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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달다 Feb 12. 2023

엉뚱하게... 나의 작은 선인장

<아나톨의 작은 냄비 >를 읽고

  <아나톨의 작은 냄비>를 보다가 취미로 그리곤 하는 내 그림이 생각났다. 아나톨이 달그락달그락 작은 냄비를 끌고 다니는 것처럼 내 그림 속 캐릭터는 작은 선인장을 데리고 다닌다. 어쩌다 캐릭터 옆에 선인장을 같이 그리게 되었을까? 엉뚱하게도 나는 아나톨이 끌고 다니는 작은 냄비보다 내가 그린 선인장의 의미가 더 궁금해졌다.


  

  선인장은 내 캐릭터의 분신 같은 존재이다. 봄밤에 혼자서 달구경을 할 때도, 내리는 비를 꾸역꾸역 다 맞고 있을 때도, 명랑하게 인사할 때도, 통통통 풀밭을 가로질러 너에게 달려갈 때도 선인장을 데리고 다닌다.


  내가 그린 캐릭터는 나를 닮아서 눈이 아주아주 작다. 다른 사람들은 눈을 감고 있다고 착각할 정도다. 그래서 표정을 알아보기 어렵다. 속상할 때도 서운할 때도 기쁠 때도 화날 때도 무서울 때도 신날 때도 눈만 봐서는 잘 알 수가 없다.

  

  나도 그렇다. 감정을 잘 표현하지 않는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감정 기복이 없다기보다는 내 속에 있는 무언가를 겉으로 오롯이 드러낸다는 것이 영 익숙지 않다. 요즘은 그럴 일이 잘 없겠지만 졸업식장에서 송사가 나오면 그 시절 여자 아이들은 많이 훌쩍였다. 눈물은 하품처럼 전염되는 법이다. 어느새 많은 아이들이 같이 훌쩍훌쩍하고 있다. 그 속에서 나는 울고 있는 친구들을 멀뚱멀뚱 돌아본다. 슬프지 않은 것이었는지, 아니면 남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는 것이 민망해서 애써 참았던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왜 나는 다른 친구들처럼 눈물이 나지 않을까 혼자서 의아했던 기억은 남아있다. 소리 내어 크게 웃는 게 자연스럽지 않아서 웃음소리가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적도 있다. 소리 내어 울고 웃는 게 감정을 있는 대로 드러내는 것만큼 어색한 아이였다. 나와 다르게 큰 소리로 깔깔대고 웃고, 주변에 사람이 있어도 우는 사람을 볼 때면 어떻게 저럴 수 있나 싶다가도 살짝 부럽기도 했었다. 나는 기쁜 일도 슬픈 일도 별로 없었던 것일까? 아니면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게 부끄러웠던 것일까?

  혼자서 TV를 볼 때는 다르다. 앞뒤 맥락도 잘 모르는데 영상 속 인물이 눈물을 흘리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찔끔 난다. 일요일 아침에 동물농장을 보면서 자주 많이 운다. 그렇지만 여전히 다른 사람들 앞에서는 잘 표현하지 않는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내가 그린 캐릭터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그래서 옆에 있는 선인장이 캐릭터의 감정을 대신 드러내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가만히 있지만 그게 내 모습의 다가 아니에요, 나는 지금 이런 마음이에요.’라고 말이다.

  상처받기 쉬워서 늘 뾰족뾰족한 가시가 솟아있는, 쉽사리 곁을 내어주지 않고 혼자서 가만히 저를 지키고 있다고 생각하는, 겉으로 무심한 척하고 있지만 속에는 찰방찰방 눈물을 품고 있는 작은 존재.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캐릭터 옆에서 ‘나 슬퍼요, 아파요, 무서워요, 애써 버티고 있어요.’라고 대신 말하는 존재. 그게 바로 선인장이다.


  물론 나이가 든 지금의 나는 어린 시절의 나보다 훨씬 더 많이 웃고, 욱하며 화도 내고, 좋을 때는 좋다고, 힘들 때는 힘들다고 표현하는 편이다.(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런 내가 예전의 나보다 훨씬 편하게 느껴지고 마음에 든다. 앞으로 더 많이 웃고, 더 많이 우는 내가 되길 바란다. 내 감정을 잘 인지하고, 수용하고, 표현하는 단단하고 다정한 내가 더 멋진 사람이란 걸 아니까 말이다.

아나톨은 예전과 똑같은 아나톨이랍니다.     

 

  많이 웃고, 많이 울고, 더 많이 좋아하고, 싫다고 소리 내어 말해도 나는 여전히 똑같은 나니까 말이다.


  덧붙이는 글 :

  냄비 때문에 자꾸 걸려서 아나톨은 앞으로 가기가 힘들다. 냄비 때문에 아나톨은 평범한 아이가 되려면 남들보다 두 배나 더 노력해야 한다. 냄비 때문에 아나톨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냄비가 없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결국 냄비 속으로 숨어버린다. 그러나 그림책의 앞부분에서 아나톨은 작은 냄비에 앉아서 사랑하는 음악을 감상하고 작은 냄비에 우유를 담아 배고픈 길냥이에게 주기도 한다. 예쁘고 상냥한 꽃을 담은 작은 냄비를 달그락달그락 끌고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를 찾아간다. 제 몸보다 훨씬 큰 그림도 작은 냄비를 받침대 삼아 아주 잘 그린다.

  대부분의 것들은 양면성을 지닌다. 그때는 맞고 지금은 틀릴 때도 있는 것처럼, 시간에 따라 바뀌는 것들도 있다. 백 퍼센트 좋은 것도 백 퍼센트 나쁜 것도 없다. 아나톨의 작은 냄비나 내 그림 속 작은 선인장도 그럴 것이다. 어떨 때는 꽁꽁 숨어버리게 만들고 싶을 만큼 떼어내고 싶을 때도 있지만 또 어떨 때는 꽁꽁 숨어버린 내 곁에 유일하게 남아서 조용히 나를 위로해 줄 때도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 길들여진 습관 같고, 배경처럼 남아있는 계절 같아서 가끔은, 아니 자주 좋은지 나쁜지 까먹을 때가 더 많겠지만 한 번씩 돌아보면 변함없이 나를 기다려주는 또 다른 나일 수도 있겠다 싶다. 어쩌면 나의 숨기고 싶은 단점과 내가 보여주고 싶은 장점이 아나톨의 작은 냄비에, 나의 작은 선인장에 똘똘 뭉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둘 다 나이고 내 것이라는 것!

  담담히 바라봐주고 쓰담쓰담해 줄 것, 깨끗한 물로 닦아도 주고, 때 맞춰 물도 줄 것, 단 너무 과하지 않게, 그리고 잃어버리지 말 것, 잊어버리지 말 것!


  그림책 <아나톨의 작은 냄비>는 이자벨 카리에 님이 짓고, 권지현 님이 옮겼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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