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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lli Mar 10. 2022

앞서 가고 싶지 않은데.

기다림에 익숙지 않은.

6호선은 참 땅속 깊숙이 있다.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타고 내려가도 그 경사가 너무 급해 자칫 중심이라도 잃으면 큰 사건 하나는 터지겠다 싶을 정도로 아득한 곳이다.

영화 기생충에서는 모든 게 들통난 가족들이 본래 자신들의 집으로 끝없이 이어진 계단을 내려가고 내려가는 장면이 나오는데 매일 계단을 내려가는 내가 , 심지어 내가 움직이지 않아도 스스로 깊숙이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영혼 없는 영혼을 실어 땅속으로 들어가 출근을 하고 돈을 번다.

오늘은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한국에서 4번째 전시를 하는 날이라 여지없이 기나긴 땅속을 이동해 환승을 하러 갔는데 하필이면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가 고장이 난 것.(항상 올라가는 방향만 고장 나는 것 같은 느낌은 뭘까)

상행으로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걸어가던 사람들은, 상하선 중앙에 있는 계단으로 갈까 잠시 고민을 하다 멀리서 엉거주춤 계단에서 길을 막고 있는 할아버지를 발견하고선 멈춰버린 에스컬레이터의 계단을 향해 열심히 발을 움직였다. 성격이 급한 사람들은 자신의 앞을 잠시라도 막고 있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용납할 수 없기 때문에 열심히 본인을 막는 장애물을 헤치고 사람들을 제처 가버렸다. 나는 앞서가던 사람들이 몇 번 바뀌더니 계단을 한 칸 한 칸 두발로 딛으며 움직이는 할머니의 등을 마주쳤다. 할머니는 왼쪽 어깨에 가방을 메고 두 손을 오른쪽 벽을 지지대 삼아 칸마다 두발 서기를 반복하며 사람들의 걸음을 느리게 만들었다.

나는 할머니에게 영향이 가지 않게끔 몸을 살짝 틀어서 서둘러 올라가려고 했으나 그러지 않았다. 사실 나는 서둘러 갈 필요가 없었고 느긋하게 전시를 보러 가는 길이라 급할 것이 없었다.

본의 아니게 느리게 계단을 오르는 할머니를 보며 나는 어떤 늙음의 형태를 본 것 같았다.

계단을 막아선 또 다른 할아버지도 지팡이를 가지고 있었는데 할아버지는 계단을 오르기 위해 혼자 사용할 수 있는 영역을 초과한 나머지 뒤에 사람들이 할아버지를 제칠 수도 없었고 할아버지는 본인이 길을 막고 있다는 것을 생각지도 못한 것 같았다.

느리게 걸음을 옮기는 모습을 보며 나는 속도를 맞춰 걸어보다가 금세 몸을 비켜 세워 할머니의 가방이 스치지 않게 앞서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플랫폼에 도착해보니 지하철은 아직 두정거장 전이다. 

전철은 아직도 오질 않았고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보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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