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 바란다는 것, 그것은 곧 온갖 역설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다. 1)
논리적으로 되는 것은 언제나 쉽다. 그러나 끝까지 논리적으로 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2)
나는 직장에서 업무 외에도 분기마다 인권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법학을 전공한 덕분에 인권이라는 주제가 낯설지는 않았고, 교양과목으로 '여성인권'을 수강한 경험이 있어 기본적인 이해는 갖추고 있는 편이다. 그러나 교육자료를 준비하면서 인권운동가들의 관점이 지나치게 반영된 내용을 그대로 전달하기에는 현실적인 어려움이 따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교육대상자뿐만 아니라 교육하는 필자 역시, 외국인의 자유나 권리를 제한하거나 의무를 부과하는 행정작용과 관련되는, 외국인의 인권과 가장 밀접한 관계에 있는, 요즘 가장 주목받고 있는 '출입국' 공무원이기 때문이다.
출입국 행정은 권리를 제한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권리를 부여하고 보호하기 위한 제도이며, 기본적으로 원칙이 원칙대로 지켜져야 예외의 여지도 감당할 수 있게 되는 법이다. 교재의 취지대로 내용을 전달한다면, 결국 자기 입으로 스스로의 정체성을 비판하라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작게는 '내 인권은 도대체 어디로 갔나?'는 푸념부터 시작해서, 법과 제도 자체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결론이 도출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원칙과 예외, 객관성과 주관성—그것을 구별하지 않고 한데 모아버리면, 어떤 위치에 있더라도 그런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다. 이러한 반응은 단순한 불만을 이야기한다기보다, 공무원이라는 직업적 특성과 인권 담론 사이의 간극을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인간 존중’이라는 이상을 추구하고 그러한 사회를 만들어가야 한다는 목표에는 뜻을 같이하지만, 인간에게는 이해타산적이고 불안정한 면도 분명 존재하기 때문에 모든 인간을 동일한 방식으로 이해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는 불합리한 면이 있다. 법과 제도가 전제로 삼고 있는 ‘합리적 인간’은 제한 없는 자유나 권리를 요구할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다. 그것들을 주장하려면 그에 비례하는 책임을 지거나 불이익을 감수할 수 있을 만큼의 기준을 충족해야 한다. 자유란 가능한 것과 가능하지 못한 것이 동시에 규정되는 세계에서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정도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불합리하다고 느껴지는 측면이 분명히 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 모든 단계에 있어서 가치들은 서로 중복되고, 이들은 다시 비교할 때만 현실성을 가지게 되므로 상황이 저마다 불평등하게 주어져 있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선과 악 같은 가치 체계 또한 상대성의 관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방증해 준다. 따라서 사안을 대할 때는 전체적인 것에 토대를 두고 살피는 것이 가장 현실적인 처사가 될 것이다. 왜냐하면 악이라 불리는 것도 사실, 편향성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한 측면은 법과 제도뿐만 아니라 인권 영역에서도 확인되는 사실이고, 결국 정의로운 사회를 구현하는 데 있어서 가장 관건이 되는 것은 균형성이라고 말할 수 있다.
우리나라 법은 대륙법과 영미법의 장점만을 조합한 것으로 이론상 시너지 효과가 나와야 하지만, 어떤 사건에도 적합하도록 법률에 모든 사항을 선험적으로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해석에 오류가 발생하기도 하고, 편향성이 반영된 무분별한 입법이 그러한 측면을 더욱 부추기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엄밀히 살펴보면 잘못이 법률의 취지 그 자체에 있다기보다는 그것을 위반하거나 악용하는 인간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사실을 간과할 수 없다. 법의 절대적 지배는 자유가 아니지만, 절대적 방임 역시 자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합리’는 규정되는 형식을 불문하고, 결국 그것도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에서 나오는 것에 불과하다. 그래서 도스토옙스키는 “자유란, 그것이 악을 저지를 가능성, 그리고 분명한 것을 부정할 가능성을 가져올 때만 완벽하다.”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분열과 함께 살고 생각하는 것이며, 받아들일 것인가 거부할 것인가를 알아내는 일이다. 3)
출입국에서 관리하는 보호소는 불법체류자들이 퇴거되기 전까지 머무는 곳이다. 처음 파견 업무를 시작했을 때, 사람들이 갇혀 있는 모습을 맞닥뜨리고 난 후, 밤새 온몸을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던 기억이 난다.
