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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달다 Feb 04. 2023

엄청나게 멋진 당신의 시간에 짝짝짝!

그림책 <일곱 할머니와 놀이터>를 읽고

  젊었을 때 시장 모퉁이에서 유명한 뜨개방을 하던 홍장미 할머니는 어마어마한 손뜨개 솜씨의 소유자로 손뜨개 새를 진짜 같이 만들어 수컷 새들이 날아와 밤새 춤을 추었더랬다.

  젊었을 때 자전거를 타고 온 동네에 신문을 돌리던 배달자 할머니는 어마어마한 자전거 솜씨의 소유자로 자전거를 타고 못 가는 곳이 없었고,  동네 사람들은 할머니가 돌린 신문을 읽으며 하루를 시작했더랬다.

  젊었을 때 복잡한 시장통에서 온갖 떡을 이고 팔던 백설기 할머니는 어마어마한 균형 잡기 솜씨의 소유자로 북적이는 시장통에서 수십 개씩 떡 바구니를 이고 다녔지만 단 한 번도 떨어뜨린 적이 없었더랬다.

  젊었을 때 마을에서 가장 큰 한복집을 하던 황금실 황은실 할머니는 어마어마한 한복 짓기 솜씨의 소유자들로 어떤 재료로든 한복을 지을 수 있었고, 하늘하늘 얼마나 고왔는지 다들 선녀 옷인 줄 알았더랬다.

  젊었을 때 대학에서 수많은 학생을 가르치던 나박사 할머니는 마을에서 공부를 가장 잘했고 딱 한 번 읽은 것도 머릿속에 저장하는 재주가 있었더랬다.

  한평생 아이 열 명을 낳아 기르고 독립시킨 구주부 할머니는 사건이 터지면 마무리하는 게 전문인 프로주부였다.

  그리고 작가가 책을 바치는 여덟 번째 할머니 온재윤 여사님은 미용실과 잡화점 주인이었다.


 그림책 이야기를 쓰면서 이렇게 자세히 등장인물을 소개한 적은 처음이다.

 사실 내가 쓴 글을 읽고 '아, 이런 그림책이 있구나'하고 그냥 끝나는 분들이 대부분일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 소개된 그림책을 직접 찾아보고 느끼는 분들이 한 명이라도 더 생기길 바란다. 내가 쓴 글은 나의 마음일 뿐이다. 같은 그림책으로도 우리는 수천수만의 다른 마음을 가질 수 있고 그게 진정한 그림책의 매력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친절해 보일지라도 그림책의 내용을 자세히 설명하는 것을 되도록 피하고 내 마음이 흔들렸던 한 두 장면 위주로 글을 정리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은 왜 이렇게 그것도 길~~게 인물들에 대해 쓰고 있는가?

 

  이 그림책을 읽으면서 나는 아른아른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지루하기 짝이 없을 뻔했던 어느 봄날 텅 빈 놀이터 옆 정자에 누워 코를 골며 낮잠을 주무시는 일곱 할머니들의 지난 시간에 눈이 가고 마음이 머물렀다.


  한평생 각자의 자리에서 보냈을 그 계절의 바람들이 그림책을 보는 동안 나를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다.


