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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달다 Apr 01. 2023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어. 그래도... 보고 싶어

그림책 <바람은 보이지 않아>를 읽고

  "아빠, 걱정이 되면 걱정을 해야지, 왜 화를 내세요? 그냥 걱정된다고 말하면 되잖아요."


  결국에 참지 못하고 늙은 아버지에게 한마디 내뱉는 못된 딸이 바로 나다.

  지난 여름 엄마가 계단에서 넘어지면서 머리를 부딪치는 사고가 있었다. 이마가 찢어지고 여기저기 타박상을 입은 건 둘째치고 누워있어도 계속 어지러워 못 견디는 엄마와 밤새 응급실에 있으면서 별별 생각을 했던 무서운 날이었다. 검사 결과 다행히 뇌에 이상은 없다고는 했지만 한동안 엄마는 가벼운 뇌진탕과 이석증으로 혼자서 앉지도 못할 만큼 고생을 하셨다. 가족 모두 걱정과 근심으로 견디던 날들이었다. 그 와중에 전형적인 옛날 경상도 남자 우리 아버지는 여느 때처럼 감정 표현이 서투르셨다. 엄마가 아픈 상황에 누구보다 당황하고 두려우셨을 걸 잘 알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와 가족들을 향한 아버지의 투덜거림과 짜증을 그때만큼은 그러려니 하고 지나칠 수 없었다. 그만큼 모두들 예민한 상황이었고, 한편으로는 평생 동안 자신의 속마음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아버지가 답답하고 안쓰럽고 야속했다.  


  그림책 <바람은 보이지 않아>는 앞이 보이지 않는 한 소년이 바람과 바람의 색을 찾으러 떠나면서 시작된다. 길을 가다 만난 늙은 개와 큰 산과 마을과 비와 꿀벌과 사과나무와 아주 큰 거인에게 소년은 바람이 무슨 색인지를 물었다. 각자 자신이 경험한 만큼의 색으로 바람을 이야기해 주었다. 그중 비와 새는 소년의 질문에 모른다고 하거나 답하지 않고 가버린다. 바람을 보지 못하는 만큼이나 서운하고 야속한 장면이다.


 

 소년은 나무에 기대어 앉았어.

 "바람은 무슨 색일까?"

 소년이 한숨을 내쉬었어.


  얼마나 보고 싶을까? 그 마음이 간절한 만큼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할까? 보고 싶은 만큼 희망을 품었다가 또 보고 싶은 만큼 좌절할 그 마음이 마치 가슴에 큰 돌 하나 얹어놓은 것처럼 무겁고 먹먹했다.


  그러다 보이지 않는 다른 것들이 생각났다.


  보고 싶지만 결코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 외면하고 싶지만 존재하는 것들 말이다.

  말간 눈으로 나만 바라보는 댕댕이의 생각, 늘 괜찮다고만 하는 우리 엄마의 진짜 속마음, 여전히 내 손을 꼭 잡고 있는 당신의 사랑, 버릴 수 없는 꿈, 피할 수 없는 불안과 걱정, 째깍째깍 흘러가는 시간, 도착하지 않은 미래, 남들 몰래 꼭꼭 감춰둔 비밀, 떠나온 추억, 미세먼지, 온기, 공기, 독설, 흔들리는 감정, 뒤엉킨 고민, 삼일마다 다시 하는 결심, 지워지지 않는 그리움, 돌이킬 수 없는 후회, 참을 수 없는 분노, 부디 인간보다 너른 품으로 존재하길 바라는 신, 붉은 실로 묶여있다는 인연, 여전히 살게 만드는 의지, 옳고 그름, 양심, 간절히 바라는 평화, 평안, 연대, 집단지성, 선한 영향력......

  

  상상력이 빈곤하고 어리석은 인간이라 그런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존재함을 믿고는 있지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눈에 보이는 것들이 더 크고 선명하게 느껴지고  힘이 될 때가 있지 않던가.


   우리는 상대방이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도록 보여주고 말하고 표현해야 한다. 가능하면 자주, 많이, 열심히, 꾸준히 말이다.


  사랑하는 에게 사랑한다고 소리 내어 말하고, 웃어주고, 손 잡아주고, 온전히 느낄 수 있도록 아낌없이 사랑을 표현하면 좋겠다. 내가 얼마나 당신을 사랑하는지, 그리고 당신의 사랑을 원하는지, 그래서 지금 얼마나 행복한지 말이다.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볼 수도 없는 그 마음 앞에서 머뭇거리고 애쓰지 않도록 나와 당신은 서로가 알아볼 수 있게 사랑을 실컷 보여주면 좋겠다. 표현하는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제때 전하지 못한 마음을 부끄러워해야 한다.

