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없는 남자들, #무라카미 하루키, #존재와 시간, #하이데거,
* 불안은 현존재를 ‘무상적인’ 가능성에서부터 해방시켜 본래적인 가능성을 향해 자유롭게 되도록 한다. 1)
어제부터 야간근무에 들어갔다. 갑작스러운 스케줄 변경 때문인지 잠이 오지 않았다. 겨우 새벽 근무를 마쳤지만 몸은 여전히 찌뿌둥했다. 집에 돌아와 아침에 푹 자고 점심에 책을 읽으려 했지만, 선잠에 뒤척이다가 결국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누워만 있었다. 그렇게 퍼져 있을 때마다 불안한 생각이 고개를 든다. 그러다 보면 유튜브를 켜게 되고, 하루는 망가지기 일쑤다. 오늘 같은 날은 어떤 핑계라도 붙여서 밖으로 나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일도 같은 패턴이 반복될 것이다.
하이데거는 이러한 상태를 불안(Angst)이라 불렀다. 그것은 특정 대상에 대한 두려움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의미를 잃고 공허하게 다가오는 경험이다. 그러나 이 불안은 단순한 무력감이 아니라, 인간이 자기 존재를 다시 묻도록 강제하는 계기다.
그의 해석에 따르면 불안은 우리를 방해하는 감정이 아니라, 오히려 본래적 가능성으로 향하게 하는 계기가. 세계가 무의미하게 느껴질 때, 우리는 비로소 자기 자신을 다시 묻고 결단해야 한다. 그것이 단순한 생각으로 끝날지, 아니면 실제 상황 속에서 자신을 내맡기게 될 지 누구도 알 수 없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 경험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해석하느냐에 달려 있으며, 그 선택 속에서 존재의 의미가 드러나게 된다.
그 길이 유일한 길인가, 또는 도대체 올바른 길인가 하는 것은, 길을 다 가본 뒤에야 비로소 결정될 수 있다. 2)
그러다 어떤 책에서 ‘조양방직’ 카페를 언급했던 것이 문득 떠올랐다. 검색해 보니 그곳은 강화도에 있었다. 강화도라니, 떠오르는 건 고인돌과 화문석뿐이었는데, 놀랍게도 인천 관할이었다. 공항철도를 타고 버스로 갈아타면 도착하는 데 2시간 정도 걸린다. 미지의 도시로 떠나기에 왕복 4시간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대부분의 시간을 버스 안에서 보내야 한다는 점이 부담스럽다. 지하철과 달리 버스에서는 독서가 잘되지 않고 눈의 피로도도 크다.
시끄러운 라디오 소리는 귀를 거슬리고, 어렵사리 집중하다 보면 목적지를 지나치기 일쑤다. 지하철은 반대편에서 기다리면 금방 열차가 오지만, 버스는 한 번 놓치면 오래 기다려야 한다. 그래서 시내버스를 타는 걸 꺼리는 편이고, 만약 자율주행 자동차가 상용화된다면 ‘마이카’를 구입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곤 한다. 그래도 막상 자리에 앉으면 습관처럼 책을 꺼내게 된다. 제목은 『누구에게나 신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저자는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의 에릭 와이너다.
강화도로 향하는 이 길은 단순한 여행이 아니다. 낯선 장소는 세계를 새롭게 드러내는 장이 되고, 나는 그 세계 속에서 나 자신을 다시 경험하며 새로운 가능성을 찾아 헤매게 될 것이다. 결국 길의 의미는 걸어가는 과정 속에서 드러나며, 올바른 길인지 아닌지는 끝까지 가본 뒤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배려되고 있는 것에 분망하게 자기를 잃으며 결단 내리지 않은 자는 거기에서 자기의 시간을 잃는다. 3)
이 책은 종교를 신뢰하지 않으면서도 어딘가에 의탁하고 싶은 마음으로 종교별 순례를 다니며 겪는 에피소드를 다룬다. 나 역시 비슷한 생각과 경험을 가지고 있어 제목에 자연스레 끌렸다. 겉으로는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에게도 말 못 할 고민이 있고 마음을 터놓을 곳이 없어 기껏해야 정신과 상담으로 삶을 버텨내는 사람들이 많다.
