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지런한 일벌은 슬퍼할 겨를이 없다
우리 일벌들은 여왕벌과 같은 '암컷'이다. 같은 암컷이지만 우리는 생식능력이 없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우리를 '중성'이라 부르기도 한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암컷은 자손을 퍼뜨리기 위해 마땅히 '생식활동'을 해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알 낳는 일은 전적으로 여왕벌에 맡기고, 공화국의 생존을 위한 나머지 모든 일들은 일벌인 우리가 도맡아 하고 있다.
만약, 우리가 한 둥지 안에서 집단생활을 하면서 일벌 각자가 암컷 본연의 생식활동을 고집한다면, 꿀벌 공화국은 '아수라장'이 될 게 뻔하다.
서로 영역을 차지하려고 다투면서 알 낳고 애벌레를 키워야 하며, 매일 청소하고 밖에 나가 악착같이 먹을 식량을 구해와야 한다. 아울러 공화국을 노략질하려는 외적도 각자 물리쳐야 한다.
결국 우리 일벌들은 암컷이 되기를 '포기'하였다. 어차피 여왕벌은 우리의 엄마로 같은 '유전자'를 공유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각자 유전자를 자손에게 남기기 위해 굳이 서로 다투고 경쟁하며 생식활동을 할 필요가 없다.
여왕벌이 안전하게 더 많은 알을 잘 낳도록 돌봐주고, 우린 해야 할 일을 효율적으로 '분담'해서, 서로 협력하여 부지런히 일하면 된다. 이것이 공화국을 더 평화롭고 굳건히 유지할 수 있는 합리적인 '선택'일 것이리라!
우리 일벌은 태어난 날짜에 맞추어, 모든 일을 '분업'으로 나눈다. 맡겨진 일을 하는 시기는 환경 변화에 따라 다소 유동적이다. 각자 특정한 일을 해야 하는 시점에 이르면, 소속 부서의 동료들이 친절히 안내하며 지도해 준다. 우리는 그저 잘 따르면 된다.
갓 태어난 우리는 바로 청소국에 소속되어 방 청소를 담당한다. 아직 걸음걸이도 서툴지만, 주변에 있는 일벌이 다가와 자기를 따라 같이 청소를 하자고 권유한다.
먼저 각자 출생한 육각형 벌방에 남아있는 배설물과 허물을 물어내 벌통 바닥에 버린다. 그리고 작은 밀랍 부스러기와 빠진 털, 지저분한 먼지를 찾아다니며, 방마다 말끔하게 청소를 한다. (*벌통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는 경비국이나 식량국 일벌들이 바깥에 외출할 때 멀리 내다 버린다.)
서로 비슷한 시간에 태어난 일벌들과 서로 힘을 합쳐 방바닥까지 반질반질하게 닦고 나면, 보육국 일벌의 안내로 여왕벌이 나타나서 그 방에 알을 낳는다. 우리 청소국 일벌들은 더욱 신이 나서 사방을 기웃거리며 열심히 청소를 한다.
사흘 동안 열심히 청소를 하고 다니다가 벌방에서 자라는 애벌레를 쳐다보는데 불현듯 머리 안쪽의 먹이샘에서 애벌레 먹이 '젤리'가 입 안으로 흘러나와 가득 차는 걸 느낀다. 옆에 있는 동료들이 빨리 젤리를 애벌레에게 주어야 한다고 재촉한다. 젤리를 주고 나서 한동안 애벌레를 따뜻하게 품어준다.
애벌레를 돌보는 일이 전에 하던 청소보다 훨씬 힘이 들지만, 무럭무럭 자라는 애벌레를 보면 무척 보람이 있다. 식량이 저장된 방으로 가서 꿀과 꽃가루를 먹고 다시 힘을 낸다. 애벌레에게 젤리를 잘 먹이려면 우리 보육국 일벌들이 더 잘 먹어야 한다고 지나치는 일벌들이 격려한다. 어린 애벌레에겐 첫 삼일 동안 젤리를 먹이고 그다음부터는 이유식으로 꿀과 꽃가루를 섞어서 먹인다.
우리 보육국 일벌 중 일부 선발 대원들은 여왕벌 주변을 따라다니며, 여왕벌에게 '로열젤리'를 공급한다. 로열젤리는 알을 낳는 여왕벌만 먹을 수 있다. 우리는 외부 활동기에는 한 달 반 남짓, 겨울에는 서너 달을 살 수 있지만, 여왕벌은 평생 알을 낳는 노동을 감당하면서도 삼사 년을 살 수 있다. 보육국 일벌이 여왕벌에게 특별하게 공급하는 로열젤리를 먹기 때문이다.
일주일 동안 보육국에 속해서 일하다가 애벌레 먹이를 주고 방을 나서는데, 아랫배가 간질간질하길래 만져보니 여덟 개 '밀랍샘'에서 말랑한 투명한 '밀랍' 조각들이 스며 나온다. 옆에 있던 일벌들이 빨리 달라고 재촉하여하여 떼어주고 나서 뒤를 쫓아가니 여럿이 모여 육각형으로 집을 짓고 있다.
