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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벌이랑 Oct 01. 2024

여왕벌에겐 '왕권'이 없다

여왕벌의 슬픈 운명

  여왕벌은 무리 중에서 그 자태가 유난히 돋보인다. 몸집이 크고 하체 복부가 길고 윤택이 나서. 우아하고 장엄한 모습이다.

  

  여왕벌에게는 여왕으로서의 '왕권'이 없다. 공화국에서 암컷의 역할을 홀로 담당하며, 오직 알 낳은 일에만 매진한다. 공화국의 전체 구성원을 잉태하는 엄숙한 사명이다. 따지고 보면, 공화국에 사는 모든 일벌과 수벌은 여왕벌이 낳은 딸과 아들이다. 여왕벌은 '여왕'이 아닌 공화국의 진정한 '어머니'다.




여왕벌이라는 호칭


  그리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유리 상자에서 꿀벌을 키우며 꿀벌 사회를 관찰했다. 꿀벌 무리 중 등치가 가장 크고 힘 있게 보이는 벌을 수컷으로 오인하여 '왕(King)'으로 이름을 붙였다.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에게 걸맞지 않은 큰 착오였다. 이 벌은 수컷이 아닌, 알을 낳는 '암컷'인데 말이다.


  오래전에 강원도 산골에서 토종벌을 치는 노인들께서 이 벌을 '장수(將帥) 벌'이라고 부르는 걸 들었다. 이 어른들도 수컷으로 알고, 군대의 우두머리라는 호칭을 부여한 것 같다.

  아리스토텔레스 이후 생물학자들이 이 벌이 암컷임을 확인하고, 그 우아한 모습과 일벌들이 호위하는 모습을 참작하여 '퀸(Queen)'이라는 지위와 명칭을 선사한 것으로 보인다.


  여왕벌이라는 호칭은 잘못 붙여졌다. 여왕벌이 공화국에서 왕 노릇을 하는 건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오히려 일벌들의 모든 결정에 전적으로 순종한다. 여왕벌은 여왕보다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는 '어머니'에 가깝다.




여왕벌의 왕권


  작은 곤충의 한 종류인 꿀벌도 '약육강식'의 동물 세계에서는 자신들의 생존과 번식이 유일한 삶의 목표이고 주된 본능이다. 따라서 조직의 일원을 왕으로 추대하여 그 절대적 권력에 집단 전체의 운명을 맡기고, 정성을 다해 예우를 하는 것은 자신들의 본능과 상치된다. 오히려 왕의 잘못된 일시적 판단에 의해 조직 전체가 위험에 처하거나, 섣부른 결정에 쉽게 와해될 수 있기 때문에 이 체제를 거부한다.    


  여왕벌은 평생 벌통 안에서만 지낸다. 바깥 환경을 전혀 모르는 여왕벌이 '왕권'을 가지고 그릇된 판단을 내린다면 꿀벌 공화국이 쉽게 위험에 처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상황에 대한 판단과 의사 결정은 공화국 안팎의 현장에서 활동하는 '일벌'이 맡는다. 또, 여왕벌은 밤낮으로 쉬지 않고 하루 천오백 개 정도의 알을 낳는다. 일분마다 한 개를 낳는 셈이다. 이런 중노동에 시달리면서, 일벌들에게 상황을 보고 받고 의견을 수렴하여 중지를 모으고 정책을 결정할 시간적, 정신적 여유가 없다. 이 점이 꿀벌 세계에서 여왕벌이 왕권을 가질 수 없는 또한 가져서는 안 되는 이유다.


  꿀벌 공화국은 '민주사회'를 이룬다. 모든 활동은 체계적으로 분담한 일벌들의 '집단지성'과 일사불란한 의사소통과 합리적 결정에 의해 이뤄진다. 이점을 들어 학자들이 꿀벌 집단을 하나의 몸체인 '초개체'라고 부른다.


여왕벌이 낳은 알과 애벌레. 일벌은 밤낮으로 알 낳은 일만 한다.




여왕벌의 탄생


  여왕과 일벌의 출생 성분은 같다. 즉, 똑같이 정자가 결합한 '수정란'에서 태어난다는 얘기다. 반면에 수벌은 미수정란(무정란)에서 발생한다. 이는 자연계에서 보기 드문 '처녀생식'이다. 대부분 동물들은 암컷과 수컷은 성을 결정하는 '성염색체'에 의해 결정되지만, 꿀벌은 염색체의 종류가 아닌 알이 수정되었느냐 아니냐에 따라 암수가 결정된다는 점이 크게 다른 점이다.