세상이 산업화되고 규격화되면서 예전보다 불확실하고 애매한 것들은 점점 사라졌다. 자연이 지니던 신비로움은 퇴색했고, 신에 대한 경외감도 옅어졌다. 무겁게 다가오던 구속은 사라졌지만 동시에 중심을 잃었고, 인간은 자신을 지나치게 가볍게 만들어 버렸다. 이러한 고민 속에서 시작된 저자의 시도는 단순한 기행이 아니라, 자신을 붙잡기 위한 간절한 몸짓으로 다가온다. 그는 자신의 영혼을 ‘드라이브’하기 위해 떠난 것이다. 하이데거의 말처럼, 인간은 종종 존재를 망각하고 일상성 속에 파묻힌다. 그러나 낯선 장소와 의례적 행위는 존재를 다시 묻는 계기가 되곤 한다.
오늘처럼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에는 복잡한 마음을 풀고 몸을 가볍게 해줄 무언가가 필요하다. 한동안 종교에 의탁해 교회도 다녔지만, 지나치게 세속화되고 정치적으로 변해버린 공간에서는 환멸만 느껴졌다. 그렇다고 종교의 필요성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종교의 장점은 마음을 비우고 몸을 가볍게 만들어 몰입의 상태로 이끌어준다는 데 있다. 사실 우리가 자신을 잃고 몰입하는 그 어떤 행위도 행복할 때의 그것과 닮아 있다. 그래서 그러한 기분을 만들어줄 리추얼로서, 가끔 아주 낯선 곳으로 떠날 필요가 있다. 그런 장소에서는 온전히 자신에게 집중하게 되고, 시간이 흐르면 자연스레 몰입에 이르게 된다.
하이데거는 이를 본래성(Eigentlichkeit)이라 불렀다. 일상성 속에서 ‘세상 사람들(Man)’에 묻혀 사는 비본래적 존재에서 벗어나, 자기 자신을 붙잡는 순간이 바로 본래성이다. 낯선 장소에서의 몰입은 본래성으로 향하는 작은 통로가 된다.
이렇게 선택 없이 아무도 아닌 자에 의해서 끌려다니게 됨으로 해서 현존재는 자신을 비본래성 속으로 빠뜨리는데, 그것은 오직 현존재가 자기 자신을 고유하게 ‘그들’ 속에 상실되어 있음에서부터 그 자신에게로 되찾아오는 식으로만 되돌려 세워질 수 있다.
내가 도착한 곳은 예전에 조양방직이라 불렸던 공장을 개조한 베이커리 카페였다. 힙한 카페의 끝판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앤티크한 소품들과 폐품, 고물로 불릴 만한 것들을 적절히 변형해 배치하며 폐건물을 장식했다. 초록 식물들은 드라이한 외관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조명은 운치를 더해 특별한 분위기를 만든다. 300평이 넘는 넓은 부지의 오래된 건물에서 나는 철없는 어린아이로 돌아가 이곳저곳을 탐사했다. 이질적인 오브제의 배치는 신선한 감각을 자아냈다. 지금 내가 카페에서 읽고 있는 책은 하루키의 단편집 『여자 없는 남자들』이다.
이 책은 얼마 전 영화화된 『드라이브 마이카』로 시작한다. 녹내장으로 시력을 잃어가는 중년 배우 가후쿠가 자신의 차를 몰아줄 운전자로 미사키라는 여성을 뽑고, 그녀의 운전 실력과 인간됨을 인정하게 되면서 아내의 외도 사실을 털어놓는다. 그리고 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주는 미사키를 통해 상처를 회복해간다. 어떻게 이 짧은 단편이 영화가 될 수 있을지 궁금했는데,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은 단편들을 별개의 이야기가 아니라 각각 개연성 있는 단서로 하나의 작품 속에 녹여냈다고 한다. 아직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나도 그런 관점으로 작품들을 파악해 보기로 했다. 『드라이브 마이카』를 맥락으로 잡고 나머지 단편을 그 안에 대입해 보앗다.
『예스터데이』에서는 삼각관계를 추출했다. 이러한 플롯은 『상실의 시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삼각 구도는 완전성을 상징하지만, 한 축이 붕괴되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주인공의 친구 기타루는 기발한 생각과 활달한 성격을 가진 인물로, 어려서부터 가까이 지낸 소꿉친구가 있다. 그는 연이은 수험 실패로 위축되면서, 소중한 여자친구를 친구에게 맡기려 하는 소심함까지 드러낸다. 결국 그녀는 기타루와 달리 적극적이고 남성적인 동아리 선배와 사귀게 되고, 이를 알게 된 기타루는 그녀를 떠난다.
