.

그건 아마, 타카오가 유키노에게 전하려 했던 마음과도 닮아 있을지 모른다.


내 마음엔

하고 싶은 말이

끝없이 쏟아지지만,


당신에게 전할 수 있는 건

그저 파란 수국에 맺힌

말 없는 물방울들뿐이다.


그래서일까.

꽃망울에 맺힌 물방울이

왠지 눈물처럼 느껴진다.


*


결국, 타카오는 응축되어 있던 감정을 터뜨리지만,

유키노에게 그 마음은 파란 수국처럼

너무도 강렬하고 선명해서

그녀는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한다.


두 사람은 정원을 떠나 각자의 길을 걷게 되지만,

이별의 마지막 순간,

그들은 서로를 깊이 이해하게 된다.


그 장면은

비가 그친 뒤의 정원처럼,

조용하지만 깊은 여운을 남긴다.


*


그리고 나는

파란 수국을 바라보며,

지워지지 않는 상처이자,

지워지지 않아도 좋은 기억을

조용히 떠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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