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 전체주의적인 키치 왕국에서 대답은 미리 주어져있으며, 모든 새로운 질문은 배제된다. 따라서 전체주의 키치의 진정한 적대자는 질문을 던지는 사람인 셈이다. 질문이란 이면에 숨은 것을 볼 수 있도록 무대장치의 화폭을 찢는 칼과 같은 것이다. 1)
행위의 목격자가 있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좋건 싫건 간에 우리를 관찰하는 눈에 자신을 맞추며, 우리가 하는 그 무엇도 더 이상 진실이 아니며, 군중이 있다는 것, 군중을 염두에 둔다는 것은 거짓 속에 사는 것이다. 2)
아기가 태어나서 100일이 지나면 돌잔치가 열리는데, 그날 상 위에는 여러 가지 물건들이 놓여있다. 물건에는 상징이 내포되어 있고, 그중 하나를 아기가 손으로 잡을 때, 그 물건은 그 아이의 운명과 관계있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믿는다. 나의 경우 사전을 잡았다고 들었다. 그런데, 내가 나의 운명을 알고 집었을까? 그것은 절대로 아닐 것이다. 아마도 부모님들이 그것을 잡도록 유도했을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데 어찌 되었든 나는 어렸을 때부터 내 주변에 있는 책은 전화번호부 빼고 다 읽었던 것 같다.
초등학교 때는 각종 글쓰기 대회와 미술대회에서 입상을 휩쓸기도 했었고, 나중에 어른이 되면 헤르만 헤세의 '데미안'같은 글을 쓰고 싶다고 생각했다. 나는 책을 읽고 공상을 하고 그것을 표현하는 시간이 너무 즐거웠기 때문에, 친구들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서 골방에 있는 것이 더 즐거웠다. 그러나 나에게는 책 읽는 것과 글 쓰는 것 이외에 특기할만한 재능이 없었다. 공부는 잘하는 편이었으나, 교우관계가 원만하지 않았고, 성적표에는 '정신산만'이라는 단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다녔었다. 그런데 그때는 모든 것이 내 잘못이라 했고, 나도 그런 것으로만 알고 있었다.
중고등학교는 더 최악이었다. 분위기 자체가 폭력적이었고, 선생님들이 뺨을 때리거나 당구대로 아이들을 폭행하는 것은 예사였다. 그리고 주입식 교육은 전혀 나와 맞지 않았다. 들어갈 때는 우수한 성적으로 들어갔으나, 시간이 갈수록 성적은 떨어졌고 그에 따라 장점인 것 같았던 요소들도 점차 희석되어 갔다. 대한민국 사회에서는 취업을 위한 기술교육이나, 입시를 위한 수험공부 이외에 딱히 취급을 받지 못하였기에 나는 스스로 재능과 감정을 폐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성적이 올라간 것도 아니었고, 그저 아등바등 버티고 있는 게 다였다. 그러던 어느 날 영웅이 나타나 외쳤다. "왜 바꾸지 않고 마음을 졸이며 젊은 날을 헤맬까? 왜 바꾸지 않고 남이 바꾸길 바라고만 있을까?"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었던 말이었고, 그것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과연 내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이 있을까?', '이제 난 무엇을 해야 하는 거지?' 여러 방면으로 고민을 많이 해봤지만, 그저 고민만 할 뿐, 머물러 있던 곳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했다.
인간은 가장 깊은 절망의 순간에서조차 무심결에 아름다움의 법칙에 따라 자신의 삶을 작곡한다. 3)
대학이라는 곳에서는 자유라는 것을 만끽할 수 있었다. 열정을 가진 교수님들과 꿈을 가진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은 행운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시기에는 내가 못한다고 생각했었던 것을 극복하려고 많은 노력을 했고, 어느 정도 성과가 있었다. 근육운동으로 만들어진 체력을 바탕으로 외모에도 자신감이 생겼고, 그것을 토대로 남 앞에 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그 당시를 생각하면 나는 두려움이 없었던 것 같다. 열심히 노력만 한다면 세상을 다 가질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취업이라는 문턱 앞에서는 그 정도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준비하던 시험에서 번번이 낙방하게 되면서 다시 의기소침하게 되고, 또다시 위축되기 시작했다. 왜 나에게만 이런 일이 반복되는 것일까? 주변에서 하나씩 자신의 길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보면서 다가올 미래가 불안하였고, 어떻게든지 나는, 처해있는 현실 속에서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진단하고 그 상황에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찾아야만 했다.