『드라이브 마이카』에서 가후쿠에게서는 기타루의 소심함이, 상간남 다카쓰키에게서는 가후쿠에게 없는 적극성이 느껴진다. 실제 영화에서 다카쓰키는 매력이 넘치며 남성성의 끝판왕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가후쿠가 다카쓰키의 존재를 알았을 때는 이미 아내 오토는 죽음으로 그의 곁을 떠난 뒤였다. 『독립기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생각건대 그 여자가 독립적인 기관을 사용해 거짓말을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물론 얼마간 다르겠지만, 도카이 의사 또한 독립적인 기관을 사용해 사랑을 했던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가후쿠는 진심으로 아내를 사랑했지만 아내는 죽기 전까지 그를 기만했다.
『세에라자드』에는 ‘천일야화’라는 콘셉트를 빌려, 사랑을 나눌 때마다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주는 장면이 나온다. 니체는 “사람들은 입으로 거짓말을 잘도 한다. 그러나 이때 사람들은 거짓말하는 입으로 진실을 말하기도 한다.”라고 했다. 영화에서 오토는 가후쿠에게는 거짓을 늘어놓지만, 다카쓰키에게는 알듯 말듯한 이야기를 남긴다. 그래서 가후쿠는 다카쓰키의 입에서 일말의 진실을 듣기 위해 그에게 친근하게 다가간다.
『기노』를 통해서는 아내를 잃은 뒤 가후쿠의 마음 상태를 유추할 수 있었다. 기노는 가정을 위해 성실히 일했지만, 아내는 그의 직장 동료와 바람이 났다. 기노는 통절함을 받아들이기 싫어 진실과 맞서는 것을 회피했지만, 결국 자신의 기억과 감정을 받아들이는 쪽을 택하고 쓸쓸히 죽어간다.
『사랑하는 잠자』에서는 카프카의 『변신』을 비틀어 독충 대신 꼽추 소녀를 대입했고, 그레고리 잠자는 그녀의 외관보다 솔직하고 당당한 모습에 매력을 느낀다. 이러한 묘사는 미사키의 특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도 겹쳐진다.
현존재는 부름을 이해하며 자신의 가장 고유한 실존 가능성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그는 자기 자신을 선택한 것이다. 5)
마지막으로 『여자 없는 남자들』에서는 상간녀의 남편이 주인공에게 아내 오토의 죽음을 알린다. 『드라이브 마이카』에서는 가후쿠가 조의를 표하려고 온 다카쓰키를 만나고, 둘은 아내에 대한 추억을 공유하며 친구처럼 가까워진다. 그러면서 연적인 다카쓰키에게서 결정적인 말을 듣는다. “아무리 잘 안다고 생각한 사람이라도,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일지라도,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 결국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나 자신의 마음과 솔직하게 타협하는 것 아닐까요?”
이 말은 하이데거가 말한 실존적 결단과도 겹친다. 인간은 타인의 마음을 완전히 알 수 없기에, 여러 단서와 현존재의 흔적을 통해 가늠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결국은 자기 자신이 선택한 가능성을 토대로 의미를 확장해 나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상황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여부는 인간의 감정이 복잡하게 얽혀 있어 명확히 구분하기 어렵다. 오토는 다카쓰키와 외도를 했지만 가후쿠에 대한 애정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그녀의 입장을 조금 이해하자면, 아이를 유산한 뒤의 공허감을 남편에게 털어놓지 못하고 다른 사람의 위로에서 도피처를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가후쿠는 아내의 외도를 목격한 후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했고, 모든 가능성을 차단한 채 스스로 침잠해 버렸다. 오토는 남편의 태도를 멀리서 지켜보며 질병과 죄책감 속에서 서서히 죽어갔다.
오토는 두 남자에게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 가후쿠에게 오토는 상실을 통해 자기 존재를 다시 묻도록 만든 인물이다. 그녀의 외도와 죽음은 깊은 불안을 남겼지만, 그는 미사키와의 교감을 통해 그 불안을 본래성으로 전환해 간다. 오토의 부재는 그에게 자기 존재를 결단하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반면 다카쓰키에게 오토는 자기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거울이자 불안을 은폐하는 도피처였다. 그녀와의 관계는 그에게 매력과 적극성을 증명해주는 장치였지만, 동시에 죄책감의 근원이기도 했다. 오토의 죽음은 그의 도피처를 빼앗아갔고, 그는 상실과 불안을 직면하지 못한 채 폭주했다.
