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회

#존재

by 비루투스


힘없이 여위어가는 가로등 불빛
멀리서 드리워진 여인의 그림자
한 걸음 다가가면, 두 걸음 멀어지네

다가갈수록, 아련해지는 슬픔
고통만이 내 삶을 붙드는 이유

남은 것은 환멸뿐이지만
나는 그것을 놓을 수 없네

거침없이 나를 깨우는 경적소리
유리창 너머, 아스라한 그 모습
바람처럼 흩날리는 기억의 파편

빛바랜 흔적들의 재를 긁어모아
다시 어둠의 거리로 발을 내딛는다


— 기억의 파편 속을 걷다.


기억은 단순한 회상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흔적이며, 정체성의 실마리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시 「추회」는 모두 잃어버린 과거를 추적하며, 그 속에서 자신을 되찾으려는 여정을 그려낸다. 이 두 작품은 서로 다른 언어로 말하지만, 같은 어둠을 걷는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주인공 기 롤랑은 기억상실증에 걸린 채, 자신이 누구였는지를 알아내기 위해 과거의 단서들을 쫓는다. 오래된 명함, 낡은 주소, 흐릿한 사진—그는 이 모든 파편들을 모아 하나의 정체성을 복원하려 한다. 이 과정은 단순한 탐정 소설의 구조를 띠지만, 실은 존재론적 탐색이다. 그는 기억을 되찾는 것이 곧 자신을 되찾는 일임을 알고 있다.


시 「추회」의 화자 역시 어둠 속을 걷는다. “빛바랜 흔적들의 재를 긁어모아 / 다시 어둠의 거리로 발을 내딛는다”는 구절은, 기억을 회피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추적하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이때 ‘추회’는 단순한 후회가 아니라, 기억을 능동적으로 쫓고 품는 행위다. 이는 기 롤랑의 여정과 정확히 겹친다. 그 역시 환멸과 공허 속에서 과거를 붙들고, 그것을 통해 자신을 규정하려 한다.


두 작품 모두에서 기억은 고통스럽지만 필수적인 것이다. 시 속 화자는 “고통만이 내 삶을 붙드는 이유”라고 말하며, 과거의 상처를 외면하지 않는다. 기 롤랑 역시 자신의 과거가 불완전하고 모호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도, 그것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들은 모두 기억의 어둠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는 자들이다.


또한, 두 작품은 정체성의 파편화를 공통적으로 다룬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에서 기 롤랑은 자신을 기억하는 사람들을 찾아다니지만, 그 누구도 온전한 기억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타인의 기억 속에서 자신을 조각처럼 발견한다. 시 「추회」에서도 여인의 그림자, 유리창 너머의 모습, 흩날리는 파편들은 모두 화자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단서들이다. 이들은 완전하지 않지만, 그 불완전함 속에서 화자는 자신을 되짚는다.


결국,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와 「추회」는 우리에게 묻는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과거를 어떻게 대면하는가? 아픈 기억은 우리를 괴롭히지만, 그것 없이는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이 두 작품은 기억을 쫓는 자의 고독한 여정을 통해, 인간 존재의 본질을 조용히 드러낸다.



& 나는 '내가 시를 쓰고, AI가 해석하다.'라는 에세이를 만들면서 말미에 기억에 대한 언급을 했었는데, 그것은 파트릭 모디아노의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라는 책을 읽고난 후의 감상에 대한 코멘트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기억이 정확하고 총체적이라고 믿는다. 이는 기억의 생생함과 자아 정체성과의 연결 때문이다. 우리는 기억을 통해 자신을 정의하고, 삶의 연속성을 유지한다.


하지만 현대 인지과학과 신경과학은 기억이 총체적으로 저장되는 것이 아니라 파편적으로 저장되고 재구성되는 과정임을 보여준다. 즉, 기억은 하나의 통합된 파일이 아니라, 여러 조각으로 나뉘어 저장된 데이터베이스에 가깝다.


우리는 과거의 조각들을 현재의 감정, 신념, 맥락에 따라 조합하여 기억을 떠올린다. 이 과정에서 왜곡이나 허위 기억이 발생할 수 있다.

모디아노가 소설에서 드러내고자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기억의 불안정성이다.


기억을 잃은 한 남자가 있다. 그런데 이 사람의 직업은 아이러니하게도 탐정이다. 기롤랑은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그를 안다고 진술하는 타인의 의해 기억이 계속 재구성된다. 수집하는 단서는 맥락에 따라 의미가 달리질 뿐이지만 그러는 동안 어떤 여자에 대한 이미지가 잠시나마 보이는 것 같다. 주변에서는 굳이 지나버린 과거를 떠올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지만 기억이 없다면 자신의 존재자체가 의미가 없어지기 때문에 그는 노력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그가 진실에 다가갈수록 알수없는 어떤 아픔이 짙어지고 있다.


앞서 기술한 것처럼 기억은 불안정한 것이다. 그러나

기롤랑은 기억의 단서를 찾다보면 완전한 것을 찾을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면서도 진실에 다가가는 것을 두려워하고 있다.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과거를 어떻게 대면하는가? 아픈 기억은 우리를 괴롭히지만, 그것 없이는 우리는 존재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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