보호소에 있는 외국인들은 조사와 단속 과정에서 불법체류 사실이 발견된 자들로서, 형사처분을 받은 자들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적법한 비자를 소지하지 않고 취업 활동을 하다가 적발되어 단속된다.
언론이나 인권 단체에서는 이들을 ‘미등록외국인’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그 의미대로라면 합법적으로 등록을 하고 절차를 거쳐 체류자격이 부여되는 외국인들과 구별이 되지 않는다. 어쩌면 그런 효과를 노리기 위해 그러는 것일 수도 있지만, 이러한 위치에 있는 외국인들은 노동시장을 교란하여 국민과 합법적 외국인들의 지위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다.
인권 운동가들은 우리가 외국인들을 차별하고 인권을 억압한다고 주장하지만, 현실적으로 국제관계는 상호주의가 원칙이고, 우리 국민도 못 받는 대우를 먼저 베풀어야 할 의무는 없다. 난민법이나 세계인권선언을 내세우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러한 부담은 우리 국민에게 그대로 전가되기 때문에 신중하게 판단해야 할 사항이 된다.
누구든지 자신과 거리가 있다고 판단되는 이슈에 관해서는 쉽게 이야기할 수 있다. 하지만 그들의 바운더리와 밀접하게 관련이 있는 문제에 맞닥뜨리게 되면 아마도 이야기가 달라질 것이다. 인권 운동가들의 요구대로 모든 외국인을 받아준다는 것은 국경이나 출입국 절차를 유명무실하게 만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으므로, 업무 하는 처지에서는 난감한 입장에 서게 된다. 물론 이민이나 난민 수용이 국가 경쟁력 발전에 크게 이바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무분별한 입국은 사회 갈등을 심화시키고, 법질서를 문란하게 만든다는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가장 인권에 민감한 국가였던 미국을 보더라도 그러한 딜레마 속에서 좌충우돌하며 고민하고 있다는 것이 현실이며, 그들은 결국 트럼프를 선택했다.
사람들이 알아야 할 진실은 출입국공무원이 외국인의 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러한 갈등을 방지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따라서 이러한 이민 행정을 적절하게 관리하지 않는다면, 지위와 일자리 측면에서 맞닿아 있는 이들, 노조를 위시한 '근로자'들 그리고 합법적 자격을 취득한 '등록외국인'이 반감을 보일 수 있다. 실제로도 그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불법체류 단속에 대해 지속적인 민원을 제기하고 있고, 이번 ' '조지아주 한국인 구금사건'도 그러한 상황이 극단적인 측면으로까지 번진 것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자신의 불리한 입장을 타개하기 위한 트럼프의 정치적 공작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어떠한 경우라도 선을 넘게 되면 파국으로 치달을 수밖에 없고, 극단주의자들은 그러한 빌미를 이용하여 자신들에 유리한 입지를 다지려 할 것이다. 더 나아가 극단은 또 다른 극단을 낳게 되고, 그것은 결국 홉스가 말하던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의 상황을 야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국적만큼이나 다양한 성향을 가진 사람들 덕분에 때로는 골치를 앓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로 마음을 열고 진심을 나누게 된 이들도 있었다. 그렇게 가까워진 외국인들로부터 한국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관점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경계에 있는 존재로서 누릴 수 있는 일종의 ‘특별함’ 덕분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앞으로의 희망을 말했고, 다른 이들은 주어진 현실을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도 했는데, 그들의 이야기들을 듣다 보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기운이 느껴지곤 했다. 나를 ‘따꺼’라고 불렀던 조선족 동생은, “한국인들은 태어날 때부터 쇠사슬에 묶여서 태어나는 것 같다며, 자신은 그런 삶이 전혀 부럽지 않다.”라고 말하기도 했었다.
그들에게는 산다는 것은 곧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문제는 눈앞에 보이는 ‘현실’이었을 뿐, 아직 도래하지 않은 미래와 죽음의 문제는 크게 고민할 거리가 아니었다.