나에게는 약한 사람들의 천국은 필요가 없었다. 중요한 것은 고난에서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더불어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부모님한테 언제까지고 손 벌리기는 어려워서, 아침에 택배 상하차를 하고 오후에는 공부하는 패턴을 병행했다. 그중에서도 틈틈이 근육운동을 했는데, 군대 있을 때 체력장을 하면 항상 상위 클래스에 들었었고, 그것이 내게 남은 유일한 자부심이었기 때문이다. 일요일이 되면 교회 대신 도서관에 가서 다양한 종류의 책을 읽었고, 그것은 내가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사치이기도 했다.
카뮈를 읽으면서 알게 된 것은 세상은 원래 부조리하며, 그러한 것을 견디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반항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내 의사와 상관없이 태어나 버렸고, 고통은 태어남과 동시에 존재했다. 이렇게 삶의 고통에 내던져진 이상 모든 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그것이 나를 힘들게 하는 근본적인 무언가였다. 그러나 그러한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지는 법이다.
반항, 그것은 지금까지 내가 해왔던 것 중에서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기 위해서는 한계를 이겨낼 수 있는 근력과 정신을 가다듬을 수 있는 집중력을 길러, 내 능력의 한계치를 최대한 끌어낼 수 있는 것이 필요했다.
근육운동을 할 때는, 중력을 최대한 활용했다. 천천히 몸을 들어 올려 극한의 단계까지 몰아붙여 자극을 최대화한 후 스트레칭 하는 시간 외는 쉬지 않고, 1시간 반 정도 운동을 했다. 왜냐하면 밀도 있게 운동해야 공부시간을 좀 더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도서관에 갈 때면 먼저 일주일간 신문을 훑어보고 시사 잡지를 읽었고, 책을 읽다가 집중력이 떨어지거나 지겨우면 다른 분야의 책을 돌려가며 읽었다. 그러다 보니 이 사회의 구조가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했고, 그 사실을 어느 정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과 깨달음에도 불구하고 상황은 크게 개선되지 않았고, 연단의 시기는 길어져만 갔다. 그런데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거듭된 실패에 이전만큼 괘념치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것은 관점의 폭이 넓어지면서, 자기 객관화가 어느 정도 완성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다 예정에 없던 시험이 갑자기 생겨났고, 드디어 나는 합격하였다.
취업에 성공했다고 해서 고난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나의 첫 발행지였던 김해공항은 세계에서 가장 효율성이 높은 곳으로 표창까지 받은 곳이었다. 물밀듯이 들어오는 승객 수에 비해 직원 수는 모자랐고, 주변에 몸이 성한 직원들이 없을 만큼 업무강도는 엄청났다. 내가 그곳에서 버틸 수 있었던 건, 평소에 몸 상태를 점검하고, 꾸준한 운동과 영양제 섭취를 해왔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정신건강을 위해 비번 날마다 책을 읽었고, 정기적으로 독서모임을 하면서 비슷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들과 교제하였다.
책을 읽으면서 인상적인 구절을 발견할 때마다 공책에 손으로 베껴 적었는데, 그것이 쌓이면서 어느 순간부터 글을 적게 되었다. 시간 날 때마다 틈틈이 내부망에 글을 올리다가 지식인으로 선정되어 상을 받기도 했고, 인권강사로 선정되기도 했다. 그러다 독서모임에서 브런치라는 앱을 소개받고 글을 올렸는데, 작가로 등록되었다.
인간의 시간은 원형으로 돌지 않고 직선으로 나아간다. 행복은 반복의 요구이기에 인간이 행복할 수 없는 것도 이런 이유때문이다. 4)
사람들은 자신의 어려웠던 시기들을 말하는 것을 숨기거나 포장하는 성향이 짙지만, 나는 내 삶을 철저히 탐구했기 때문에 솔직하게 이야기할 수 있고, 그 시간들이 결코 내 인생에 마이너스만 있었던 것을 아니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오히려 그 기간 동안 읽었던 책과 그것을 토대로 한 생각과 감정들이 그 빈 공간을 채우고 있기 때문에, 필요할 때마다 그곳에서 글감들을 발굴해내고 있다.
