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결혼의 컨버젼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드보통

by 비루투스

보통 우리가 사랑이라 부르는 것은 단지 사랑의 시작이다. 1)


사랑


우리는 예술에 담긴 이상을 흡수한 뒤 그 가치들을 현실에서 구현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 2)


사랑은 시대마다 다른 얼굴로 등장한다. 플라톤은 그것을 단순한 욕망이 아니라 ‘진리를 향한 정서적 여정’이라 보았고, 기독교는 사랑을 ‘감정을 넘어선 헌신의 행위’로 규정했다.
현대 사회에 이르러서는 결혼이나 가족보다 개인의 행복과 만족이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으며,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고 싶은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플라톤의 이상주의적 사랑, 기독교의 헌신적인 사랑, 현대의 자유로운 사랑은 형태는 다르지만 공통적으로 사랑을 자기 초월과 성숙한 관계를 지향하며, 삶을 변화시키는 본질적인 힘으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다.


사람은 완성된 상태로 태어나지 않는다. 우리는 양육과 교육 그리고 경험을 거쳐 인격이 형성되어 가며, 그러한 과정을 ‘성장’이라 부른다.

사랑도 마찬가지다. 처음엔 본능처럼 다가오지만, 누군가와의 관계 속에서 유사한 감정을 반복하고, 조율하게 되면서 깊이를 체험하게 될 때, 비로소 우리는 그것을 '성숙한 사랑'이라 부르게 된다.

또한 완벽한 조건을 갖춘 사람도 없다. 진정한 사랑을 꿈꾼다면, 그러한 기대를 상대에게 요구하기 전에 , 먼저 그런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자각이 필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알면서도 종종 그 반대로 행동하게 될 것이다.


갈등은 흔히 ‘다름’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상은 자신의 결핍을 타인에게 덮어씌우거나, 자신의 미성숙함은 외면하고, 상대에게서 완성된 모습을 기대하며 감정을 일방적으로 요구할 때 발생하게 된다. 그러한 기대는 사랑을 감정의 표면에 머물게 하고, 관계의 깊이를 가로막는 벽으로 작용한다.

결국, 사랑은 누군가가 나를 채워주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스스로 채워질 수 있는 존재로 다듬어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한 사랑이야말로 플라톤이 말한 이상적인 사랑, 즉 자아를 초월하여 진리를 향해 나아갈 수 있으며, 에리히 프롬은 그것은 '자기애'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결혼


결혼: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상대방이 누구인지를 아직 모르는 두 사람이 상상할 수 없고 조사하기를 애써 생략해 버린 미래에 자신을 결박하고서 기대에 부풀어 벌이는 관대하고 무한히 친절한 도박 3)


결혼은 사랑의 개념과는 비슷하면서도 다른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권리와 의무라는 구조적 장치를 계약의 형태로 수반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결혼은 인류 문명 거의 모든 곳에서 자발적으로 등장한 제도이고, 그 기원은 생물학적, 경제적, 사회적 필요에 뿌리를 두고 있다.

고대 사회에서는 임신과 출산으로 인한 여성의 신체적·경제적 부담을 줄이기 위해 남성에게 책임 지우기 위해 시작되었고, 신부값이나 혼수 같은 관습은 결혼을 통해 가문 간의 자산과 노동력을 교환하는 수단이었으며, 단순한 연애의 연장선이 아니라, 출산과 양육, 사회적 책임을 제도화한 인류의 생존 전략이었다.

우리에게 흔히 인식되고 있는 낭만적 결혼은 비교적 최근의 개념으로, 산업화 이후 시민경제가 활성화되면서 개인의 자유와 감정이 중시되면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사랑이 자발적이고 자유로운 특성을 가지고 있다면, 결혼은 쌍방 간의 책임과 규범이 따른다는 점에서 차이를 가지고 있지만, 결혼 자체도 사랑을 전제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상적인 측면이 있다.

결혼은 지속성을 전제로 한다. 그리고 이 계약을 오래 유지하기 위해서는, 기독교적 사랑의 본질인 ‘조건 없는 책임’과 ‘헌신의 의지’가 필요하다. 또한 일정 수준의 생활 기반과 물질적 안정 없이 결혼을 유지하기란 어렵다.

