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초심
새해가 되기 전에 미리 사 둔 다이어리에 일 년 치 계획을 빼곡히 채우곤 했다. 무슨무슨 자격증 시험일정, 가족과 친구들의 생일, 여행 계획이나 버킷리스트. 그리고 빠짐없이 등장하는 "다이어트"가 있었다. 휴대폰에 각종 어플과 더불어 편리한 기능들이 많지만, 난 아직 그렇게 종이에 펜으로 끄적이는 아날로그 방식이 편하고 좋다. 그렇게 채웠던 다이어리는 하반기로 갈수록 펼쳐보지 않는 날이 더 많아졌고, 결국 금세 새로운 다이어리를 꺼낼 때가 왔다. 1월 1일은 누구나 아는 새해이자 원하지 않아도 합법적으로 모든 이가 나이를 먹는 날이다. 언제부터인가 숫자로서의 나이는 잊고 사는지라 누가 나이를 물어봤을 때 처음엔 아니라고 그럴 리가 없다는 발뺌이 먼저 나온다. 가만히 숨만 쉬어도 먹어지는 게 나이인데, 나이를 먹는 게 슬프다기보단 한 해를 그토록 바쁘고 알차게 살았다고 생각했는데도 못다 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그리고 그 아쉬움을 또다시 새로운 다이어리에 꾹꾹 눌러 담는다.
올해도 어김없이 새로운 다짐들을 써 내려갔다. 주 1권 독서, 하루 2L 물 마시기, 매일 일기 쓰기. 그리고 이젠 숙명이 되어버린 다이어트. 새해의 시작을 함께한 초심이 담긴 결심은 과연 몇 달, 아니 며칠이나 갈까? 주 1권은 역시나 무리여서 월 2권으로 타협하고, 하루 물 1L 마시는 것도 너무 힘들었다. 딱 하나 아직까지 유지되는 계획은 바로 "일기 쓰기"다. 자정을 넘기기는 하지만 아직까진 매일 쓰고 있다는 점을 칭찬한다. 다이어트는 지금까지 먹은 걸로 봐선 아마도 다음 달부터 시작하지 않을까? 시작은 1일이 정석이니까.
그나마 다행인 건, 우리에겐 두 번째 기회가 있다. 바로 음력 1월 1일. 코로나로 벌써 2년째 가족들이 모이지 못하고 있는 명절. 아이들이 있어서, 사람을 상대하는 직업이라 혹시 모르니까, 집합 금지 명령 등 다양한 이유로 가족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설을 보냈고, 나 역시 이번 설은 혼자 일을 하며 보냈다. 솔직히 조금은 편했던 것 같다. 조용히 혼자 시간을 보내기도, 친구를 만나기도, 운동을 하기도 하면서 오롯이 나만의 시간을 보냈다. 기름 냄새에 절어 전을 부치지 않아도 되고, 어차피 흘려들을 잔소리도 피할 수 있었으니까 사실 나쁠 건 없었다. 다만 적적하실 부모님이 걱정될 뿐이었다.
그다지 명절 음식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문득 제사나 차례를 지낼 때만 먹을 수 있는 음식들이 조금 그리웠다.
'그러고 보니, 올해 떡국도 못 먹었네.'
떡국은 마치 새해를 맞이하는 의식 같은 음식이다. 떡국을 먹어야 한 살을 먹는다는 주입식 교육 덕분인지도 모르겠지만, 떡국을 세 그릇 먹으면 세 살 먹었다는 재미없는 농담을 던지는 사람에게 썩은 미소를 날리기도 하지만, 탄수화물 폭탄이라 다이어트에 도움은커녕 방해만 되는 하필 그 떡국이 너무 먹고 싶었다.
그렇다고 가래떡을 맞추고, 한우를 사서 육수를 내고, 만두를 빚고, 알록달록 고명을 올릴 자신은 없으니 마트에서 세일하는 떡국떡과 인스턴트 설렁탕을 사 왔다. 만두를 사지 않은 걸 집에 오는 길에 알았음에도 발길을 돌리지 않은 걸 보면 그다지 만두가 절실하진 않았나 보다. 떡국은 5분 만에 끝났다. 그냥 냄비에 설렁탕을 붓고, 물을 조금 더 넣은 다음에 물에 헹군 떡국 떡을 넣고 끓이면 끝이었다. 문제는 고명이었다. 구색은 갖추고 싶어서 달걀흰자와 노른자를 분리했다. 지단은 단 한 번도 제대로 해 본 적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누군가 프라이팬에 종이 포일을 깔고 부치면 절대 그을음도 안 생기고 노랗고 하얗게 예쁜 지단을 만들 수 있다고 했다. 꽤나 참신한 방법이 아닌가! 바로 이거다! 싶어서 그대로 적용했다.
종이 포일을 깔고 계란 흰자를 먼저 부었다. 확실히 프라이팬에 눌어붙지는 않았다. 다만 종이 포일에 눌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일단 반대편을 익혀야 했기에 종이 포일 통째로 들고 프라이팬에 뒤집었다. 그렇게 익힌 흰자는 숟가락으로 긁어냈다. 종이 포일에 불이 붙기 직전에 계란이 익어준 것에 감사한다. 결국 노른자는 그냥 프라이팬에 부쳤는데, 이건 지단이라기보다 그냥... 노른자 떡 같은 느낌이랄까. 이럴 거면 그냥 떡국에 계란 프라이 반숙으로 올려도 좋았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생각났는데 아마도 종이 포일을 깔고 식용유를 부었어야 했나 보다.-
살짝 엉망진창이었지만 나는 오늘도 나에게 그럴싸한 떡국과 한 살을 같이 먹였다. 다음 떡국을 먹이는 날, 과연 나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일어날지 기대하면서.
소박하지만 설레는 식사였다. 잘 먹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