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
비틀리고 휘청이며 살아온 날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를 떠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을 떠나보냈나!
말라버린 눈물에 깊어지는 슬픔은,
더 이상 잃을 것도 내게 남겨놓지 않네.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헛헛함을 느끼고,
희미한 기억 속의 그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라캉은 “응시”를 단순한 시각적 행위가 아니라, 주체가 타자의 시선에 의해 구성되는 구조로 설명했다. 우리는 보는 동시에, 보여지는 존재가 된다. 그리고 그 보여짐은 자아를 흔들고, 때로는 분열시킨다.
「응시」는 이 철학적 개념을 감정의 언어로 풀어낸다. 시는 상실과 고통, 기억과 갈증 속에서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의 흔적을 더듬는다.
“비틀리고 휘청이며 살아온 날들, 얼마나 많은 이들이 나를 떠났고, 얼마나 많은 이들을 떠나보냈나!” 이 구절은 관계 속에서 흔들리는 자아를 보여준다. 타인의 떠남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라, 자아의 균열을 일으키는 응시의 흔적이다. 떠난 이들의 시선은 사라졌지만, 그 흔적은 화자의 내면에 남아 자신을 바라보는 방식을 바꿔놓는다.
“말라버린 눈물에 깊어지는 슬픔은, 더 이상 잃을 것도 내게 남겨놓지 않네.” 이 부분은 상실의 반복 속에서 감정이 마모된 상태를 보여준다. 눈물조차 말라버린 감정은, 더 이상 타자의 응시를 감당할 수 없는 자아의 상태다. 라캉의 이론에서 응시는 욕망의 대상이 되는 순간, 주체는 자신을 잃는다. 이 시의 화자는 그 욕망의 대상이 되기를 거부하면서도, 그 상실을 감내하는 존재다.
“채워지지 않는 갈증에 헛헛함을 느끼고, 희미한 기억 속의 그것을 가만히 바라본다.” 마지막 구절은 응시의 역전이다. 화자는 이제 자신이 바라보는 존재가 된다. 그러나 그 대상은 명확하지 않다—“그것”은 기억 속의 잔상, 혹은 자신이 잃어버린 자아의 파편일 수 있다. 이 응시는 타인을 향한 것이 아니라, 자신을 향한 응시다. 그리고 그 응시는 자아의 재구성을 위한 시적 행위다.
「응시」는 라캉의 이론을 감정과 상실의 언어로 재구성한 작품이다. 이 시는 단순히 슬픔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아가 타자의 시선 속에서 어떻게 흔들리고, 다시 구성되는지를 보여주는 시적 실천이다. 응시는 타인의 눈이 아니라, 내면의 그림자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자신을 다시 응시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