자신의 삶, 반항, 자유를 느낀다는 것, 그것을 최대한 많이 느낀다는 것, 그것이 바로 사는 것이며 최대한 많이 사는 것이다. 4)
어느 날 ‘샤리프’라는 이름을 가진 방글라데시 출신의 젊은 남자가 약혼자의 일방적인 파혼 통보로 충격을 받아, 정신착란 상태에서 직장 사람들에게 칼을 휘둘렀다가 구치소에 갇힌 후, 내가 있던 사무소로 오게 되었다.
그는 선한 눈망울을 가졌던 친구였고, 정신상태가 불안정해지면 직원들에게 욕을 하거나, 다른 외국인에게 시비를 걸어서 애를 먹이곤 했다. 샤리프는 독실한 이슬람교 신자였는데, 그의 신앙심은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도 확인할 수 있을 정도였다.
정신이 온전치 못한 사람을 무작정 본국으로 보낼 수는 없었기에, 일단 사무소에서는 샤리프를 정신병원에 데려가 진단을 받게 했고, 같은 나라 출신인 외국인에게 간호를 부탁했다. 그 사람은 자신을 ‘랄프’라고 불러달라고 말했다. 그는 한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하고, 생활 태도가 성실해서 직원들뿐만 아니라 다른 외국인들에게도 신망을 얻었던 인물이었다. 나는 랄프를 아저씨라고 불렀고, 아침에 출근하면 그에게 샤리프의 동태를 묻는 것이 업무의 시작이었다. 아마도 보호소에 있는 외국인들에게, 공무원이 외국인에게 90도로 인사하는 모습은 아주 낯선 모습이었을 것이다.
랄프는 결혼이민자 출신이었는데, 이혼당한 상태에서 가택에 들어갔다가 아내에게 주거침입으로 신고당해 체류자격을 박탈당한 상태에서 사무소로 오게 되었다. 독실한 샤리프와 달리 종교 자체가 없었고, 지극한 현실주의자이기도 했다.
랄프는 방글라데시에서 대학을 나왔고, 한국에 대해서도 심층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을 만큼 박학다식했다. 그는 ‘사랑과 전쟁’이라는 프로그램의 애청자이기도 했는데, 한때는 사랑 때문에 모든 것을 바쳤지만, 자신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바람까지 피운 아내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타인의 시선에서 보면 랄프의 삶은 비극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그는 자기 능력과 출신에 대해 강한 자부심을 가진 남자였다. 그래서인지 몰라도 샤리프와 같은 과로 분류되는 것을 불쾌해했다. (부연 설명을 하자면 랄프는 결혼이민자 신분인 F6이었고, 샤리프는 취업비자인 H2였다.)
랄프는 한국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했던 이야기를 자랑스럽게 들려주기도 했는데, 언어를 이른 시일 내에 익히기 위해 지하철 노선들과 연상되는 단어를 토대로 공부했었다고 한다. 비록 지금은 불법체류자로 바닥을 치게 되었지만, 기회가 다시 주어지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비록 불행했던 결혼생활이 계속되지는 않았지만, 그것을 후회하지 않으며 다시 그때로 돌아가게 되더라도 같은 선택을 할 것이라고 했고, 아직도 그때의 기대와 설렘을 생각하면 가슴이 두근댄다고 말하곤 했다.
내가 지금도 랄프를 특별한 인연으로 기억하는 것은 삶에 대한 그의 태도 때문이다. 그것은 어떠한 현실이 처하더라도, 온몸으로 부딪쳐 스스로 의미를 만들어 내는, 영웅적인 인간에 대한 막연한 '경외심' 같은 것으로부터 비롯된 감정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샤리프는 사랑의 영속성을 믿으며 오랜 기다림을 참고 이겨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막상 그것을 둘러싸고 있던 베일들이 걷히기 시작했을 때, 그는 주어진 현실에서 도망가려고만 했고, 사랑에 대한 열망이 강하면 강할수록, 더 커다란 상처로써 다가왔기 때문에 미쳐버릴 수밖에 없었다. 랄프는 그러한 원리를 경험으로 이미 체득했고, 샤리프가 한 번씩 정신이 돌아오면 자신의 이야기를 통해 그가 현실을 받아들이도록 도와주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샤리프는 헤어진 여자친구와도 통화를 할 수 있을 만큼 정신이 온전해졌고, 본국으로 돌아가면 모아놓은 돈으로 동생과 함께 옷 가게를 열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랄프가 나갈 때, 다른 직원들과 함께 그를 전송했고, 우리는 두 손을 맞잡고 난 후, 헤어졌다.