결혼이 사랑을 전제로 한다는 점에서, 사랑이 왜곡되거나 지속되지 않으면 결혼 역시 흔들릴 수밖에 없다. 자본주의와 물질만능주의가 심화될수록, 이러한 붕괴는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만으로는 삶의 본질을 온전히 채울 수 없다는 점 또한 부인할 수 없다.


결혼: 자신이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가하는 대단히 기이하고 궁극적으로 불친절한 행위 4)


오늘날의 사랑은 무게보다 온기를 원한다. 하지만 결혼은 때때로 그 친밀함을 오히려 침묵시키기도 한다. 조건과 의도, 정제된 소개, 판단된 감정 속에서 사랑은 주는 것보다 받기를 바라는 욕망의 형태로도 나타나기도 한다. 하지만 성숙한 사랑은 불완전함을 이해하고, 감정의 흔들림을 두려워하지 않는 관계에서 무르익게 되는 것이다.

알랭드 보통은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에서는 낭만적 사랑이 결혼의 시작이지만, 결혼은 그 이후의 현실적인 갈등과 협력의 연속이라고 말한다. 사랑은 열정이 아니라 기술이며, 서로를 이해하고 협의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있다.


제도 밖의 사랑


오늘날, 사랑의 실현 방식은 결혼이라는 제도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많은 이들이 자발적으로 비혼을 선택하거나, 법적 구속 없이 동반자 관계를 지속하며, 각자의 방식으로 삶과 관계를 설계하고 있다.

이러한 흐름은 단순한 사회 변화라기보다, 자기 결정권에 대한 인식 확대와 제도 중심의 행복 추구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다. 결혼이라는 제도가 반드시 사랑의 도착점일 필요는 없으며, 오히려 제도 밖의 관계에서 더 깊은 신뢰와 협력이 자리하기도 한다.

비혼은 사랑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을 선택적으로 실현하면서도 개인의 독립성과 자유를 지키려는 하나의 방식일 수 있다. 동반자 관계 역시, 법적 책임을 벗어난 대신 감정적 계약과 실천적 협력을 통해 신뢰를 유지하려는 노력의 의지라 볼 수 있다.


남성성과 여성성


우리 눈에 정상으로 보일 수 있는 사람은 우리가 아직 깊이 알지 못하는 사람뿐이다. 사랑을 치유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사람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다. 5)


오늘날 우리는 전통적인 남녀의 역할에서 점점 더 벗어나고 있다. 과거에는 억누르거나 숨겨야 했던 성향들이 이제는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성적 지향이나 MBTI, 감정 표현 방식처럼 한때는 사적인 영역에 머물던 이야기들도 이제는 일상 속에서 자유롭게 공유된다. 이러한 변화 속에서 남성들은 그동안 감추고 억눌러야 했던 여성적인 면모를 발견하고 수용하기 시작했고, 여성들 역시 내면에 존재하던 남성적인 에너지를 꺼내어 사회 속에서 자신 있게 드러낸다.


한때 우리는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화성’과 ‘금성’의 차이처럼 단순화해 이해했다. 남자는 침묵과 해결을, 여자는 공감과 표현을 추구한다는 이분법적 인식은 변화하는 시대 속에서 점점 그 설득력을 잃어가고 있다. 남성과 여성 모두 억눌렸던 자질과 감정을 해방시키며, 이제는 남성성과 여성성이 혼합된 유연한 자아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흐름이 형성되고 있다. 그 결과 엄청난 에너지와 시너지 효과가 발생하고 있으며, 동시에 그만큼의 정체성 혼란이나 관계의 불협화음이라는 리스크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


행복 역시 새로운 정의를 필요로 한다. 과거에는 단순히 삶에서 기쁨이나 만족을 느끼는 상태로 여겨졌다면, 현대 사회에서의 행복은 더 복합적이다. 단지 즐거움의 순간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존재하는 다양한 성향과 자아를 억압하지 않고 균형 있게 통합해 나가는 과정이 포함되어야 한다. 다시 말해, 현대의 행복은 자아의 진실한 통합에서 비롯되는 정서적 평온함까지 전제로 하는 것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을 폭넓게 이해하고, 사랑을 어떤 방식으로 실현하는지는 단순히 개인적인 문제 아니라, 지금 우리가 어떤 사회를 살아가고 있으며 어떤 가치를 중심에 두고 있는지를 반영하는 거울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단지 문화적인 흐름에 그치지 않는다. 인간의 행동에는 생물학적 기반과 정서적 특성이 깊숙이 작용하며, 남성성과 여성성이 발현될 때 분비되는 호르몬은 정서적 균형과 충만감, 행복감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

