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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벌이랑 Oct 15. 2024

가을밤, 수벌을 위한 헌시(獻詩)

수벌이 떠나는 밤하늘 빈자리

  바깥에서 바라보는 수벌의 운명은 가엾기 그지없다. 꿀벌의 생활사를 접해본 사람들은, 땅 위에 있는 수컷 중에서 꿀벌 수벌이 '가장 불쌍해 보인다'라고 얘기한다.  

  오묘한 '창조의 산물'이든 또는 오랜 '진화의 결과'이든, 주어진 '소명'을 다하지 못하고 이 가을밤에 이슬처럼 사라져야 하는 수벌의 모습은 참 불쌍하다.


  꿀벌의 수벌은 태어나서부터 조직의 중심에서 활동하는 일벌들에게서 '소외'된다. 벌집의 언저리에서 별 돌봄 없이 태어나 늘 구석방에 머물며, 맡은 일이라곤 오직 바깥으로 나가 먼 '공중'에서 처녀 여왕벌과 '짝짓기'하는 일뿐이다. 


  운이 좋아 다른 수벌들을 따돌리고 여왕벌과 '교미'에 성공하더라도, 생식기가 이탈하면서 곧 공중에서 떨어져 죽는다. 끝내 교미를 못하고 살아남은 '노총각' 수벌들은 짝짓기 기간이 끝나는 이 가을에, 일벌들에 의해 꿀벌 공화국에서 쫓겨난다. 겨울날 식량을 아끼기 위한 방책이라지만 수벌에게는 너무 가혹하다.


  가을이 되면 찬 바람에 낙엽이 떨어지듯, 수벌들은 밖에서 찬 이슬을 맞으며 숨을 거둔다. 겨울에는 수벌이 종적을 감춘다.

   

벌통에 앉아 있는 두 마리 수벌의 모습

               



가을밤, 수벌을 위한 헌시(獻詩)

                                                 

싸늘한 이 가을밤, 

떨어진 낙엽 곁에 식은 몸으로 쓸쓸히 잠들며, 

너의 짧은 숙명이 이곳을 떠나는구나.


춥고 외롭게 잠들어, 

못 맺은 연분으로 떠나려니 얼마나 서러울까.

작디작은 가슴, 여린 심정에 얼마나 침통할까.


지나고 나면 모두에게 삶은 참 아쉬운 것

차가운 땅이라 더욱 한스럽겠구나,  

차라리 찬이슬 없던 여름밤이면 나았을까.


그들이 본의가 아닌 오래된 관습으로

늘 홀대해야 했다고 핑계하지만,

모른 척 참아낸 너희가 참 대견한 존재


어딘가에서 찾아올 여왕을 맞이하려

매일같이 돌아오지 못할 출가를 다짐하며 

정처 없이 날아다녔던 하늘, 그 먼 고행 길


그녀가 못 본 척 무정하게 외면한 날마다 

풀 죽어 고개 숙이고 집 찾아 돌아와, 

밤새워 숨죽여 흐느끼던 슬픈 눈물


못 이룬 정은 누구에게나 있는 법,

모두에게 오는 이별은 차갑고 냉정한 것,

짧은 생이 외롭고 서러웠다 한탄하진 말게나.


이제 너희가 겪은 생(生)의 고초(苦楚)를 

너희 착하고 순박한 동정(童貞)을 

너희를 아는 우리가 오래오래 기억할 것이니,


너희가 하늘에 남긴 날갯짓 노고(勞苦)가 

너희 닮은 후대에게 길이길이 

아련한 전설(傳說)로 전해질 터이니,


이제 모두 잠든 이 가을밤,

너희처럼 작은 은빛 날개의 예쁜 선녀가 나타나


못다 한 수컷의 한(恨)을 품에 안고 높이높이

저 밤하늘 빈자리로 날아오를 것이니,


곳에 빛나지 않아도 좋을 작은 별들이 되게나,

남겨 놓을 빛이 없는 순결한 별자리로 남아 있게나.


                                         - 벌이랑 -

                                               2024.1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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