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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달다 Feb 26. 2023

다시 출발선 앞에 서서, 싱긋!

그림책 <달리기>를 읽고

  달리기를 할 때마다 나는 꼴찌였다. 바로 앞을 달리는 친구와도 차이가 많이 나는 너무도 분명한 꼴찌!

  대부분의 아이들이 10초대의 100미터 달리기 기록을 받을 때, 나는 20초를 넘겼다. 걷지 않고 최선을 다해 이 악물고 뛰었음에도 말이다.


  어린 시절의 나는 열심히 노력하면 바라는 것을 이룰 수 있다는 순진한 믿음을 갖고 무던히 애쓰며 살았다. 그런 내게 달리기는 끝내 극복할 수 없었던 참 냉정하고 무지막지한 상대였다. 물론 나이가 더 들고 어른이 된 뒤에는 의지와 노력만으로 극복할 수 없는 것들이 세상에 차고 넘친다는 것을 잘 알게 되었지만, 어쨌든 그때의 나에게 달리기란 거대한 벽이고, 건널 수 없는 강이었다. 야속하고 억울했다.

  

  그림책 <달리기>를 볼 때마다 움찔움찔하는 건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더 이상 기록을 재는 달리기를 필요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불편하다. 그림책 <달리기>가 전하고 싶은 뜻은  알겠지만, 많은 사람들이 전력질주하는 장면을 연달아 보고 있으면 숨이 가쁘고 가슴이 답답해진다.

  ‘왜 이렇게 다들 달리기만 하지?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쉬면 안 될까? 천천히 이야기 나누면서 걷기만 해도 훨씬 수월할 텐데.’ 어느새 반감 아닌 반감이 생긴다.


  그림책 <달리기>를 보는 게 이토록 불편한 일인가?

  이번 기회에 내가 달리기를 힘들어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찬찬히 살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심호흡을 크게 들이마시고 후-우 내쉬고 후-


  출발선에서 ‘땅!’ 하는 신호를 기다릴 때의 터질 듯한 긴장감이 너무 싫다. 출발할 때부터 시작이 늦어버리면 앞선 아이들을 따라잡기란 100미터 달리기에서는 거의 불가능하다. 내가 앞서지 못한 순간 다시는 만회할 수 없다는 두려움! 출발 신호가 울리는 그 짧은 순간 모든 것이 결정되고, 나는 또 돌이킬 수 없이 패배자가 된다.  게다가 타고난 재능도 결코 무시할 수 없다. 탁월한 운동 신경을 갖고 빠르게 달리는 능력을 가진 아이를 절대 이길 수 없다. 아무리 원하고 애를 써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나를 앞질러 나가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때 느껴지는 찰나의 외로움이 있다. 모두 잘만 달려가고 있는데 나만 또 뒤처지고 있구나, 내 주위에 아무도 없구나, 들 속에 끼고 싶은데 도저히 따라갈 수 없구나. 한참을 뒤처지면서 느끼는 불안함과 민망함은 매번 트랙에서 도망치고 싶게 지만 용기 없는 나는 도망도 가지 못한 채, 이미 결승선을 통과한 이들의 시선을 온몸으로 느끼면서 꾸역꾸역 뛸 수밖에 없었다.   

  

  모두가 전력질주하지 않고 편안할 수는 없을까? 의구심이 든다. 서로를 이기려고 무한경쟁을 반복하는 세상에 멀미가 날 지경이다. 속도를 조금 늦춘다 해서 세상은 절대 망하지 않을 텐데, 모두들 미친 듯이 달리고 또 달린다. 나 혼자라도 멈추면 되는데 차마 그러지도 못한다. 멈추는 순간 나만 패배자가 될 테니까. 열심히 뛰어도 항상 꼴찌였지만, 조금 더 노력하한 명 정도는 이길 수 있지 않을까? 내 안의 욕심과 불안이 무거운 다리를 억지로 끌고 헉헉거리며 달리게 한다.


    결국 나는 달리기 같은 명백한 경쟁이 싫었던 것이다. 좀 더 솔직히 하자면 명백한 경쟁 속에서 꼭 이기고 싶다는 나의 명백한 욕망이 견디기 힘들었다. 매 순간 뒤처지면 끝이라는 생각으로 긴장하고, 숨이 차고, 외롭고, 답답했다.