테스토스테론은 대표적인 남성 호르몬으로, 근육과 뼈의 발달, 성욕, 활력에 관여하며, 에스트로겐은 여성 호르몬으로 생리 주기, 피부 상태, 감정의 안정성에 영향을 준다. 남성성이 활성화되면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상승하여 자신감과 생기를 자극하고, 여성성이 드러나면 에스트로겐 수치가 높아져 공감력과 정서적 평온함이 증진된다.

하지만 스트레스 상황에서는 코르티솔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이 분비된다. 이는 위기 대응을 위해 에너지를 일시적으로 확보하는 데에는 도움이 되지만, 장기적으로 수치가 과도하게 높아지면 성호르몬의 균형을 억제하고 정서적 불균형을 초래할 수 있다. 특히 사회적 역할에 과도하게 매몰되거나 내면의 요구를 외면할 경우, 이러한 생리적 불균형은 신체뿐 아니라 정신 건강에도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다. 그러므로 남자든 여자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고 건강한 정체성을 유지하려면 자신의 몸과 마음 안에서 남성성과 여성성이 어떻게 발현되고 조화를 이루는지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무엇보다 스스로를 이해하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사랑하는 데에서 시작되어야 할 것이다.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실상


사랑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심산할 만큼 감동적인 최초의 순간들에 잠식당하고 기만당해왔다. 우리는 러브스토리들에 너무 이른 결말을 허용해 왔다. 우리는 사랑이 어떻게 시작하는지 대해서는 과하게 많이 알고, 사랑이 어떻게 계속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무모하리만치 아는 게 없는 듯하다. 6)


결혼은 흔히들 신성한 계약이라고 일컬어진다. 여기서 계약이란 상호 간에 권리와 의무가 수반되는 것을 말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결혼이라는 현실에 부딪히게 되면 자신의 권리만을 주장하고 같이 짊어지게 될 의무에 대해서는 피하려고 하거나, 일방에게 전가하려는 경향을 가진다. 그래서 '그'와 '그녀'가 만남에 실패하는 이유는 서로가 응석받이로 태어나 절름발이의 상태로 사랑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인은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환경의 영향도 크다.


사랑은 신체 운동과 작용 원리가 같으며, 가벼운 것부터 순차적으로 강도를 높였을 때, 몸이 서서히 무게에 적응하게 되고, 설정한 목표에 도달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처음부터 자신의 용량을 넘는 무게를 짊어지는 것은 부상의 위험이 높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의 감정이 시작되는 순간부터 너무 많은 것들을 바라고 있고, 그것의 무게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짓눌러 버리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게 만들어버린다.

만남의 과정에서도 어느 정도의 검열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나, 그 검열의 기준이 지나치게 촘촘할 경우에는 사랑은 등가 관계의 이외에 의미를 가지지 못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는 이유는 사랑은 이성보다는 감정에 치우쳐있으며, 그 특성은 촘촘한 것이라기보다 포괄적인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나이를 먹게 되면 점점 조급해지고 책임감과 부담이 더해지게 되며, 잃어버린 감정들은 그만큼 쉽게 돌아오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사랑은 순차적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믿고 싶겠지만 실상은 시간과 함께 사랑에 대한 감정도 점점 희석되어 간다. 우리는 어리석게도 불편한 진실을 직접 대면하고 나서야, 그러한 방황에 대한 답을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깊은 문제들을 생각하기에는 시간은 너무 없고 두려움은 너무 크다. 우리는 자기 보호 본능에 이끌려 스스로를 밀어붙이고, 받은 만큼 되갚아주고, 책임을 전가하고, 엉뚱한 질문을 삼가고, 우리가 추구하는 달콤한 이미지에 붙박인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독히 편드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7)


나는 주입식 공부와 암기 위주의 시험방식과 맞지 않아 남들보다 취업의 시기가 뒤쳐지게 되었다. 그 시간은 엄청난 부담과 콤플렉스로 다가왔고, 그러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없었기 때문에 괜찮은 사람을 만나게 되더라도 감정을 추스르고 그저 보내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사랑하지 못했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사랑할 수 없었다. 당시에는 책임질 수 없는 사랑은 상대방에게 부담을 주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원하는 위치에 도달할 때까지 사람들과 관계 맺는 것을 피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성적으로 되어가면서, 시간이 지날수록 철저해지고, 냉정해져 갔고, 그와 반대로 감정들은 점점 메말라갔다.