장 그르니에는 “행동하는 인간에게는 그 어떤 것도 그의 본능과 행위 사이에 개입되지 않기 때문에 더할 나위 없이 즉각적인 인간에 가깝다”라고 말했는데, 내가 보호소에서 만났던 외국인들만큼 그 표현에 딱 들어맞는 사람들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모든 기록을 깨뜨린다는 것, 그것은 무엇보다 먼저, 그리고 오로지 가능한 한 자주 세계와 접촉한다는 것이다. 5)
‘이방인’으로 유명한 알베르 카뮈는 가난한 환경에서 자란 경험을 바탕으로 실존주의의 토대를 다지고, 행동하는 지식인으로서 모범을 보여준 인물이다. 그의 문장에는 특유의 긴장감과 묵직함이 느껴진다. 이번 달에는 철학적 에세이인 『시지프의 신화』를 읽으며 인상적인 문장들을 하나씩 노트에 옮겨 적다 보니, 연관되는 이미지들이 조금씩 떠오르기 시작했다.
부조리는 사전적 의미로는 불합리하거나 이치에 맞지 않는 것을 뜻하지만,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인간이 삶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한계상황을 가리킨다. 모든 아름다움의 밑바닥에는 이러한 비인간적인 부조리가 깔려 있는데, 그것은 세계의 근원적인 모습이며, 카뮈는 이를 ‘큰 감정’이라고도 불렀다. 인간은 자신들이 다룰 수 없는 이러한 것들을 종종 ‘악’이라 부르지만, 그것은 세계가 본모습을 드러낸 것에 지나지 않는다.
‘세계’는 정신과 물질의 세계를 포괄하는 의미에서 대상이나 현상의 모든 범위를 뜻하는 단어인데, 일반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범주는 사람이 사는 모든 사회를 통틀어 말하는 ‘세상’이라는 의미에 더욱 가깝다. 우리는 세계가 변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사용하지만, 사실 세계는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엄밀히 의미를 구분하자면, 바뀐 것은 세상이다. 실상은 세계의 일부를 지극히 인간중심의 언어로 환원시킨 것에 불과하다. 그런데 덧칠해 놓은 포장들이 하나씩 벗겨지기 시작할 때, 세계는 서서히 본모습을 드러내고, 익숙했던 가치들이 낯선 것으로 여겨질 때 인간은 일단 눈앞의 현실부터 부인하려는 성향이 강해진다. 그것이 피할 수 없게 되는 지경까지 이르게 되면, 감당할 수 없는 고통을 겪게 된다.
제우스 신의 처벌을 받아 지하에 갇힌 시지프는 무거운 바윗돌을 굴려 올라가 해방되려 하지만, 돌의 무게에 따라 다시 지하로 떨어진다. 그런데도 그는 포기하지 않고 아무런 의미도 없는 노력을 계속한다. 카뮈는 인간은 모두 시지프처럼 아무런 의미도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부조리한 상황 앞에서 인간이 취하는 태도는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자살이며, 다른 하나는 도피이다.
카뮈는 “미덕이란 현실과 분리되면 반드시 악의 원리가 되며, 미덕은 현실과 절대적으로 일치하게 되면 반드시 자신을 부정하게 된다.”라고 말했다. 과거를 회상하면서 자신들은 선하다 칭하고 다른 이들은 악으로 매도하는 행위는 더 이상 변명거리가 되지 못한다. 어떤 가치를 드러내기 위해 다른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전체를 몰각시키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진실을 외면한 채 자신에게 익숙한 영역에만 머물러 살아간다는 것은 이 세계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채 죽음을 향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그러한 임계점에 도달할 때마다 세계는 본모습을 드러내게 될 것이다.