이 대비 속에서 미사키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그녀는 단순한 운전자가 아니라, 가후쿠의 상실을 함께 감당하는 동반자다. 미사키 자신도 어머니의 학대와 죽음을 겪은 상처를 지니고 있었지만, 그것을 숨기지 않고 가후쿠와 나누었다. 차 안에서 가후쿠는 오토의 외도 사실을 털어놓고, 미사키는 묵묵히 받아들인다. 그녀의 침묵과 경청은 하이데거가 말한 ‘양심의 부름’처럼, 가후쿠가 자기 존재를 다시 선택하도록 돕는다. 두 사람은 서로의 상실을 나누며 불안을 본래적 가능성으로 바꿔 간다.
현존재가 그것과 이렇게 또는 저렇게 관계를 맺을 수 있고 또 언제나 어떻게든 관계 맺고 있는 존재 자체를 우리는 실존이라고 이름한다. 6)
하루키의 작품 속 주인공들은 언제나 일반적인 상황과는 거리가 멀다. 『여자 없는 남자들』이라는 제목처럼, 모두가 상대방의 부재 속에서 방황하거나 그로 인해 상처받은 사람들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류스케 감독은 각 단편에서 상징과 이미지를 추출해 인물들의 복잡한 심경을 다각도로 재해석하며, 마치 큐비즘을 영상으로 옮겨놓은 듯한 효과를 만들어낸다. 특히 현실을 혼자 감당하거나 회피하는 것이 아니라, 동반자와의 교감을 통해 이미 주어진 현실을 새롭게 재해석하고 함께 해소해 나가는 결말은 마음 한편을 가볍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영화는 체호프의 『바냐 아저씨』를 끌어들인다. 가후쿠가 무대에서 연습하는 대사와 그의 실제 삶은 서로를 반영한다. 『바냐 아저씨』 속 인물들이 느끼는 허무와 좌절은 가후쿠의 내적 상태와 겹치며, 관객은 연극과 현실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그의 고통을 더 깊이 이해하게 된다. 특히 마지막 장면에서 바냐 아저씨의 대사가 수화로 표현된다. “우리는 살아야 해. 우리는 살아야만 해.”라는 절망 속의 인내가 말이 아닌 손의 움직임으로 전달될 때, 관객은 언어를 넘어선 몸의 언어로 실존적 고통을 체험한다. 이는 하이데거가 말한 “존재는 언어 속에서 드러난다”는 명제를 확장해, 언어를 넘어선 존재의 드러남을 보여준다. 수화는 말하지 못한 감정을 시각적으로 드러내며, 개인적 상실을 보편적 인간 경험으로 확장한다.
하루키의 문장은 하이데거의 철학과 공명한다. 무대 위의 배우처럼 우리는 늘 세계 속에서 역할을 수행하지만, 그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에 맞닥뜨리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고, 그때서야 비로소 주변을 둘러싼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곧 자신을 세계로 확장하는 일이며, 그것은 자기 자신을 가능성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태도가 될 것이다.
관사로 출발하려고 밖으로 나서니 이미 어둑어둑해졌다. 낮에 보았을 때도 마음에 쏙 들었지만, 밤의 야경은 또 다른 매력을 선사한다. 오늘처럼 컨디션이 애매한 날에 찾은 카페 ‘조양방직’은 울적한 기분을 환기시키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이렇게 특별한 공간에서 마주한 생각과 감정이 글 속에 머물러, 읽는 이들에게도 작은 본래성의 순간으로 닿기를 바란다.
『 드라이브 마이 라이프 』 논리적 구조 (챗GPT분석)
개인 경험: 야간근무 후 무력감, 불안한 생각, 유튜브로 하루를 망치는 패턴.
철학적 해석: 불안은 특정 대상의 두려움이 아니라 세계 전체가 공허하게 다가오는 경험.
의미: 불안은 단순한 무력감이 아니라 자기 존재를 다시 묻도록 강제하는 계기.
사례: ‘조양방직’ 카페를 떠올리고 강화도 여행 계획.
강화도 특징: 인천 관할, 교통의 불편함(버스·지하철 비교).
독서: 『누구에게나 신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에릭 와이너).
의미: 낯선 장소는 세계를 새롭게 드러내는 장이 되고, 길의 의미는 과정 속에서 드러남.
책 내용: 종교별 순례 경험, 종교에 대한 신뢰와 의탁의 모순.
사회적 맥락: 산업화·규격화로 신비와 경외감이 사라짐, 인간의 중심 상실.
개인 경험: 교회 경험, 환멸, 그러나 종교의 필요성 인정.
