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가을 아침, 양봉가 K 씨는 오랜만에 양봉장에 나가서 가을 햇살이 따사하게 비추는 하얀 벌통들을 하나씩 열어 벌집을 꺼내 보기 시작했다. 그러다 갑자기 "윽~"하고 신음을 내며 침통한 표정으로 한동안 몸이 굳은 듯,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분명 벌집 위에서 수많은 일벌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어야 한다. 각자 주어진 일을 맡아 신나게 청소하고 애벌레를 키우며, 밖으로 부지런히 나다녀야 한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모습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한 움큼도 안 되는 일벌들만 맥없이 붙어있는 게 아닌가!
'아뿔싸! 마침내 이 놈들이 극성을 부렸구나, 그래서 벌들이 부들부들 떨며 벌통을 떠났구나, 멀리 나가서 죽어버렸구나! 젠장, 여름에 응애 약을 받아다 열댓 번이나 투여했어도, 소문대로 이 약이 듣지를 않았구나! 그래도 내 벌만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아니 이게 왠 날벼락인가!' K 씨는 거듭 탄식하며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꿀벌 공화국의 안에는 잘 보이지 않는 괴물이 도사리고 있다. 이 괴물은 '꿀벌응애(Varroadestructor)'라는 아주 작은 진드기다. 이 생물체는 꿀벌을 가장 괴롭히는 위험한 존재로, 그리고 치명적인 기생충으로 악명이 높다.
원래 이 응애는 아시아의 동양꿀벌(일명 토종벌)에 기생하던 토착종으로, 1960년대부터 서양꿀벌이 아시아로 확산하면서 기주를 초월하여 이동한 것이다. 수십만 년 기생당했던 동양꿀벌은 생리적, 행동적으로 방어할 능력을 갖추어 피해가 없지만, 이 응애가 기생한 지 60년 정도밖에 안 된 서양꿀벌은 속수무책으로 피해를 받고 있다.
꿀벌응애는 작은 거미처럼 생겼고, 길이가 약 1mm여서 육안으로는 구분이 어렵다. 그러나, 이 작은 괴물은 꿀벌에 기생하여 체액을 빨아먹고 살면서, 벌의 영양분을 탈취하고 면역력을 약화시키며 각종 악성 바이러스를 옮긴다.
서양꿀벌을 주 타깃으로 삼아 창궐하여, 전 세계 꿀벌 집단 폐사의 주범으로 손꼽히고 있다. 따라서 전 세계 양봉가들에겐 이 작은 괴물을 어떻게 퇴치해야 하는가가 가장 큰 화두이며, 내로라하는 유명 동물약품 회사들은 새로운 방제약제를 개발하는데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전 세계 수천만 꿀벌 무리는 사람이 이 꿀벌응애를 계속해서 제거하지 못하면 꿀벌 스스로 생존할 수가 없다. 밭에서 때 맞춰잡초를 잡지 못하면 채소밭이 쑥밭이 되는 것과 똑같다. 그래서 혹자는 양봉을 '응애와의 전쟁'이라고 표현한다.
일벌 몸에 기생하는 꿀벌응애와 현미경 확대 사진(barnmedia.net)
꿀벌응애의 생존 습성은 아주 치밀하다. 번식을 위해 꿀벌의 애벌레 방 속으로 숨어 들어가 벌 애벌레가 번데기가 되면, 번데기 고치 속에서 알을 낳는다. 알에서 태어난 응애 새끼는 번데기의 혈액을 빨아먹고 자란다. 다 자란 응애들은 성충 벌과 같이 고치에서 나와, 벌 몸에 편승하여 또다시 번식할 숙주를 찾아다닌다.
응애가 벌 애벌레 방과 번데기 고치 속에서 지내는 기간(13~16일)에는 응애를 퇴치할 방법이 없다. 즉, 이들이 방호망 속에서 방패 뒤에 숨어있는 셈이다. 밖에 나와 잠시 벌 몸에 타고 있을 때만 약제를 투여하여 처치할 수 있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기존에 사용하던 화학약제에 꿀벌응애가 저항성이 생겨서 좀처럼 죽지 않는 것도 큰 문제다.
