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에 전남 농업마이스터대학 양봉전공(2년 과정)에 강의를 나가면서, 여성 양봉가 변 여사님을 뵙게 되었다. 스무 명 학생 중 나이가 가장 많은 분이었던지, 대부분 학우들이 누님이라 불렀다. 70대 초반의 실제 나이보다는 대여섯 살 젊어 보였다.
강의 전에 건강음료를 손에 쥐어 주시는 마음이 정겨웠고, 강의 중에 항상 초롱한 눈으로 경청하는 모습이 고마웠다. 사리에 밝고 퍽 얌전하신 분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강의 시간 외에 양봉장 현장 실습으로 이동하는 차량에 동승하여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이 분의 벌을 대하는 진지한 태도와 긍정적 인생관에 대해 알게 되었다.
양봉을 하는 남편이나 친지를 보조해 주는 것이 아닌, 양봉을 직접 맡아서 대규모로 운영하는 여성 양봉가는 그리 많지 않다. 수백 통의 벌을 옮기며 관리하고 많은 꿀을 뜨는 일이 꽤나 힘겨워서, 여성에게 결코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벌의 행동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꼼꼼하게 관리할 수 있다는 측면에서, 벌 치는 일에 남성보다 여성이 더 유리할 수 있다.
양봉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10년 전까지, 변 여사는 아주 잘 나가는 이른바 팔자 좋은 중년의 여성이었다. 영관급 장교로 퇴직한 남편분이 새로 시작한 건설업이 크게 번창하여, 여유롭게 전국을 누비며 매일 골프를 치러 다녔다. 지금도 창고에는 왕년에 쓰던 최고급 골프채가 여럿 있다고 한다.
변 여사는 가족들이 꿀을 좋아해서 벌통 두 통을 사서 양봉하는 분에게 관리를 맡겨놓았다. 그리고 꿀 딸 때만 가서 일을 거들어 직접 수확한 꿀을 받아오며 점차 벌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그런데 인생 여정에 여지없이 풍파가 이는 것처럼, 한창 잘되던 남편 사업이 하청업체의 부도로 졸지에 도산하는 처지에 몰렸다.
쓰러진 남편의 사업에 대한 자구책으로 변 여사는 본격적으로 양봉을 시작하게 되었다. 다른 식당이나 주점 같은 돈벌이도 구상했지만 신실한 크리스천인 친정어머니가 극구 반대하시다가 양봉을 한다고 하니, 성경 말씀에 부합한다며 적극 찬성하셨다. 초기에는 고령의 몸으로 벌 보는 일을 도와주시기까지 하였다.
본격적인 양봉업을 위해 맡겨두었던 벌을 늘려 집 근처에 직접 새 양봉장을 만들었다. 봄이 되면 벌 이삼십 통을 다른 양봉가가 이동하는 트럭에 같이 실어 보내면서 이동 경로를 익히고 현장 경험을 쌓았다.
한동안 전국에 잘한다는 양봉가는 직접 찾아가 배움을 청하고, 오가는 길에 양봉장이 보이면 바로 찾아가 그분들의 지식과 경험을 귀 기울여 들었다. 양봉에 관한 교육이나 세미나가 있으면 빠짐없이 참석하는 열정을 보였다.
변 여사님의 초창기 양봉장(왼쪽)과 당시 홍수로 떠내려간 벌통을 수습하는 모습(오른쪽)
그녀는 오월이 되면 전남 담양에서 겨울을 지낸 꿀벌을 싣고, 경북 성주에서 경기도 안성을 거쳐 강화도로 옮겨 꿀을 수확한다.
처음에는 교사인 세 딸의 사위들이 교대로 찾아와 일손을 거들었지만, 최근에는 현지 인력을 사서 힘든 일들을 감당한다. 사업에 실패하고 다른 곳에 취업한 남편도 이제는 시간 날 때마다 벌 치는 일을 돕는다.
그녀의 꿀은 진하고 품질이 좋아 단골 고객이 많다. 올해는 특히 경기가 안 좋아 양봉가들이 꿀을 팔지 못해 아우성이지만, 변 여사는 수확한 꿀이 부족해서 못 팔 정도로 신뢰를 얻고 있다.
불행하게 재작년부터 여러 원인으로 우리나라 꿀벌이 폐사하는 현상이 자주 나타나고 있다. 변 여사가 처음 양봉을 배웠던 스승들도 벌을 망쳤지만, 지금은 제자였던 그녀가 오히려 벌을 건강하게 잘 키운다. 큰 욕심을 버리고 사랑과 정성으로 키우고, 열심히 배우고 익힌 벌 관리 기술에 남다른 깊이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가연구기관이 변 여사를 시범 양봉가로 지정하여, 지원 사업으로 도와주고 있다.
노후가 되면 일상생활에서 의욕을 잃기 쉽다. 욕심내서 억지로 이런저런 일을 하더라도, 즐겁지 않으면 고달프기 마련이다.
변 여사는 여덟 손주들에게 공부하는 할머니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빠지지 않고 수업에 출석하여 개근상을 받아 자랑하려 한다. 자식들에게 손 벌리지 않는 당당한 엄마가 되기 위해 벌과 즐겁고 일하며, 가족이 모일 때마다 자진해서 밥을 산다.
변 여사는 나이 든 여성으로 10년 만에 전업 양봉가로 성장한 모범 사례가 되었다. 주변에서 모두 인정하는 온화한 성품과 진중한 품격을 지닌 우리나라 여성 양봉가의 전형이다.
아울러, 부지런하고 야무진 오백만 마리(삼백 통)의 일벌을 거느린 꿀벌 공화국의 오롯한 여왕님이다. 따뜻한 모성애로 어린 자식처럼 벌을 대하는 자상한 꿀벌의 어머님이다.
사랑을 담아 진심으로 대하고, 맡겨진 시간에 열정으로 최선을 다하면, 꿀벌도 그 사람을 따른다. 자식한테 하듯 벌에게 하면, 벌 치는 자의 노후는 즐겁다. 그래서 나이 들어 벌을 치는 변 여사님은 어느 누구보다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