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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벌이랑 Nov 26. 2024

벌 치는 사람들(1)

너는 우는 아이에게 꿀을 먹이고

가난한 자에게 단꿀을 준다.

나는 아직도 아직도

너의 꿀을 만들지 못한다.


너는 너의 단 하나 목숨과 바꾸는

무서운 바늘침을 가졌으나

나는 단 한번 내 목숨과 맞바꿀

쓰딘쓴 사랑도 가지지 못한다.


하늘도 별도 잃지 않는

너는 지난 겨울 꽁꽁 언

별 속에 피는 장미를 키우지만

나는 이 땅에

한 그루 꽃나무도 키워보지 못한다.


 - 정호승 시인의 '꿀벌' 중에서 -




우리나라 양봉가(養蜂家, Beekeeper)가 벌을 치게 된 동기는 각양각색이다.

집 근처에서 분봉하여 나온 꿀벌 무리를 우연히 발견하여, 벌통에 담아 키우다, 재미를 느껴서 점점 벌통 수를 늘려서 대규모 양봉가가 된 분들이 많다. 전문 양봉가 밑에서 조수로 일하다가 독립해서 양봉가로 대성한 분들과, 부모나 조부모로부터 대물림을 받아 전업으로 양봉을 하는 분들도 있다.


어떤 분은 사업에 실패하거나 실증을 느껴서 양봉을 새 직업으로 전환하여 성공하였고, 직장 생활하면서 오랜 기간 벌을 조금씩 키우며 야무지게 준비한 끝에 양봉으로 대성한 분도 있다. 생활은 넉넉하여 양봉으로 수익을 올리기보다는, 벌 키우는 자체가 매우 흥미진진하여 애정과 진심으로 꿀벌을 대하는 분도 있다.

귀농하여 다른 농사와 더불어 겸업으로 양봉을 하거나, 꽃 따라 벌통을 옮기며 꿀을 채취하는 멋진 유랑생활을 즐기려 시작한 분도 있다.


오랫동안 양봉을 하는 분들은 이구동성으로 '양봉은 중독성이 있어 그만두기가 쉽지 않다.'라고 말을 한다. 그만큼 꿀벌이 묘한 매력이 있고, 벌 키우는 일이 힘들면서도 재미가 있고, 잘하면 수입도 괜찮다는 얘기다.

한편으로 벌 치는 일이 겉보기에는 쉬워 보여서, 별 준비 없이 많은 벌통을 분양받아 키우다가 단기간에 벌이 원인 모르게 없어지거나, 집단 폐사하여 큰 손해를 보고 그만두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양봉가들의 교육과 문화 수준은 물론 과거의 전력도 다채롭다.

한글을 쓰는 것도 어려워하는 분부터 다양한 전공의 석박사들이 있고, 목사님과 스님, 수녀님 그리고 교사(교장, 교감), 교수 출신도 있다. 현직 공무원이나 경찰, 법조인 출신도 쉽게 만날 수 있다.

농촌에서 줄곳 성장한 토박이 농부와 가업을 이어서 벌을 키우는 청년들이 어쩌다 보이지만, 어려서부터 벌만 키우며 생업을 유지해 온 양봉가는 찾기 힘들다. 대부분 다른 일을 하다가 전업하거나, 퇴직 후 양봉을 시작한 분들이다.


우리나라에 정식으로 등록한 양봉가는 삼만 명 내외이지만, 소규모로 벌을 치는 분들을 포함하면 오륙만 명을 훌쩍 넘을 것으로 보인다.

요즘은 양봉으로 꿀 외에도 화분(花粉), 로열젤리, 프로폴리스, 봉독, 밀랍을 생산하지만, 아직도 벌꿀이 양봉업의 주된 수입원임에는 변함이 없다. 일부 양봉가들은 로열젤리를 집중적으로 생산하여 수익을 올리거나, 딸기나 참외 농가에 꽃가루 수분용 벌통을 팔거나 임대하여 주로 수입을 얻는다. 어떤 분은 양봉을 시작하거나 벌을 망친 양봉가에게 자신이 키운 꿀벌 봉군을 대량으로 분양하여 주된 소득을 올리기도 한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 양봉가는 전국을 누비며 활동하였는데, 멀리 제주도부터 시작하여 휴전선 인근까지 벌통을 이동하며 꿀을 땄다. 당시의 꿀값은 지금보다 훨씬 비싸서 양봉가의 수입이 제법 많았다. 그래서인지, 당시 이동 양봉을 하며 돈을 잘 쓰는 외지 총각들은 시골 처녀들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한다.


1980년대 초에 강원도 산골에 만났던 이북 출신으로 토종벌 키우던 노인은 꿀이 가득한 통나무 통을 지게로 옮겨, 서울 재벌가에 집 한 채 값에 팔아본 적이 있다고 실토했다. 벌꿀이 귀하고 비싼 탓에 터무니없는 가짜꿀도 난무하던 시기였다.


요즘은 우리 양봉가들이 진퇴양난의 늪에 빠져있다.