발육 과정에서 많은 응애에 감염되었던 꿀벌은 체력이 약해져 식량을 수집하지 못하고, 심하면 제대로 날지도 못한다. 이에 더해 기형날개 바이러스나 급성마비 바이러스가 퍼져서 날개를 갖추지 못하거나 마비증세를 보이는 꿀벌들이 태어난다. 마침내 응애로 인해 꿀벌 봉군 전체가 서서히 붕괴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 피해는 곧 우리 농업과 생태계에 큰 타격을 준다. 꿀벌응애라는 작은 종(種) 하나가 대규모 꿀벌 집단은 물론 거대한 식물생태계를 뒤흔드는 모습으로 나타날 수 있다.
우리는 꿀벌응애 피해가 무섭다고 꿀벌 집단에 화학약제를 무차별 남용하여 오히려 독성에 의한 꿀벌 피해를 자초했다. 정부에서 무상으로 나눠주는 약제에만 계속 의존하여, 응애가 내성과 저항성이 생겨 더 이상 듣지 않는다. 번데기 고치 속에 있는 응애는 생각하지 않고 외부에 노출된 응애만을 속히 퇴치하려다, 여름철 번식속도가 빨라진 응애가 대규모 공습하는 불운을 초래했다.
'항상 꿀벌 무리 중에 꿀벌응애가 얼마나 기생하는지를 추적하라. 응애 수가 급증하기 전에 미리미리 방제하라. 저항성이 생긴 약제는 포기하고, 다른 성분의 약제를 활용하라. 주기적으로 개미산, 옥살산을 활용해 약제 저항성을 가진 응애를 없애라. 여름에는 응애가 좋아하는 수벌집을 짓고 수벌 번데기로 유인하여 포살 하라!'
이런저런 방역 지침이 반복해서 양봉가에게 전달되지만, 수십만 년 이상을 꿀벌에 의지하며 살았던 응애를 싹 쓸어서 박멸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꿀벌응애는 절대 기주인 꿀벌을 벗어나서는 생존할 수 없기에, 결사적으로 꿀벌에 붙어 생존하고 번식할 수밖에 없다.
최근 꿀벌응애는 꿀벌과 사람에게 마치 악마와 같은 존재로 부각되었다. 하지만, 꿀벌응애와의 싸움은 단순히 꿀벌을 지키는 문제를 넘어서, 인간과 자연의 조화가 필요한 시대에 이른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작은 괴물을 무찌르기 위해 무차별로 독한 화학약제를 살포하는 것은, 마치 빈대를 잡으려고 초가삼간에 불 지르는 것과 같다. 응애가 최소의 수효로 벌통에 서식하도록 지혜롭게 관리를 해야 한다. 여러 가지 생태적 방법, 물리적 방법도 총동원하여 피해를 주는 수준에 이르지 못하도록, 사전에 밀도를 억제하는 데 치중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한 친환경친화적인 방제 수단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꿀벌응애의 서식처인 꿀벌공화국이 자신들에 의해 패망한다면, 살아갈 터전을 잃게 되는 것을 그들도 알고 있다. 우리가 지나친 화학적 압력을 가하지 않으면, 그들 스스로의 자정 기능으로 벌과 공생하는 적정 밀도를 유지한다.
이것은 꿀벌응애뿐만 아니라 농작물, 산림, 보건에 피해를 주는 병해충도 같은 개념으로 접근해야 한다. 이들을 모조리 박멸하려다가 되돌아오는 '자연 생태계의 저주'는 상상을 초월한 대재앙이 될 수 있다.
K 씨는 이제 몸과 마음을 추슬러, 꿀벌 공화국을 다시 재건할 것이다. 이젠 꿀벌응애를 악마가 아닌 꿀벌에 붙어사는 작은 생물체로 받아들이고, 세밀하게 주시하고 진단하여 그들이 일시에 공습하지 않도록, 예방을 위해미리 솎아내려는 지혜와 정성이 필요하다.
지금도 괴물 응애와 사투를 벌이고 있는, 모든 꿀벌에게 감사와 격려의 마음을 전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