의미: 몰입은 행복과 닮아 있으며, 낯선 장소에서의 몰입은 본래성으로 향하는 통로.
장소: 조양방직 카페 도착, 공간 묘사.
독서: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드라이브 마이카』: 가후쿠, 미사키, 오토, 다카쓰키 관계.
『예스터데이』: 삼각관계, 상실의 시대와 연결
『독립기관』: 사랑과 기만.
『세에라자드』: 거짓과 진실의 교차.
『기노』: 상실과 회피.
『사랑하는 잠자』: 변신의 변주, 미사키와 연결.
사건: 오토의 죽음, 가후쿠와 다카쓰키의 대화.
핵심 대사: “타인의 마음을 속속들이 들여다본다는 건 불가능한 얘깁니다…”
해석: 실존적 결단, 타인의 마음은 알 수 없지만 자기 선택을 통해 의미 확장.
오토: 가후쿠에게는 상실을 통한 본래성의 계기, 다카쓰키에게는 도피처.
미사키: 상실을 함께 감당하는 동반자, 양심의 부름 역할.
하루키 작품의 특징: 주인공들은 모두 부재와 상실 속에서 방황.
류스케 감독의 해석: 단편들을 큐비즘처럼 재구성, 다각적 심경 표현.
『바냐 아저씨』와의 연결: 연극과 현실의 교차, 수화 장면의 실존적 울림.
의미: 언어를 넘어선 존재의 드러남, 개인적 상실을 보편적 경험으로 확장.
하루키 문장과 하이데거 철학의 공명.
인생은 세계 속에서 역할을 수행하며 자기 자신을 묻는 과정.
삶은 세계로 확장하는 일, 자기 자신을 가능성으로 받아들이는 태도.
특별한 공간에서 마주한 생각과 감정이 글 속에 머물러, 읽는 이들에게도 작은 본래성의 순간으로 닿기를 바람.
♧ 참고도서
< 마르틴 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까치(이기상 옮김), 2025.05.07 >
1) 495p
2) 618p
3) 582p
4) 389p
5) 417p
6) 32p
< 무라카미 하루키, 여자 없는 남자들, 문학동네(양윤옥 옮김), 2015.10.01 >
7) 60P
& 이 글은 몇 년 전 쓴 기록에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덧입혀 다시 읽고 정리한 것이다.
나는 약 4년 동안 영종도 관사에 얹혀 살았다. 방은 다른 방들과 떨어져 조용했지만 좁았고, 화장실과 가까워 오래 머물고 싶은 공간은 아니었다. 여름은 덥고 습했으며 겨울은 춥고 방풍이 되지 않아 틈만 나면 섬 밖으로 나갔다.
인터넷에 대형 카페나 핫플레이스가 뜨면 거리가 멀어도 주저하지 않았다. 평일의 지하철은 또 다른 도서관이자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통로였다. 그 시절 쓴 글들은 퇴고를 거쳐 정제되었지만, 여전히 의식의 흐름이 살아 있다.
홍대에는 한때 ‘피터캣’이라는 북카페가 있었다. 하루키가 운영하던 재즈바의 이름을 딴 곳으로, 하루키의 출간작과 주인장이 선별한 책들이 놓여 있었다. 소설 속 위스키와 칵테일까지 재현해놓은 그곳은 선곡과 분위기 덕분에 독서에 몰입하기 좋았고, 무엇보다 눈치 보지 않고 오래 머물 수 있어 편했다.
야간근무를 마치고 늦은 오후, 먼 곳을 가기 애매할 때면 영종도에서 비교적 가까운 그곳을 찾았다. 하루키의 소설을 두고 주인장과 이야기를 나누다 내가 최신작들이 꼰대스럽다고 말하자 그는 “누구라도 그 나이가 되면 잔소리가 많아진다”고 했다. 그는 청년 하루키가 방황을 거쳐 성숙해지는 작품들을 소개했고, 나는 그중 『여자 없는 남자들』의 ‘기노’에서 내가 원하던 감성의 결을 찾았다.
독서모임에서는 하마구치 류스케 감독의 『드라이브 마이 카』를 함께 보았다. 감독이 원작을 해석하고 소화하는 방식은 깊은 인상을 남겼고, 원작을 뛰어넘는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보여주었다. 당시 나는 니체의 『도덕의 계보』를 읽고 있었고, 맥락은 다르지만 니체·파울 레·루 살로메의 삼각관계를 가후쿠·다카스키·오토의 관계에 겹쳐보려 했다. 니체는 상실과 질투로 우정과 사랑을 잃었고, 소세키의 『마음』 속 선생처럼 타인과 정상적 관계를 맺지 못했다. 영화 초반의 가후쿠도 그런 모습을 보여준다.