  

 불안과 걱정, 갖가지 어두운 감정도 꺼내어놓고 자신에게 제대로 보여주면 좋겠다. 한구석에 팽개쳐놓고 들여다보지 않은 불안과 걱정과 자잘한 감정들은 내 몸을 갉아먹고 내 영혼을 잠식할 게 분명하다. 외면하지 말고 회피하지도 말고 그때그때 햇빛도 쬐어주고 바람도 쐬게 하면서 한참을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아야 한다. 혼자서 해결할 수 없다면 믿을 수 있는 다정한 이에게 보여주고 도움도 요청해야 한다. 결심과 의지도 그냥 두지 말고 글로 쓰든 일기를 쓰든 표현하면 좋겠다. 표현된 결심은 더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오늘도 일상을 묵묵히 살아내는 주변의 동료와 친구들에게 따뜻한 응원과 지지를 보여주면 좋겠다. 아파하는 이들에게 당신의 슬픔을 내가 알고 있다고, 그러니 혼자라는 생각으로 더 이상 고통스러워하지 말라고 알려주어야 한다. 그래서 일 년에 단 하루만이라도 여전히 당신의 슬픔에 공감하는 사람이 있노라고 노란 리본 하나 담담하게 달면 좋겠다. 예쁜 꽃을 보고 마음이 흔들렸다면 소중한 이들도 볼 수 있도록 공유 버튼 한번 꾹 눌러보면 좋겠다. 그저 먼발치에서 서로의 안녕을 기원만 할 게 아니라 오늘은 당신이 보고 싶다고, 당신이 잘 지내면 참 좋겠다고, 별 거 아닌 인사를 건네면 좋겠다.

  

  어쩌면 그림책 속 앞을 보지 못하는 소년보다 눈을 뜨고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제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우리가 더 안타까운 존재일지도 모른다. 적어도 소년은 자신이 보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고 보고 싶은 것을 찾기 위해 길을 나섰지만, 우리는 우리의 삶에서 무엇이 중요한지도 모른 채 평생을 놓치고 살고 있다면 말이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이기적이고 게으른 마음에서 비롯된 것은 아닐까? 온전히 다른 개체가 서로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이해할 수 있으려면  먼저 내 마음을 솔직하게 들여다볼 줄 알고 다른 사람에게 조금이라도 곁을 내어주고 보여주어야 한다. 보여주지 않고 내 마음을 알아달라는 욕심은 이제 그만 접어두고 하루에  일 분이라도 전하고 싶은 마음은 기꺼이 전해보자.


  혹시 아는가? 나와 당신의 그 마음들이 모이고 쌓이다 보면 바람을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는 날이 올 지도.....

  

  그때 내가 보는 바람은 당신의 반짝이는 웃음과 순한 눈매를 닮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져본다.

 소년은 

 부드러운 바람을 느꼈어


덧붙이는 글 :

 하나. 칠십 년 하고도 몇 해를 더 살아온 우리 아버지의 말투와 표현이 달라지는 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아주 가끔씩 아버지가 먼저 내 안부를 묻고 밥 잘 챙겨 먹으라고 전화를 하신다. 아버지를 닮은 무뚝뚝한 딸도 너무너무 쑥스럽지만 일 년에 한두 번 어버이날과 당신의 생신날에 용기를 짜내고 짜내어 사랑한다 말하고 부리나케 전화를 끊는다. 어색하고 민망하지만 그래도 하길 잘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다음에 표현할 때에도 진땀을 뺄 게 분명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볼 수 없는 마음을 그렇게라도 서로에게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래서 더 애잔하고 더 많이 애틋하다.


  둘. 그림책 <바람은 보이지 않아>는 얇고 섬세한 요철로 장면마다 공들여서 바람을 표현하고 있다. 그렇게라도 보지 못하는 이들에게 바람을 선물하고자 애쓴 마음이 느껴져서  더 아름답고 슬프다.


  셋. 소년의 질문에 무심히 대하던 비와 새의 모습이 살짝 내 모습 같아 보여서 따끔따끔 찔렸다. 


  그림책 <바람은 보이지 않아>는 얀 에르보가 그리고 썼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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