  당신들도 화창한 봄날 눈부신 벚꽃 아래서 꽃보다 더 고운 미소를 띠고 달뜬 마음으로 누군가의 손을 맞잡았을 것이다. 모처럼 예쁘게 원피스를 차려입고 나갔다가 얄미운 꽃샘바람에 옷깃을 여미우고 감기에 걸려 며칠을 고생했을 것이다. 혹은 형제 많은 집의 장녀로 태어나 일찍부터 생활 전선에 뛰어들어 봄이 오는지 가는지도 모른 채 젊은 날들을 보냈을 것이다. 학교 다니는 친구가 부러워서 몰래 울기도 했을 것이다. 결혼해서 다른 도시로 이사 가는 친구를 배웅하며 이다음에 꼭 만나자고 약속했을 것이다.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쌀을 불리고 곱게 빻아 체에 거르고 찜기에 젖은 베 보자기를 깔았을 것이다. 순한 눈빛 하나 믿고 결혼한 남편이 사람은 참 좋은데 돈벌이는 시원찮아서 아이를 둘러업고 시장에 나가 좌판을 열었을 것이다. 그 시절 깨어있는 부모님을 만난 복으로 고등학교를 거쳐 대학 공부까지 마칠 수 있었을 것이다. 밤늦게까지 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며 스웨터와 조끼를 짜고 또 짰을 것이다. 없는 살림에 자식복만 많아서 웃는 날도 많고 우는 날도 많았을 것이다. 한겨울 날이 채 밝지 않아 어둑어둑한 새벽길에 자전거를 타다 넘어져 한참을 일어나지도 못하고 끙끙거렸을 것이다. 물건을 산다고 잠시 흥정하는 사이 잡고 있던 손을 놓친 아이를 찾아서 무더운 여름 그 시장 바닥을 몇 번이나 돌고 돌았을 것이다. 큰 도시로 나가 내가 만든 한복을 제대로 선보이고 인정도 받고 싶었을 것이다. 딸만 계속 낳는다고 구박하는 시어머니보다 가만히 등 돌리던 남편이 더 야속했을 것이다. 마을에서는 분명 수재였는데 큰 도시에 나가 공부해 보니 확연히 비교되는 실력에 위축되고 자존심도 상했을 것이다. 연탄가스를 마시고 축 늘어진 아이를 안고 밤거리를 미친 듯이 뛰었을 것이다. 새로 한 머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환불을 요구하는 진상 손님과 한바탕 대거리를 하며 소리를 질렀을 것이다. 스승의 날이라고 카네이션을 준비한 학생들과 함께 사진을 찍으며 함박웃음을 지었을 것이다. 한평생 함께 하자고 약속했던 사람이 속절없이 떠나고 그의 제사상에 올릴 동태전을 부쳤을 것이다. 훌쩍 커버린 아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든든했을 것이다. 마을 친구들과 아주 오랜만에 제주도 여행 가서 나란히 같은 포즈로 사진도 찍었을 것이다. 거울 앞에서 언제 이렇게 흰머리가 늘었냐며 혼자서 한숨도 내쉬었을 것이다. 시집 간 딸내미가 엄마가 되었을 때 대견하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했을 것이다. 미스터트롯을 보다가 리모컨을 손에 들고 깜빡 잠들기도 했을 것이다.


  이 모든 시간이 당신들의 계절이고, 삶이고, 역사일 것이다.


  그루가 대답했어.

  "지나간 시간이란...... 눈에 보이진 않지만 엄청나게 멋진 거군요!"


  매 순간 치열했을 것이다.

  매 순간 눈부셨을 것이다.

  매 순간이 온전했을 것이다.

  지나간 시간이란 고양이 그루의 말처럼 눈에 보이진 않지만 엄청나게 멋진 거니까.

  그래서 허풍 같은 당신들의 솜씨 자랑은 귀엽고 당당하고 멋지다.

  당신들은 충분히 그래도 된다.

 

   물론 당신들을 온전히 다 이해할 수는 없을 것이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어떨 땐 답답하고 꽉 막힌 막무가내식 고집과 행동에 살짝 질릴 때도 있다. 그러나 이 순간만큼은 엄청나게 멋진 당신들의 시간에 짝짝짝 손바닥이  얼얼하도록 박수쳐 드리고 싶다.

  한걸음 한걸음 여기까지 잘 걸어오셨다고, 꿋꿋이 잘 견디셨다고, 정말 잘 살아오셨다고, 당신의 눈물과 웃음과 손길에 무한한 존경과 사랑을 드리고 싶다.

  덧붙여 언젠가 닥칠 나의 시간에도 반짝반짝 빛나지 않았어도 애썼다고, 잘했다고, 그만하면 되었다고 이야기해주는 내가 되길 야무지 욕심내어 본다.

  

덧붙이는 글 :

  책의 앞표지와 뒤표지를 나란히 올려두는 이 마음이 당신에게 온전히 전달되길 바란다.

  그림책 <일곱 할머니와 놀이터>는 구돌 님이 쓰고 그렸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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