삶이 점점 현실을 요구할수록, 사람을 대하는 일은 껄끄러워졌다. 어른이 된다는 건 어느 순간부터 ‘자기 연출’이라는 필터를 거친 관계를 형성하는 일처럼 느껴졌다. 콘셉트를 잡고, 역할을 부여받으며, 연인이라는 이름 아래 점점 ‘진짜 나’로부터 멀어지는 느낌이 그리 달갑지 않았다.

결혼 적령기가 위협받게 될 때쯤, 소개팅이나 주선의 형태로 몇 번 만난 적이 있었다. 대화는 무리 없이 진행되기는 했으나, 조건부로 만나게 되는 관계 속에서 예전과 같은 감정을 전혀 느낄 수 없었다. 그래서 취향이 비슷한 사람이라도 만나기 위해 모임에 찾아가기도 했었지만, 그러한 만남이 의미가 아닌 의도로써 받아들여졌을 때 크게 실망한 적이 있었다.


나는 사랑이란 마음과 마음이 이어지는 깊은 연대라고 믿고, 결혼이란 그러한 연결을 바탕으로 두 사람이 서로의 삶에 참여하고, 동등한 위치에서 함께 길을 만들어가는 관계로 연결돼야 하는 것으로 이해한다


사랑과 결혼의 컨버젼스


판타지가 존재하는 덕분에 하나의 현실을 파괴하지 않고 다른 현실에 거주할 수 있다. 판타지는 완전히 무책임하고 무섭도록 기이한 우리의 충동으로부터 우리가 아끼는 사람들을 지켜준다. 판타지는 나름대로 인류의 성취이자 문명의 결실이며, 친절한 행동이다. 8)


많은 사람들은 사랑을 희생의 이름으로 표현하곤 한다. 그러나 나는 사랑이란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무엇을 내려놓고 감내하는 고통의 미덕이 아니라, 두 사람이 각자의 자율성을 지키면서 함께 성장해 나가는 과정이라고 생각한다. 결혼은 그것을 지속해 나가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혼자서 감정을 짊어지기보다는, 서로의 무게를 나누고 조율할 수 있을 때, 사랑은 의무가 아닌 선택이 되며, 굴레가 아닌 자유가 것이다. 이러한 사랑은 상생의 길이다. 독립된 두 사람이 자율성과 책임을 가지고 서로를 존중할 때, 관계는 더욱 건강하게 자라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는 더 나은 존재로 확장될 수 있다—스스로를 잃지 않으면서도, 누군가와 더 깊이 연결되는 방식으로.


사랑의 속성 역시 양자역학처럼 상대적이다. 우리가 사랑을 어떤 의도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측정값은 달라지게 된다.

사랑을 ‘조건’으로 바라보게 되면, 그것은 감정이 아닌 ‘질량’처럼 굳어지고, 그 무게는 결국 서로에게 짐처럼 작용하게 될 것이다. 하지만 사랑이 질량이 아닌 ‘파장’이라면—보이지 않지만 모든 방향으로 퍼져나가는 에너지처럼, 물리적인 경계를 넘어 두 사람을 자연스럽게 이어 줄 수 있다.

마치 샤갈의 그림처럼, 그 사랑은 시간과 공간을 가볍게 넘나들며, 팍팍하게 여겨질 수 있는 현실을 좀 더 의미 있는 곳으로 바꿔줄 것이다.