나는 누구든지 자기 몸무게만큼을 들어 올릴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을 들어 올릴 수 없다면 불필요한 살을 덜어내고 그만큼의 힘을 키우면 될 일이다. 근육운동이나 장거리 달리기를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단기간에 체력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조금씩 서서히 무게를 늘려나갔을 때, 목표치에 도달할 수 있고, 그 희열은 경험해 본 사람만이 안다. 그것은 책에 대해서도 같은 원리가 적용된다. 좋은 책은 항상 무게감과 그에 해당하는 깊이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정면으로 대하지 않고, 피상적으로 지식을 얻으려는 사람들은 자신의 수준만큼의 지식수준에 머무를 뿐이며, 지혜의 단계까지 도달하기 어려울 것이다. 지혜는 지식을 통합하는 능력이며, 스스로 경험하고 받아들이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며, 피상적인 것은 욕망에 다름 아니다. 사랑은 서로를 가볍게 하고, 욕망은 무겁게 만들어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테레사의 사랑은 운명적이고 필연적인 것이지만 토마시에게는 사랑은 수많은 우연 중에 하나일 뿐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을 짓누르는 사랑의 무게감을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테레사는 토마시의 가벼움을 이해하게 되었고, 토마시는 테레사의 무거움을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들은 결국 죽게 되지만, 함께 있다는 사실에 행복해했다. 반면에 프란츠는 사랑을 숭고한 감정으로 받아들이며, 그것에 대한 의무감 때문에 모든 것을 포기했다. 그러나 사비나는 그러한 무게를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그를 떠나게 된다. 결국 프란츠의 숭고함은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만들었고, 사비나는 그녀를 떠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자유로울 수 없게 되었다.
나는 왜 그렇게 고민을 하고 힘들어했는지에 대한 물음에 대하여 답을 찾을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누구인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알지 못한 불안감으로부터 오는 스트레스였다. 나는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에 부합하지 못했고, 주변에서 그러한 굴레가 입혀지는 것에 심한 거부감을 느꼈다. 나름 여러 방면으로 발버둥을 쳐보려고 했지만 그럴수록 수렁에 더 빠지는 것만 같았다. 나에게는 다른 가능성을 선택할 수 있을 만한 여유가 없었고, 할 수 있는 것은 한 방향을 향해 버둥거리는 것뿐이었다.
버둥거리는 것, 그것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었고, 나는 부여잡은 가능성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러다 보니 불안과 공포는 익숙한 것이 되어갔고, 반복되는 행위를 통해 그것들을 하나씩 극복할 수 있었다.
앞으로도 내 인생은 순탄치 않을 것이지만 그것은 예전부터 반복된 것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리고 지금까지 그래 왔던 것처럼, 나는 그것에 맞서서 저항하고 버티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내가 감당하여야 할 자유의 무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 참고도서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이재룡 옮김), 민음사, 2018.06.20 >
1) 411p
2) 122p
3) 93p
4) 483p
5) 13p
『 나는 반항한다, 내게 주어진 것에 』 논리적 구조 (챗GPT분석)
전체주의적 키치와 질문의 의미
돌잡이와 운명에 대한 상징
어린 시절의 독서와 글쓰기 경험
학교 시절의 폭력적 분위기와 주입식 교육의 부조리
영웅의 등장과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
절망 속에서도 삶을 아름답게 작곡하는 인간
대학에서 경험한 자유와 자기 극복
근육운동과 독서로 자기 한계에 도전
카뮈의 부조리 철학과 반항의 필요성
실패와 자기 객관화, 그리고 취업 성공
직장 생활 속 고난과 독서·글쓰기의 지속
글쓰기를 통한 자기 표현과 사회적 인정
인간의 시간은 직선으로 흐른다는 인식
고난의 시기를 솔직하게 탐구한 경험
운동과 독서의 공통 원리: 무게와 깊이
사랑의 무게와 가벼움에 대한 문학적 은유 (쿤데라)
불안과 공포를 반복 속에서 극복하는 과정
자유란 고난을 감당하며 저항하고 버티는 선택
& 12월 25일, 크리스마스 새벽부터 빡빡한 지속주를 달렸다. 코치님은 내게 상체 근육이 체력 소모를 키운다며, 근육을 키우는 시간에 러닝에 더 집중하면 기록이 훨씬 좋아질 거라는 애정 어린 조언을 건넸다.
사실 나는 처음부터 마라톤 완주를 목표로 달리기를 시작한 건 아니었다. 그저 나에게 필요한 루틴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느새 풀코스를 세 번이나 완주하게 되었다. 마라톤의 매력은, 그 과정이 죽을 만큼 힘들다는 데 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에 대한 공포와 불안을 마주하면 삶의 방향이 바뀌게 된다. 마라톤에서도 30km를 넘기면 급격한 체력 저하가 찾아오고, 그때부터는 포기하고 싶은 자신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그 싸움을 반복하며 사람은 강해지고, 어느 순간 그 고통마저 즐기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마라톤은 어쩌면 가장 안전한 운동일지도 모른다.