우리도 그들을 따라 밀랍을 씹어서 가지런히 붙여가며 집을 짓는 방법을 익혔다. 육각형의 벌집은 꿀과 꽃가루의 식량 저장소로 쓰고, 여왕벌이 알을 낳아 애벌레가 자라는 방으로도 사용된다. 이 시기에 몸에서 밀랍을 분비하면 식욕이 왕성해져 다른 일 할 때보다 두세 배나 많은 꿀을 먹는다.
꽃에서 따온 꿀이 완숙되면 우리가 분비한 밀랍으로 뚜껑을 만들어 꿀 창고 방을 덮는다. 이렇게 밀폐하면 꿀은 몇 년인 지나도 변질되지 않는다. 또 애벌레가 다 자라서 번데기가 될 때, 우리가 달려가 몸에서 밀랍을 떼어 벌방을 이불처럼 덮어준다. 따뜻하고 포근한 번데기 시기를 지나면 건강한 일벌들과 수벌들이 태어날 것이다.
건축국에 속해서 일하는 일벌들은 교대로 창고국에 파견되어, 바깥에서 식량을 수집해 오는 식량국 일벌들을 맞이한다. 꿀을 수집해 오는 일벌들로부터 입으로 꿀을 전달받는다.
맛없고 당분이 적은 꿀을 가져온 일벌들은 외면하고 꿀을 받아주지 않는다. 외면당한 일벌은 다음 외출할 때는 종류가 다른 꽃 종류를 찾아간다. 창고국 일벌의 단호하고 지혜로운 판단으로 양질의 먹이를 구하기 위한 전략이다.
전달받은 꿀은 빈 방을 찾아가 뱉어낸다. 되새김질을 하며 침샘 '효소'를 섞어서 쉽게 흡수되는 '포도당'과 '과당'으로 분해한다. 꿀이 진하게 '농축'되면 각자 밀랍으로 벌방을 막아서 변질되지 않도록 공기와 차단한다.
이제 벌통 안에 있으면서 거의 이십일 동안 맡겨진 역할들을 마치면, 이제 성숙한 성년이 되어 우린 본격적으로 밖에 나가 꽃에서 꿀과 꽃가루를 수집하는 일을 해야 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임무이다.
바깥일을 하려면 날아다니기 위한 '비행 연습'이 꼭 필요하다. 따뜻한 오후에 벌통 주변을 날며 비행 훈련과 공화국의 위치를 익힌다.
연습하는 사흘 동안 경비국에 속해서 벌통 출입구에서 '문지기' 역할도 담당해야 한다.
공화국에 있는 맛있는 꿀과 꽃가루를 훔치기 위해 아니면 애벌레를 잡아먹기 위해 '외적'이 자주 침입한다. 개미나 파리, 쥐, 다른 종류의 벌뿐 아니라 다른 벌통의 꿀벌도 침입한다. '침입하는 꿀벌'은 우리와 생김새가 똑같아 그들의 행동과 냄새를 통해 판별한다.
작은 외적은 턱과 다리와 날개로 위협해 내쫓거나 '벌침'으로 쏘기도 하는데, 감당하기 어려운 새 종류나 포유류는 젊은 우리를 대신해 '늙은 일벌'들이 달려 나와 벌침을 쏘고 '전사'한다.
이제 공화국 내부의 모든 역할을 마치고, 자연 속으로 날아가 꽃을 찾아다니며 '꿀'과 '꽃가루'를 모아 와야 한다. 비바람도 맞아야 하고, 거미줄에 얽혀 죽거나 새들에게 잡혀 먹는 위험도 감수해야 한다.
먼저 꽃을 찾아다녀온 일벌들이 추는 춤을 보면, 어느 방향에 얼마나 떨어진 곳에 꿀이 많은 꽃이 있는지 알 수가 있다. 우리는 서로 식량이 있는 곳에 대한 '정보'를 교환해 아주 효과적으로 먹이 수집을 한다.
너무 멀리 나갔다가, 꽃을 못 찾으면 지치고 허기져 돌아올 수 없기에, 가능한 공화국에서 십리(4km) 이내에서 먹이를 수집한다.
우리 일벌은 물론 여왕벌과 여왕벌과 짝짓기 위해 태어난 수벌들을 먹여 살리고, 또 겨울에 먹을 충분한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꿀과 꽃가루를 모으러 하늘을 날아다닌다.
우리는 수명이 다할 때까지 이 일을 해야 한다.
우리 일벌들은 우리 공화국을 굳건히 유지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일들을 각자 태어난 날짜에 따라 공평하고 합리적으로 나누어 분담하기로 하였다.
우리는 결코 싸우는 일 없이 서로 화목하게 생활한다. 우리 꿀벌 공화국의 모두를 위해, 맡겨진 일을 즐겁게 감당하고 있다.
우리는 '일복'이 많은 행복한 일벌이다. 부지런히 일하는 우리는 그 어떤 것에도 슬퍼할 겨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