나는 그저, 잃어버린 시간들을 회복하고 싶을 뿐이었다. 그 대상은 사랑과 행복 같은 추상적인 단어에 국한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나가버린 모든 것에 대한 추억, 그리고 잊히지 않는 감정들에 대한 그리움이 훨씬 더 가까울 것이다. 어쩌면 나는 그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에게서 발견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의 주인공들은, 20년이 지나서야 결혼할 준비가 되었다고 고백한다. 결국 불완전한 사람들이 만나 사랑하고, 서로 다양한 감정들을 경험하면서 결혼은 서서히 완전해져 간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러한 과정을 생략한 채, 처음부터 너무 많은 것을 청춘들에게 강요하고 있다. 그러면서 인구 소멸을 걱정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아이러니하다.


완전한 사랑의 조건은 존재하지 않는다. 한꺼번에 모든 것이 충족되는 것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깝다. 오히려 ‘완전함’이란, 서로의 미비한 점들을 서서히 보완해 나가는 과정 속에 숨어 있다. 그리고 진정한 사랑은 까다롭고 불쾌하게 느껴지는 순간들 너머에 놓여 있을지도 모르는, 무언가를 향해 끊임없이 관대하게 해석하려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

사랑의 속성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라’는 말이 따라붙는다. 하지만 그 과정은 결코 낭만적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사랑은 행복과 불행, 삶과 죽음, 만남과 이별— 완전히 다르게 보이는 감정과 경험조차 포괄하는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서로를 바라보고, 믿으며, 때로는 견뎌야 할 순간을 함께 이겨낼 수 있는 감정이라면— 우리는 그 감정을, 그 이름 그대로 ‘사랑’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결혼은,
그런 사랑이 시간을 지나며 단단해지고, 서로의 삶에 고요히 스며들어 끈끈한 연대로 이어질 수 있도록
그 길을 조금씩 보여주게 될 것이다.


비록 내가 그 사랑의 당사자가 되지 못하더라도,
진심 어린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을 가까운 자리에서 조용히 응원하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더 단단해지고, 더 깊어질 수 있도록 따뜻한 시선으로 지켜보고 싶다.



©참고문헌


< 알랭드 보통,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일상 (김한영 옮김), 은행나무 2016.08.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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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랑과 결혼의 컨버전스 』 논리적 구조 (챗GPT분석)


I. 사랑

사랑은 시작일 뿐이며, 관계 속에서 성숙한다.

플라톤은 사랑을 진리로 향하는 여정, 기독교는 헌신, 현대는 자유와 만족으로 본다.

갈등은 다름이 아니라 결핍을 상대에게 덮어씌울 때 생긴다.

진정한 사랑은 상대에게 완벽을 요구하기보다 스스로를 다듬는 과정이다.


II. 결혼

결혼은 사랑과 닮았지만 권리와 의무를 수반하는 계약이다.

고대에는 생존 전략, 현대에는 낭만적 제도로 자리 잡았다.

지속성을 위해 책임·헌신·물질적 기반이 필요하다.

사랑이 흔들리면 결혼도 흔들린다.


III. 제도 밖의 사랑

오늘날 사랑은 결혼 제도에만 의존하지 않는다.

비혼과 동반자 관계는 독립성과 자유를 지키며 사랑을 실현하는 방식이다.


IV. 남성성과 여성성

전통적 성 역할에서 벗어나 억눌린 자질을 해방한다.

남성과 여성은 혼합된 자아를 받아들이며, 행복은 자아의 통합에서 비롯된다.

호르몬과 정서적 균형은 사랑과 행복에 직접적 영향을 준다.


V. 낭만적 연애와 그 후의 실상

우리는 사랑의 시작은 잘 알지만 지속은 잘 모른다.

계약이지만 현실에서는 권리만 주장하고 의무는 회피한다.

사랑은 운동처럼 점진적으로 깊어져야 하지만, 과도한 기대는 관계를 짓누른다.


VI.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취업 지연으로 부담과 콤플렉스를 겪었다.

책임질 수 없는 사랑을 피했고, 점점 냉정해졌다.

조건부 만남 속에서 감정을 느낄 수 없었다.

마음의 깊은 연대, 결혼은 그 연대를 바탕으로 함께 길을 만드는 관계다.


VII. 사랑과 결혼의 컨버전스

사랑은 희생이 아니라 자율성을 지키며 함께 성장하는 과정이다.

결혼은 그것을 지속하는 도구다.

완전한 사랑은 없으며, 서로의 미비한 점을 보완하는 과정 속에 있다.