최근 키우던 꿀벌이 기후변화와 독성이 강해진 병해충으로 면역력과 생존력이 떨어져 집단 폐사하기 일쑤다. 난개발로 인해 꽃에서 꿀을 분비하는 밀원식물도 급감하고 있다. 생산은 둘째로 치더라도, 꿀벌이 농작물의 결실에 필요한 꽃가루수분 역할도 제대로 감당하기 힘들다.


설탕을 먹여서 채취한 꿀을 '사양(飼養, 먹여 키움) 꿀'에서 소비자가 잘 알도록 '설탕꿀'로 바꿔야 하느냐에 대한 갑론을박으로 양봉업계가 소란하다. 무엇보다 걱정되는 것은, 수입 관세가 삭감된 베트남꿀과 값싼 중국꿀이 줄줄이 한국으로 들어오고 있으며, 심지어 병원균과 항생제가 잠재한 벌집꿀과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사료용 벌꿀이 세계 도처에서 대량으로 들어와 통관을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




꿀벌을 다루는 일은 예술에 가깝다. 그리고, 혹독한 노동이 따른다.

벌과 교감하기 위해 눈과 마음을 가다듬고, 세심한 손길로 벌에 다가가야 한다. 벌통을 열었을 때 풍기는 체취와 미세한 움직임에서 벌의 건강과 활력을 읽어야 한다. 하늘로 날아오르는 일벌의 도약과 일을 마치고 회귀하는 안착에서 꽃에서 얻어낸 그들의 성취를 판단해야 한다.


꽃을 찾아가 꿀을 수집해 오는 일벌을 군대를 양성하듯 건장하게 키우고, 마치 어깨를 두드려주듯 기세를 돋우며 다정하게 격려해야 한다. 끊임없이 알을 낳은 여왕벌을 다치지 않게 간수하고, 매년 젊고 똘똘한 여왕벌로 교체해주어야 한다. 부족한 먹이는 계속 보충해 주고, 벌 무리가 거주하는 벌통의 보온과 환기를 돌봐야 한다.


거칠게 공격하는 벌침에는 아픔을 견디며 쏘여야 하며, 뙤약볕 아래에서 방충망을 쓰고 무거운 벌통을 열어서 병이 들었는지 점검하고, 몸에 붙은 응애(진드기 일종)를 갖가지 방법으로 제거해야 한다.

봄철에는 트럭에 수백 통의 벌을 옮겨 싣고 꽃 따라 산골을 누벼야 한다. 꿀이 가득 차면 아침마다 모든 벌집에서 벌을 털어내고, 채밀기에 옮겨 꿀을 떠서 통에 담아놓아야 한다. 피는 꽃 따라 이동하는 양봉가는 봄을 지나면 체중이 10킬로그램이나 빠진다.




인류가 번창하며 자연생태계를 인위적으로 무너뜨리고 재편한 결과로, 최근에 그 대가를 톡톡히 치르고 있다. 꿀벌과 그 꿀벌을 키우는 일인 양봉도 그 희생양의 하나가 되었다.


양봉이 보기에는 쉽고 재미있고, 누구나 할 것 같은 단순한 직업으로도 보이지만, 참 어렵고 애환이 많은 천직(天職)으로 이해해야 한다.


1986년 개봉한 그리스 영화 '양봉가(The Beekeeper)'에서  주인공 '스피로스'는 은퇴한 교사로 전국을 다니며 양봉을 하다가, 삶의 고통과 허무함을 못 이겨 술에 취한 상태로 벌통을 열어젖히고, 벌에게 쏘여서 벌과 함께 함몰하는 슬픈 장면이 나온다. 배경이 외국이긴 하지만 양봉가의 애환이 잘 담겨있는 영화인 것 같다.


요즘 우리 양봉가들이 감당해야 할 책임감이 어느 때보다 무겁다.

우리가 벌의 소중함을 알고, 우리 양봉가들이 처한 어려운 현실을 좀 더 이해하려고 애써야 한다. 범람하는 외국 꿀보다 우리의 국산 천연꿀을 더욱 아끼고, 무차별 훼손되는 자연환경과 꽃나무가 울창한 숲을 지켜나가도록 더욱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유럽연합이 꿀벌에 독성이 강한 농약 사용을 금지시키고, 유럽으로 수입되는 모든 꿀에 농약, 항생제, 중금속의 잔류 여부를 철저히 가려내고 있는 것을 귀감으로 삼아 보자. 아울러 그들이 슬로베니아의 원로 양봉가 '안톤 얀샤'의 생일인 5월 20일을 '세계 꿀벌의 날'로 정해서, 꿀벌과 양봉가를 보호하기 위해 앞장서는 것에 마음으로 동참해 보자.


"하늘도 별도 잃지 않는 / 너는 지난 겨울 꽁꽁 언 / 별 속에 피는 장미를 키우지만

나는 이 땅에 / 한 그루 꽃나무도 키워보지 못한다."

정호승 시인의 '꿀벌'을 향한 참회의 고백을 다시 한번 떠올려 본다.


*커버이미지: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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