지인들은 가끔 나에게 “공무원답지 않은 소리를 한다”고 말한다. 직업에 대한 사회적 기대와 고정관념을 빗댄 말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두 세계를 상황에 따라 섞기도 하고, 때로는 완전히 분리하기도 한다. 가끔은 기대를 깨뜨릴 때의 반응을 즐기기도 한다. 일부러 벗어나려 하진 않지만, 굳이 고정관념에 얽매이고 싶지도 않다. 다행히 주변에 좋은 사람들이 많고, 내 개성을 인정해주는 분위기 덕분에 직장생활이 지루하진 않다.
우리는 태어날 때부터 고정관념에 눌려 살아간다. 선택은 가능하지만,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는 듯하다. 사회는 기준을 만들고, 사람들은 그 기준을 충족시키는 것을 ‘선’이라 믿는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그 숫자에 너무 많은 의미가 부여되어 있다.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그 굴레를 짊어진다. 그리고 그 기준을 충족시키지 못하면, 그것은 점점 무거운 짐이 되어간다. 그 짐을 내려놓는 순간부터 존재의 의미는 서서히 희미해진다.
1999년, 노스트라다무스의 예언을 은근히 기대했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삶을 꾸역꾸역 살아낼 수밖에 없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다가온다. 다른 사람의 일일 때는 알면서도 실감하지 못한다. 하지만 자신의 차례가 오면, 아무도 붙잡아 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는 군 생활 중 타인의 죽음을 아주 가까이에서 목격했고, 그것이 점점 내 주변으로 번져가는 것을 느낀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막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도 그 시간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다.
그리스의 영웅들은 죽음을 예감하면서도 신과 맞서 싸웠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가치를 위해. 특히, 죽음을 알면서도 전장으로 나아간 헥토르는 내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결국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스스로 생각하며,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지는 것이다.
내가 받아온 교육과 믿어온 종교는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사회적 기준과 누군가의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한 것이었고, 정작 나 자신을 위한 것은 처음부터 없었다. 나는 무의식까지 억압당한 채,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함을 자책하며 살아왔다. 뒤늦게라도 그렇게 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달은 건 다행이다. 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시간은 내게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었고, 그래서 나는 ‘참을 수 있을 정도의 무게’를 내 신체와 정신에 입히기로 했다.
니체는 ‘중력의 영’에 끌려가지 말라고 했지만, 나는 오히려 내 몸과 마음에 중력을 최대한 실었다. 하루키에게 공감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그는 흐트러지지 않기 위해 철학서를 읽고, 늘 신체를 단련해왔다. 70세가 넘은 지금도 마라톤을 뛰고 있으며, 심지어 나보다 기록도 좋다.
책을 읽으며 문장을 골라내는 행위는 내 무의식을 표면화하기 위한 밑작업이었다. 그렇게 꺼낸 문장들을 의식적으로 연결해 글을 써보려 했다. 철학서를 읽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된 일이지만, 그것은 정신분석학적인 접근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고, 상담자처럼 분석하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내가 쓴 글들은 기존의 연구나 해석보다 훨씬 개인적이고, 반복되는 레퍼토리가 느껴진다.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한다.
팔굽혀펴기와 턱걸이는 내게 단순한 운동이 아니다. 그것은 자존감이며, 의식이다. 언젠가 내 주먹이 내 무게를 지탱하지 못하고, 손아귀의 힘이 빠져 더 이상 나를 들어올릴 수 없는 날이 올 것이다. 그때 나는, 모든 순간 속에서 그 무게를 견뎌낸 내가 있었다는 것을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가볍게 웃으며, 그동안 애써온 ‘나’를 조용히 보내줄 것이다.
< 그리고 >
짊어진 삶, 짐 없는 존재.
다시, 또다시 — 끊임없이, 처음부터.
주어진 대답, 한 번뿐인 삶
완성 없는 밑그림, 리허설 없는 인생.
무의미 속에 의미를 짜내고,
덧붙이고, 또다시 덧붙인다.
묵직함인가? 가벼움인가?
참아야만 한다. 참을수 있는가?
다시, 또다시 — 끊임없이, 처음부터.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짐이 무거우면 무거울수록, 우리 삶이 지상에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우리 삶은 보다 생생하고 진실해진다. 반면에 짐이 완전히 없다면 인간 존재는 공기보다 가벼워지고 어딘론가 날아가버려. 지상의 존재로부터 멀어진 인간은 겨우 반쯤만 현실적이고 그 움직임은 자유롭다 못해 무의미해지고 만다. 그렇다면 무엇을 택할까? 묵직함, 아니면 가벼움?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