사랑은 모든 감정을 포괄하며, 결혼은 그 사랑을 단단한 연대로 이어준다.



& 알랭 드 보통은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사랑은 자기 자신의 허점을 넘어서고 싶어 하는 인간 희망의 승리”라고 말했다. 사랑은 논리적 확신보다 감정적 신뢰를 선택하는 행위다. 그래서 사랑은 철학보다 신앙에 가깝다.


사랑은 증명할 수 없는 것을 믿는 일이다. 그것은 논리의 영역이 아니라 감정의 모험이다. 우리는 사랑을 통해 타인을 믿고, 그 믿음을 통해 스스로를 믿는다. 결국 사랑은 자신이 사랑받을 만한 존재라는 믿음을 확인받고 싶은 내면의 신앙 고백이다.


나는 어릴 적 장난기가 많았고, 관계에 진중하지 않았다. 그런 나를 바꾸기 위해 책을 읽고, 어른스러운 말과 행동을 익히려 애썼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인내의 시간을 지나며 이상적인 모습에 가까워졌지만, 이성관계에서는 여전히 미숙했다. 내가 쌓온 특질들을 상대도 갖추길 바랐고, 들인 노력만큼의 보상을 기대했다. 당연히 관계는 진전되지 않았다. 괜찮아 보이는 사람은 누구에게나 괜찮아 보이기 마련이고, 그런 사람들은 이미 짝이 있었다.


사랑은 이상을 투사하는 과정이지만, 그 이상이 오히려 관계를 어렵게 만든다. 드 보통은 “우리는 사랑을 통해 자신이 되고 싶은 모습에 가까워지려 한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기대는 종종 실망으로 돌아온다. 이상은 나를 성장시키지만 동시에 타인을 판단하는 잣대가 되기도 한다. 사랑은 이상을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의 불완전함을 견디는 일이다.


공자는 “학문은 물을 거슬러 배를 모는 것과 같아서, 나아가지 않으면 퇴보한다”라고 했지만, 나 같은 속인에게는 그저 머무는 것도 쉽지 않았다. 루틴을 고집하는 이유는 긴장이 풀려 나태하게 살다가 의미 없이 사라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고, 고전과 철학 같은 책을 읽으며 생활 루틴을 유지하려 애쓴다. 여행도 꺼리는 편이다. 루틴이 깨지면 게을러지고 싶어지기 때문이다.

이 습관은 억지스러운 패턴을 자연스러운 것처럼 착각하게 만들지만, 사실은 꾸준한 의지가 없으면 언제든 처음으로 되돌아갈 수밖에 없다. 루틴은 자아를 지키는 방어막이지만, 동시에 자유와 친밀함을 차단하는 벽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나에게 없는 특질을 가진 사람들을 동경했고, 그들과 대화하는 것이 즐거웠다. 하지만 그녀들은 나보다 훨씬 나이가 많거나 이미 짝이 있었다. 나를 좋아해 주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때 나는 사랑받는 것을 너무 당연하게 여겼고, 오만하게 대했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패착 중 하나였다. 나는 똑똑한 척했지만, 사실은 바보였다.


그때는 생각보다 행동이 먼저였다. 감정이 앞섰고, 웃음은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 반대다. 생각이 행동을 앞서고, 말은 조심스러워졌으며, 웃음은 맥락을 따진다. 여유도 생겼고, 이상적인 사람을 만날 기회도 많아졌지만, 사람을 대하는 일은 더 껄끄러워졌다. 아마도 미래에 대한 걱정이 더해졌기 때문일 것이다.

관계가 깊어질수록 ‘지금’은 불안해지고, ‘나중’을 견딜 수 있을지 계산하게 된다. 그래서 대화를 나누고 나면 항상 마음 한구석에 설명하기 어려운 공허함이 남았다.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그것이 ‘친숙함’이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어릴 적 교회와 공동체 안에서 함께 있을 때는 이유 없이 즐거웠고, 장난치며 노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었다. 그러나 어른이 된 후에는 알지 못하던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콘셉트를 잡고, 그에 맞는 연출을 해야 했다. 말투, 표정, 취향, 심지어 웃음까지도 조율해야 했다. 그 모든 과정은 내게 어울리지 않는 옷처럼 불편했다. 그래서 연애와 결혼을 생각하면 기대보다 한숨이 먼저 나왔다. 나는 이렇게 되려고 절제하고 공부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이전보다 나은 모습을 갖추고, 그 모습으로 조금 더 행복하게 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 행복이 나를 연기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이라면—그건 내가 바라던 삶이 아니었다.