  다시 그림책 <달리기>의 책장을 천천히 넘겨본다. 이전에는  크게 와닿지 않던 장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 속표지에 수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준비 운동을 하고 있다. 한 번의 달리기가 끝난 후 시상대 위에서 다음번 달리기를 위해 다 같이 멈춰 서서 준비 운동을 한다. 책의 마지막 뒤표지에도 달려를 신나게 외치던 아이가 준비 운동을 하고 있다.


  아! 무조건 달리는 게 아니었구나. 충분히 준비 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상태를 점검하고, 재정비하고 있었구나. 달리기의 기회는 한 번만 있는 게 아니었지. 우리의 삶은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라 마라톤 같은 장거리 달리기라는 걸 잠시 잊고 있었구나. 중간중간 다시 준비할 시간이 나에게  있구나. 한번 뛰기 시작하면 멈출 수 없는 게 아니었구나.


  또 하나 새롭게 시선을 사로잡은 것은 허들 같은 장애물을 넘는 장면이다. 허들이 있으면 무조건 뛰어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작은 사람들은 아래로 그냥 달려간다. 세상을 살아가는데 한 가지 방법만 있는  아니다. 정해진 대로만 살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달리기 도중에 나타난 허들처럼 예기치 못한 삶의  장애물 앞에서 닥친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는 생각에 랜 시간 스스로를 괴롭히며 오도 가도 못할 때가 있다. 스스로 만든 장애물이다.


   신재현 님의 <어른의 태도>에 이런 글귀가 나온다.

  “현재 다투고 있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에요. (중략) 싸우는 전쟁터에서 꼭 승리해야만 삶이 이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승리하기 위해 그 문제를 어떻게든 붙잡으려는 태도가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고 삶을 가로막아요.”     


  중요한 것은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지 내 앞에 놓인 문제를 반드시 해결하고 승리해야 하는 것이 아님을 그림책 속 허들이 해주고 있다. 그림책 <달리기>가 예전만큼 불편하지 않게 보이기 시작한다.      


  식상한 표현이지만 우리네 삶은 단번에 승부가 결정되는 100미터 달리기가 아니다. 충분히 자신에게 맞는 방식대로 달려가면 된다. 그리고 내 앞에 던져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한 가지 방법고집할 필요도 없다. 내 상황과 능력과 마음에 따라 해결하면 된다. 안되면 안 되는 대로 놓아두고 다음을 향해 달려 나가는 융통성을 발휘해도 충분히 괜찮다.


  꼭 하나의 트랙만 달리지 않아도 된다. 남들이 뛴다고 해서 무조건 똑같이 달릴 필요도 없다. 함께 뛸 때의 기쁨도 분명 있겠지만 나 혼자 트랙을 벗어나 내가 정말 달리고 싶은 곳을 향해 달려도 괜찮다. 물 위로, 악어 뱃속으로, 절벽 아래로, 빛나는 달나라로 어디가 되었든 정말 중요한 것은 기꺼이 달리고 싶은 마음 아니겠는가? 덧붙여 달릴 때와 멈출 때를 스스로 선택하는 것, 나만의 속도대로, 이왕이면 신나게, 기쁘게!


  다시 3월이 시작된다.

  습관처럼 출발선에서의 긴장감이 스멀스멀 느껴져서 배도 살살 아픈 거 같고 나도 모르게 움츠러들지만 그래도 이번 달리기에서는 두려움 같은 건 좀 덜어두고 내 속도대로 달려가면 좋겠다. 가다가 힘들면 걸어가고, 주변 친구들도 돌아보고, 꽃도 보고, 하늘도 보면서 또 한 번 내게 선물같이 주어진 달리기 시간을  잘 보냈으면 좋겠다. 

  지금  마음을 까먹고 허덕댈 게 분명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이 마음은 모자란 나를 잘 챙겨주리믿는다.

  그러니, 나도 당신도 다시 출발선에 서서, 싱긋!


  그림책 <달리기>는 나예 님이 지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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