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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망아빠 Apr 27. 2019

Prologue.

아이와 아빠에 대한 단상.

#1.

언젠가 우리 딸과 동네 카페 놀이터에서 놀아주는데,

엄마와 함께 예쁘게 차려입은 아이를 보았다.

엄마가 잠시 차를 주차하러 간 사이, 아이에게 우리 딸처럼 미끄럼틀을 권했더니,

놀라운 답이 돌아왔다.

안돼요. 옷 더러워지면 엄마한테 혼나요.


부모에게 기분 좋은 칭찬들이 여럿 있을 것이다.

똑똑한 것, 잘생기고 예쁜 것, 얌전한 것.

좋은 옷은 뭘까. 좋은 책은 뭘까. 좋다는 것은 뭘까.

그것은 누구에게 좋은 것일까.


#2.

최근 진주 방화사건같이, 종종 사회는 '괴물'을 만난다.

또한 잊히길 원하며,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건넌 많은 '청춘'들이 있다.

이들의 안에는 그것이 분노이던, 절망이던 상처 받은 아이가 있다.

그들의 나이에 상관없이, 그들의 내적 자아에는 그 아이가 살고 있다.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의 노력이 필요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들에게 단 한 명이라도 있었다면, 그들의 선택은 다르지 않았을까?  


화두를 던지는 나 역시 좋은 아빠는 아니었다.

일주일에 아내와 밥을 먹는 것이 체 2번을 넘기기 어려웠고,

갓난아이는 주말마다 본 아빠의 모습이 낯설어 토요일을 울음으로 시작했다.

거기다 앞서 언급한 글처럼 1년을 떨어져 살았기 때문일까?

'아빠'란 말을 21개월 차에 겨우 들을 수 있었다.

아이가 발달장애는 아니다.

단지 '바나나', '맘마', '과자'가 아빠보다 앞섰던 것이다.       


5년의 시간이 지나, 이제 남들이 보기에, 제법 화목한 부녀지간이 되었다.

아이의 에너지, 웃음의 비법에 대해 묻는 어른들도 제법 생기었다.  


프리랜서가 되며, 여러 가지 업무들을 하고 있다.

그중 올해부터 시작한 것이 '아빠 공부'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는 홈스쿨링을 위한 3년 공부를 시작하였다.

아무리 좋은 것이라도, 남에게 강요하는 것은 폭력이다.

하지만, 아이가 우리의 방법에 공감해줬을 때, 아빠로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함이다.


프리랜서로 이직에 대한 글을 쓰고, 강의를 하지만,

내가 프리랜서를 택한 것도, 여러 어려움에서도 생존을 위해 기도하며

고군분투하는 것도 아빠라는 사명을 감당하기 위함이다.


앞으로 나누고자 하는 것은 우리 딸과 사는 방법, 아빠로서 하는 공부이다.

때로는 가볍게, 때로는 무겁게.


삶이 다르듯. 방법은 다르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싯다르타>처럼, 해탈의 길은

'내가 남의 길로는 해탈에 이를 수 없다'라는 깨달음에 있다.

다만 본질의 하나는 전해졌으면 한다.


로고 테라피의 창시자 빅터 프랭클의 아우슈비츠의 깨달음처럼.

아베 피에르의 엠마우스 공동체, 마바 콜린스의 외침처럼.

마하트마 간디에게 아힘사와 사티아그라하를 심어준 아버지의 용서처럼.

아이에게는 부모가 의지할 수 있는 '단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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