 

  암컷이 되는 수정란이 부화해서 애벌레가 되었을 때, 유모 역할을 하는 일벌들이 자신의 몸에서 분비하는 '왕을 위한 젖'이라는 의미의 '로열젤리'를 먹이면 여왕벌로 탄생한다. 반면에 일벌이 되는 애벌레는 평범한 젖과 이유식을 공급한다. 일벌의 유전자에 감춰진 형질을 불러내어 전혀 다른 모습의 여왕벌로 발현시키는 로열제리가 '신비의 물질'로 칭송을 받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꿀벌 공화국에서 새 여왕벌이 '탄생'할 때가 있다. 첫 번째는 봄철 일벌 수가 늘어나 생활공간이 비좁아져 공화국을 분할(분봉)시킬 때, 새 여왕벌이 태어난다. 둘째, 여왕벌이 갑자기 사망하여 번식이 중단되었을 때, 수정란이 부화하면 로열젤리를 공급하여 새 여왕벌을 키운다. 셋째, 여왕벌이 병들거나 늙어서 새로운 여왕벌로 교체할 때에도 새 여왕벌을 탄생시킨다.  


여왕벌이 애벌레와 번데기를 거쳐 탄생하는 모습




여왕벌의 슬픈 운명


  여왕벌은 태어나서 며칠 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혼례를 치른다. 친족이 모여서 흥겹게 치르는 혼인잔치가 아닌 수백 수천 미터 떨어진 곳으로 홀로 날아가, 사방에서 모인 수벌 무리 중 열댓 마리와 공중에서 연달아 '짝짓기'를 한다.

  짝짓기를 마친 여왕벌은 더 이상 외출을 하지 않고, 공화국 안에서 평생 알 낳은 일에만 전념해야 한다. 여왕벌은 휴식이나 수면을 취하지 않고 밤낮없이 알을 낳는다. 일벌들 모두가 암컷임을 포기하면서 자신에게 맡긴, 암컷 본연의 역할을 자신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봄에 인구가 포화된 공화국이 분할하여 분가할 때, 여왕벌은 새로 출생하는 여왕벌(딸)에게 자리를 '양보'하고 집을 떠나 절반의 일벌들과 새로운 장소를 찾아 새 둥지를 틀어야 한다. 원래 살던 정든 자리에 머물고 싶어 하지만, 일벌들이 강압적으로 데리고 나간다.


  여왕벌이 늙거나 병들어 쇠약해지면 일벌은 수정란을 골라서 새 여왕벌을 키워야 한다. 그리고 새로 태어난 여왕벌이 짝짓기를 마치고 알을 낳기 시작하면, 어미 여왕벌을 '배척'하기 시작한다. 새 여왕벌이 쇠약한 여왕벌을 공격하여 죽이는 것을 방조하거나, 직접 벌통 바깥으로 내쫓는다. 불가피한 행동이라 하지만 우리나라 설화에 나오는 배은망덕한 '고려장'을 연상케 한다.

 

  사실은 공화국의 모든 일벌은 '번식'이라는 숭고한 사명을 감당하는 여왕벌을 무척 아낀다. 여왕벌을 둘러싸서 산란할 장소로 안내하고, 때마다 로열젤리를 먹이고, 몸을 청결하게 치장해 준다. 그러나, 이런 행동도 조직의 생존과 번식을 위한 것이지 진정으로 여왕으로 예우를 하고자 하는 속뜻은 아니다.


  드문 경우지만, 꿀벌 공화국이 극단적인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 일벌들이 여왕벌을 공개적으로 '처형'하는 일도 벌어진다. 예를 들면, 살충제 같은 독극물이 공화국에 퍼졌을 때나 말벌 같은 외적이 침범하여 마구 노략질하거나 식량이 떨어져 모두 아사할 처지에 있을 때, 일벌들이 여왕벌을 공격하여 물어 죽이는 행동을 보인다.

  이런 행동을 굳이 해석하자면, 공화국의 번식을 포기하고 조직을 빨리 해체하여 각자도생을 도모하거나, 뿔뿔이 흩어져 이웃 공화국으로 망명하기 위해서는, 미련 없이 여왕벌을 제거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공화국의 번성을 위해 헌신해 온 여왕벌 자신이 직접 낳은 딸들에게 처형을 당한다는 것은 정말 슬프고 애달픈 '운명'이다.




  여왕벌에겐 여왕으로서의 '왕권'이 없다. 오히려, 벌통 속에서 평생 밤낮없이 수십만 개의 알을 낳아야 하는 고행을 감수해야 한다. 그러다가 새로 태어난 여왕벌에게 자리를 물려주고, 생소한 장소를 찾아 분가해 나가야 한다. 병들고 늙으면 자신이 낳은 일벌들에게 배척 당해 쫓겨나고, 공화국이 위기에 처하면 일벌들에게 죽임을 당해야 한다.


  여왕벌은 꿀벌 공화국에서 유난히 자태가 돋보인다. 우아하고 장엄한 모습이다. 비록 왕권을 가진 '여왕'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희생을 바치는 슬픈 운명의 '어머니' 모습이다. 그래서 언제 보아도 여왕벌은 늘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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