나는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고, 어제보다 나은 내가 되기 위해 살아왔다. 그 노력은 나를 위한 것이었지만, 동시에 언젠가 마주할 누군가를 위한 준비이기도 했다. 하지만 문득, 그런 열심이 죄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변을 돌아보지 않고, 나만을 위해 앞으로만 걸어온 죄. 함께 걷는 법을 배우기도 전에, 혼자 멀리 가는 법부터 익혀버린 죄. 사랑을 기다리면서도, 정작 사랑이 머물 자리를 비워두지 못한 죄.

주여, 불쌍한 이 죄인을 용서하소서. 그는 오직 그것만이 길인 줄 알고 어리석게만 살았나이다.


내가 찾고 있었던 것은 완벽한 상대가 아니라, 나를 이해해 주는 단 한 사람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조건이 아니라 공명이다. 나의 결핍에 울림을 주는 타인의 존재, 그것을 나는 지금까지 바라왔던 것이다.


세상은 긍정적인 페르소나를 쓰라고 말한다. 시간이 갈수록 그 가면의 무게는 무겁게 느껴진다. 현실적이고 이성적으로 살아온 내 모습은 때로는 버겁다.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인격이지만, 마음 깊은 곳엔 여전히 어린아이가 잠들어 있다. 그 아이는 내가 잃어버린 감정의 원천이자, 진짜 나였다.


결국 나는 내가 바라던 모습이 아니라, 잃어버린 감정을 찾기 위해 헤매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마주 보지 못한 채, 뒤돌아서서 그녀가 돌아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진짜 나는, 내가 감추려 했던 그 연약함 속에 있었다. 사랑은 그 연약함을 드러내는 용기다. 강한 사람이 사랑하는 게 아니라, 약한 자신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지 알 수 없다. 다만 내게 익숙한 모습으로, 편안하게 다가오는 사람이었으면 한다. 진지한 이야기도 좋지만, 함께 무거워지는 건 바라지 않는다. 그건 나 하나로 충분하다.

그저 내가 던지는 농담에 가볍게 웃어주고, 실없는 말엔 짜증도 내주는 그런 사람이면 좋겠다.


사랑의 언어는 논리를 넘는 감각이다. 나도 언젠가 그런 감각을 건네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싶다. 그리고 그 말이 나에게 다시 돌아오는 날을 바란다. 언젠가는, 지금과는 또 다른 ‘나’를 마주할 날이 올 것이라 믿으며—조용히 기대해 본다.



< 사랑이 사람이 되었다>


사랑은—

가벼운 숨결처럼.

아무 말 없이, 그저

가슴 깊은 곳에 스며들어

작은 바람이, 마음을 흔든다.


결혼은—

조용한 다짐처럼.

말없이, 그러나

삶의 가장 깊은 곳에 닿아

작은 인연이, 인생을 흔든다.


사랑과 결혼—

자신을 다 알지 못한 채,

서로를 영혼의 짝이라 믿는다.

완전한 사랑을 꿈꾸어 왔었지만

완전한 사람은 처음부터 없었다.


잃어버린 감정은 잊혀져가고,

시간과 함께 조용히 지나간다.

불편한 진실과 마주하고 난 후,

사랑이 기술임을 깨달을 것이다.


사랑은 질량이 아니라 파장.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힘.


샤갈이 그렇게 사랑을 그렸듯이,

시간과 공간을 가볍게 넘나들며,

그곳을 더 빛나는 곳으로 바꾼다.


불완전한 채로 서로를 비추고,

불완전한 채로 서로를 사랑해,


우리는, 각자가

그렇게, 조금씩

사람이, 되어간다.



"미안해요, 스포프 씨. 내가 항상 당신이 원하는 사람은 못 되어줬어."
그가 그녀의 드러난 팔을 쓰다듬으며 대답한다. "아니, 그보다 훨씬 더 훌륭했지."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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