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 지름, 후 명분

부제- 때로는 선후 따위, 그리 중요하지 않다.

by Rima

허망하게 보낸 시간만큼 뭉텅 비어 있던 지난해의 내 빈곤한 일기장을 마주하고,

일기 한 줄도 못쓸 만큼

니가 그리 밤이고 낮이고 바빴냐?

... 아닌데?

괜한 자책감에 빠져 마음이 불안하고 허 해진 상태였다.

이럴 땐 고질적으로 충동구매를 저지르고 마는데,

아니나 다를까.


뭔가 글을 끄적이는 나...

노트북......

멋져 보여....


아련하게 떠오르는 '갬성'이미지들에 떠밀려

덜컥 노트북을 사질러 버렸다.

사실 구매하고 배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까지도

뭘 하고 싶은 것인지 구체적으로 서있던 계획은 없었다.


사고 나니 이런저런 관심 있었던 강의도 보게 되고,

사고 나니 블로그도 정리하게 되고,

투닥투닥 어디다 쓸 용도도 없는 글 비스름한 것을 쓰게 되고...


노트북을 가지고 놀다보니 카페에 앉아있고 싶어졌다.

조명이 은은한 커피 향 가득 찬 카페에 앉아서 자판을 두들겨줘야만 할 것 같았다.

주차장, 영업시간, 위치, 인테리어 등등 조건들을 따져보면서

퇴근 후에 어느 카페로 출동할지 검색에 몰두했다.


카페는 넘쳐났지만 막상 검색만으로

알맞은 조건의 카페를 찾는 것은 의외로 쉽지 않았고,

가기도 전에 말 그대로 현자 타임이 와버렸다.

모든 게 급격하게 귀찮아졌고, 도주하듯 집으로 직행했다.


그렇게 나는 지금 이불동굴 속에 앉아 자판을 두들기고 있다.

따지고 보면 애초에 누가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닌데

굳이 카페에 갈 이유도 없었고,

집에서 하면 지출도 절약될뿐더러 몸도 마음도 편할 것을.

왜 그렇게 카페에 집착을 떨었는지 모르겠다.

이 쓸데없는 욕망.

인스타 감성스러운 허세.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빤딱한 새 노트북의 자판 두들기는 소리가

기가 막히게 내 기분을 업시키고 있었다.

처음 피아노 앞에 앉아있는 애처럼,

그저 뚱땅거리며 만져지는 감촉과

끓어오르는 근본 없는 의욕에 사로잡혀 마냥 신났다.


아무렇게나 두들겨도 기똥차게 대하 드라마라도 써질 것 같은 기분.


그렇게 처음엔 단순히 새 아이템의 물성 매력에 빠져들었고,

자꾸 만지고 싶다보니 뭔가 타이핑 칠 소재가 필요해졌다.


'나는 왜 이렇게 남들이 하는 짓은

꼭 한 번씩 따라 해 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

'항상 허수를 두며 실패하면서도 그 전형적인 그림 안에

왜 꼭 나를 욱여넣어보고 싶어 하는 것일까.'등의

뜬 구름 같이 마음속에 떠다니던 생각들을

나름 시간을 들여 고른 단어들로

구체적인 표현을 해보기 시작 했다.


오늘은 일찍 일어나 어딜 가서 뭘 했고 누굴 봤고 식의

국정원의 사찰일지 같은 평소의 내 일기가 아닌,

감정에 대해, 심리적인 상태에 대해 써보게 된 것이

이 날을 기점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 지름이 없었다면,

이불 동굴 속에서 귤이나 까먹다 잠들어버렸겠지.

이만하면 꽤 성공적인 소비가 아니겠어?


노트북은 좋은 지름이었다.





- 갑자기 외제차를 지르거나 코인에 몰빵하는 중증이 아니면 절제력이 꽤 양호한 거 아니겠습니까?




뽕을 뽑으면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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