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느림 Sep 07. 2020

혼자의 식탁

몸보신에 대하여

(언제 갔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동남아 같이 덥고, 습한 데다가, 맥 빠지고, 축 쳐지는 날들의 연속이던 어느 날, 문득 나에게 기력 보충이 필요함을 느끼고는 어김없이 포털사이트에 장어를 검색했다. 몸보신에 장어만 한 게 없다며 주기적으로 장어가 먹고 싶어 지는 때가 바로 그날이었다.


코로나로 수출이 막혀 버려질 위기에 놓인 바닷장어가 완전 헐값에 인터넷에 돌아다녔다. 때마침 백종원 효과를 등에 업은 바닷장어가 인기를 끌고 있었고, '품절'이란 글자에 약한 편이라 냉큼 생장어 1킬로를 주문했다. 그 후의 일은 생각하지 않은 채.


사실 나는 생선을 만지지 못한다. 특히나 미끌미끌한 장어를 만지는 걸 상상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오만상을 쓰고 있다. 그런데도 먹고 싶어서 일단 사고 나면 받고서야 후회를 한다.


"하... 그냥 식당 가서 사 먹을걸."


매번 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나를 너무나 잘 알지만 그래도 가성비는 직접 해 먹는 게 좋으니까 맛있는 걸 더 많이 먹기 위해 어쩔 수가 없다.


제일 작은 크기의 장어를 주문했더니 약 9~10마리 정도가 들어있었다. 한 번에 그 많은 걸 먹을 수가 없어서 냉동실에 얼려두려고 했는데, 일단 씻으려다 보니 개봉부터 난감했다. 이미 손질된 장어인데 비닐을 열면 꿈틀대며 달려들 것 같았다. 노릇노릇 잘 익은 장어를 입에 넣고 씹어 넘길 줄만 알았지 생으로 만져본 적이 없었다.


용기를 내서 일단 봉지를 뜯고, 고기용 집게로 멀찌감치 떨어져 한 마리씩 끄집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곤 흐르는 물에 갖다 댄 채 대충 흔들어댔다. 씻었다기보다 적신 것에 가까웠지만 나로선 최선이었다. 대충 물기만 털어낸 장어 중 두 마리만 남기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넣고 나서야 식사 준비를 할 수 있었다. 




청양고추와 다진 마늘, 간장이랑 올리고당 등 그럴싸한 재료들을 찾아 양념장을 만들어 장어와 함께 졸였다. 생강이 없어서 마늘장아찌로 대신하고 장어와 궁합이 좋다는 계란을 스크램블 해서 올리니까 처음치곤 그럴싸해 보였다. 


다음날엔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소금으로 살짝 간을 해 구워서 생강채, 쌈채소와 함께 또 한 끼를 해결했다. 1kg 샀을 뿐인데 먹어도 먹어도 냉장고엔 계속 장어가 남아 있었다.


네 마리 정도 먹고 나니까 기분 탓인지 기운이 좀 올라오는 것 같았다. 사실 몸보신 보다 마음 보신이 더 필요했던 나였는데, 장어와의 싸움에서 이긴 탓인지, 먹고 싶은 걸 먹은 탓인지 마음이 조금 튼튼해진 것 같다랄까. 만질 수 없어서 씻지도 못하고 대충 물에 헹궈 구운 장어덮밥이라도 어쨌든 하나를 '완성' 했으니.


일단 시작을 하고 나면 상황을 수습하기 위해서라도 결과를 만들어야 한다. 어떻게 해서든 결과를 얻고 나면 그걸로 나머지 반쪽을 마저 완성할 자신감과 추진력을 얻을 수 있다. 몸보신을 핑계 삼아 든든하게 맘보신을 해보자. 움츠러들었던 마음에서 호랑이 기운이 솟아날지도 모르니까. 

작가의 이전글 혼자의 식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