익숙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문득 낯설게 느껴지는 순간, 현실의 모든 일이 무의미하게 다가오고, 인간은 반복해 오던 행위들에 대해 의문을 품기 시작한다. 서로 간의 팽팽한 긴장감은 그동안 이어져 온 무의미를 더욱 공허하게 만들며, 결국 그들은 사방이 막힌 텅 빈 공간 속에서도 시간이 여전히 흐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그때 사슬에 매여 있던 정신이 속박에서 벗어나 육체를 해방하게 되고, 그제야 시지프는 살며시 미소를 짓는다. 어차피 미래는 다가오게 될 현실이고, 그는 이전과 다른 의미로서 그것을 맞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 샤리프와 랄프 』 논리적 구조 (챗GPT분석)
인권교육 담당 경험과 딜레마
행정의 양면성: 권리 제한 vs 권리 보호
원칙과 예외, 객관성과 주관성의 긴장
‘합리적 인간’ 개념과 자유·책임의 조건
균형성의 중요성: 정의로운 사회 구현의 핵심
법 제도의 한계와 인간 책임
도스토옙스키의 자유 개념 인용
보호소 경험과 초기 충격
불법체류자 단속 과정과 ‘미등록외국인’ 용어 문제
노동시장 교란과 사회적 불안정성
인권운동가들의 주장과 국제관계의 상호주의 원칙
난민법·세계인권선언과 국민 부담 문제
국경·출입국 절차의 의미와 국가 경쟁력 딜레마
미국 사례와 극단주의의 위험
출입국 공무원의 역할: 갈등 방지자
불법체류 단속에 대한 민원과 사회적 반발
외국인들과의 교류 경험과 ‘특별함’
샤리프: 사랑의 상처와 정신적 혼란
랄프: 현실주의자, 결혼이민자 출신, 한국 적응 노력
두 인물의 대비: 신앙 vs 무신론, 이상 vs 현실
랄프의 자부심과 한국 사회 경험
샤리프의 회복 과정과 미래 계획
랄프와의 특별한 인연, 삶에 대한 태도
장 그르니에 인용: ‘행동하는 인간’
카뮈와 『시지프 신화』
부조리의 의미: 삶의 한계상황, 세계의 본모습
‘세계’와 ‘세상’의 구분
시지프 신화: 무의미한 반복과 인간의 태도
자살과 도피, 그리고 반항·자유·열정
미덕과 현실의 긴장
익숙한 것의 낯섦, 무의미의 자각
시지프의 미소: 부조리 속의 자유
♧ 참고도서
『시지프 신화』, 알베르 카뮈, 김화영 옮김, 민음사, 2016.06.17
1) 40p
2) 23p
3) 77p
4) 95p
5) 94p
& 이 글은 출입국 업무를 직접 담당했던 사람이 아니면 결코 쓸 수 없는 기록이다. 카뮈의 시지프 신화를 언급한 것도 단순한 철학적 수사가 아니다. 그는 ‘부조리’를 통해 인간이 맞닥뜨리는 한계와 반복을 이야기했는데, 나는 그 개념을 빌려 출입국 업무에 대한 오해를 풀고 싶었다. 동시에 그 속에서 만난 외국인들과의 특별한 인연을 드러내고 싶었다.
사람들은 언론 보도를 통해 공항 심사나 외국인 단속만을 떠올린다. 그래서 초면에 불친절하다거나 공항 난민 문제를 거론하며 실례되는 말을 듣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의 일은 단속과 처벌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외국인들에게 체류허가를 부여하고, 사회통합을 위해 애쓰는 모습은 좀처럼 비춰지지 않는다. 그 간극이 늘 안타까웠다.
코로나 시기, 공항은 폐쇄되고 언론은 공무원들이 일하지 않는다고 비난했다. 조직은 그런 비난을 피하기 위해 직원들을 지방으로 파견했고, 나는 외국인 보호소에 지원 근무를 나갔다. 처음 철창에 갇힌 사람들을 마주했을 때, 밤새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감염자가 발생하면 사무소는 폐쇄되고 근무자들은 병원에서 검사를 받아야 했다. 거리 제한과 출입 폐쇄가 이어지는 상황 속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외국인들과 말문이 트였고, 그들의 이야기는 때로는 흥미롭고 때로는 무겁게 다가왔다. 유학생 출신들도 많아 민주주의와 세계 정세에 대해 깊은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나는 “대통령에게도 욕을 퍼부을 수 있어야 민주주의라 할 수 있다”고 말했고, 외국인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순간, 서로 다른 국적과 언어를 넘어선 공감이 있었다.