니체의 위대함은 정념을 억누르지 않고 그것을 인간의 본질적 속성으로 끌어올린 데 있다. 가후쿠는 미사키와의 대화에서 상처를 드러내고 인정하며, 연극을 통해 그것을 소화하고 받아들인다. 그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스스로를 구원한다.
나에게도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 있다. 사람들 사이에서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익숙한 루틴이 깨지거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면 산산이 흩어지는 듯한 감각이 찾아온다. 그럴 때면 멍하니 누워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고, 아무리 좋은 의도의 말이라도 받아들일 힘이 없다. 길이 보이지 않을 때는 또 다른 길을 찾아야 한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때 보이지 않는 흐름에 몸을 던져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그것이 나름의 구원일 수 있다.
나는 책을 읽으면 문장을 받아 적는다. 기준은 없다. 마음이 끌리는 대로 적고, 글을 쓸 때 그 문장들로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을 그려내려 한다. 흐름과 맞닿는 책을 만나면 다행이지만, 그렇지 않으면 같은 생각을 계속 곱씹는다. 전혀 그려지지 않으면 포기하면 그만이지만, 어떤 형태가 그려질 것 같은데 그려지지 않으면 답답함이 목에 걸린다.
그래도 떠오르는 대로 휘갈겨본다. 말이 맞지 않아도 형태가 잡히면 다듬는다. 문장 연결이 어색하고 전혀 아닌 것 같을 때도 있지만, 나는 그것들을 붙잡고 이해하고 소통하려 한다. 어울리는 것과 어울리지 않는 것을 병치해보고, 그것들을 짜맞추기 위해 들여다본다. 그러다 문득 어떤 생각이 머릿속을 관통하면, 그것으로 문장들을 꿰어낸다. 정리가 필요하지만, 일단 글은 술술 써진다.
에세이는 부서진 나의 조각들을 이어가는 작업이다. 다른 이들에게 보이는 형태이면서도, 나에게는 보이지 않는 어떤 것으로 다가온다. 책에서 추출한 문장들이지만,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니 문장과 문장 사이에 스며든 것은 바로 ‘나’의 생각과 감정이었다. 그 안에 나의 모습이 투영되어 있었다.
가후쿠처럼 나도 사람에게 상처받았고, 온전한 생각과 감정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순간들이 있었다. 소설이라면 이야기를 꾸며도 되겠지만, 에세이는 그렇지 않다. 거짓을 덧대면 결국 감당 못할 짐이 된다. 스스로에 대한 고백 없이 글을 쓴다는 것은 그럴싸한 문장으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에세이를 쓰는 이유는 흩어진 나를 찾아 다시 모으기 위해서다. 그것은 과거를 이상화하려는 시도가 아니다. 오히려 약하고 외면했던 모습까지 포용해 온전한 존재로 서기 위한 작업이다. 다가올 내일도 이 과정의 일부로 포함된다. 글쓰기는 내가 나와 세계를 이해하는 하나의 방식이며, 그 과정을 통해 나는 조금씩 더 명확해질 것이다.
< 울게하소서 >
울 수 있으려면…
멈출 수 있어야 했다.
슬픔을
삼킬 수 있어야만,
비로소
허락되었다.
하지만
나에겐
그조차
사치였다.
참아온 것들이
무너지고 나면
그 다음엔…
어떻게?
두려움은
늘
곁에 있었다.
나는
그 가능성을
막아야만 했다.
상처를
마비시켜야 했다.
그래야만
숨이라도
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도…
틈 사이로
스며드는 그리움은,
내 마음 같지 않았다.
좀 자야겠다고 가후크는 생각했다. 한숨 푹 자고 눈을 뜬다. 십분이나 십오 분, 그쯤이다. 그리고 다시 무대에 서서 연기를 한다. 조명을 받고 주어진 대사를 한다. 박수를 받고 막이 내려진다. 일단 나를 벗어났다가 다시 나로 되돌아온다. 하지만 돌아온 곳은 정확하게는 이전과 똑같은 장소가 아니다.
"잠깐 잘게." 가후쿠는 말했다.
미사키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대로 말없이 운전을 계속했다. 가후쿠는 그 침묵에 감사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