그 무렵 샤리프라는 방글라데시 출신 남자가 들어왔다. 사랑의 상처에 미쳐 칼을 휘두른 뒤 교도소에서 형을 살고 본국으로 떠나기 전 보호소에 온 것이다. 겉보기에는 멀쩡했지만, 독실한 이슬람 신자였던 그는 기도와 주문을 반복하다가 지쳐 쓰러지곤 했다. 그의 행동 때문에 다른 외국인들이 큰 스트레스를 받았고, 민원이 끊이지 않았다. 그때 랄프라는 또 다른 방글라데시 남자가 샤리프를 돌보게 되었다. 그는 박식하고 성실했으며, 다른 외국인들에게도 신망을 얻었다. 출근하면 나는 늘 랄프에게 샤리프의 상태를 물었고, 그는 우리가 자신에게 예우를 갖추는 것을 자랑스러워했다. 한국에서의 고생담과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기도 했고, 트로트를 즐겨 들으며 샤리프와 함께 ‘사랑과 전쟁’을 시청하기도 했다. 나보다 나이가 많았던 랄프는 나를 ‘형님’이라 불렀다. 나는 그 호칭을 거절했지만 그는 끝내 고집했다. 지금도 그는 어디에서든 잘 살고 있으리라 믿는다.
가끔 뉴스에서 직원이 외국인을 폭행했다는 보도가 나오지만, 사실과 과장이 뒤섞인 경우가 많다. 물론 직원의 고의나 과실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은 절차를 준수한다. 외국인들이 자신에게 유리한 정황을 만들기 위해 일부러 상황을 유도하는 경우도 있다. 봉급을 떼이거나 브로커에게 지불한 비용 때문에 억울함을 호소하는 사례가 대표적이다. 어떤 나라든 자국민이 부당하게 대우받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외국인들도 자신들이 부당하다고 느끼면 참지 않는다. 실제로 인천공항에서는 이의신청이 너무 많아 본업이 마비될 정도다. 선진국들은 우리 출입국 행정을 존중하는 편이고, 러시아와 중국, 아프리카 대사관까지도 자국민의 권리 침해 여부를 조사하러 온다.
나는 인권단체뿐만 아니라 이러한 외부의 시선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투명한 행정은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의식 속에서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조직이 미국 이민조사국처럼 권한만 비대해진 채 인권을 유린하는 ‘괴물’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는다. 다만 여기에도 사람이 있고, 나름의 정의와 가치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시지프가 바위를 굴리듯 우리는 같은 절차를 반복한다. 그 속에서 쌓이는 작은 의미들이 언젠가는 우리의 이야기가 될 것이다.
< 시지프 신화 >
사랑 때문에 미친 한 이방인이 있었다.
사람이 멀어지면 사랑도 멀어지는지,
사랑이 떠난 후 돌아오기를 바랐지만,
사랑은 남자를 돌아버리게 만들었다.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 맹세가
감당할 수 없는 역설이 되었다.
아무것도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저 희망이 없어졌을 뿐이다.
그들은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갔다.
그는 혼자서 무게를 감당해야 한다.
사랑은 허망하다. 그래서 영원하다.
하지만 이 운명에 또다시 도전한다.
살아있다는 것은 영원한 생동감이다.
오직 자신의 자유를 경험하는 것이다.
덧없는 것을 위해 되풀이하고,
또, 제자리걸음하기 위해서이다.
이리하여 나는 부조리에서 세 가지 귀결을 이끌어 낸다. 그것은 바로 나의 반항, 나의 자유 그리고 나의 열정이다. 오직 의식의 활동을 통해 나는 죽음으로의 초대였던 것을 삶의 법칙으로 바꾸어 놓는다.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