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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달다 Aug 05. 2023

마음 가는 대로 노래 불러도 된다고

그림책 <노래하는 꼬리>를 읽고

   아버지의 꼬리

                                     안상학

   딸이 이럴 때마다 저럴 때마다   

   아빠가 어떻게든 해볼게

   딸에게 장담하다 어쩐지 자주 듣던 소리다 싶어

   가슴 한쪽이 싸해진다

   먹고 죽을 돈도 없었을 내 아배

   아들이 이럴 때마다 저럴 때마다

   아부지가 어떻게든 해볼게

   걱정 말고 네 할 일이나 해

   장담하던 그 가슴 한쪽은 어땠을까

  

   아빠가 어떻게든 해볼게

   걱정 말고 네 할 일이나 해

   딸에게 장담을 하면서도 마음속엔

   세상에서 수시로 꼬리를 내리는 내가 있다

   장담하던 내 아배도 마음속으로

   세상에서 무수히 꼬리를 내렸을 것이다


    아배의 꼬리를 본 적이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도 아배의 꼬리는 떠오르지 않는데

    딸은 내 꼬리를 눈치챈 것만 같아서

    노심초사하며 오늘도 장담을 하고 돌아서서

    가슴 한쪽이 아려온다 꿈틀거리는 꼬리를 누른다


  눈길이 멈추는 시(아버지의 꼬리, 안상학)를 읽다가 예전에 봤던 그림책 <노래하는 꼬리>가 생각나 다시 책장을 펼쳐본다. 그림책 <노래하는 꼬리>의 이야기는 아주 작은 마을에 살고 있던 이반의 엉덩이에 갑자기 꼬리가 생기는 것으로 시작된다. 놀란 이반이 어떻게든 꼬리를 감춰보려 했지만 소용없었고, 급기야 꼬리는 목청껏 노래를 부른다. 이반의 부모님을 비롯한 마을 주민 모두가 나서서 꼬리를 뽑기 위해 힘껏 잡아당겼지만 꼬리는 끝도 없이 길어졌고, 사람들은 모두 마을 밖으로 사라지게 된다. 마을 사람들은 세계를 여행한 뒤 행복한 얼굴로 다시 돌아오게 되고, 그날부터 꼬리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마을의 소년 가까이에서 살게 된다.


  솔직히 말하면 맨 처음 <노래하는 꼬리>를 보았을 때는 이게 무슨 말이지 싶었다. 그렇지만 그림과 색감, 내용이 묘하게 매력적이라 이해가 잘 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마음에 오래 남았다.


  그리고 얼마 전 안상학 시인의 '아버지의 꼬리' 덕분에 다시 그림책 <노래하는 꼬리> 보게 되니, 예전에는 그냥 쓰윽하고 넘어갔었던 이반의 부모님과 마을 주민들의 얼굴을 자세히 보게 되었다.


  자고 일어나니 스타가 되었다는 사람도 있지만, 이반은 자고 일어났더니 난데없이 꼬리가 생겼다. 그것도 숨기려 하면 할수록 오히려 더 세차게 반항하고 제멋대로 구는 꼬리 말이다. 당사자인 이반이 당황하고 어쩔 줄 몰라하는 것도 안쓰럽지만, 그런 아이를 바라보는 부모의 마음은 더 아프게 다가온다. 꼬리를 보고 놀란 이반의 부모님은 소리를 지르고 주문을 걸고 화도 내보았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고, 곧바로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작은 마을의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함께 이반의 꼬리를 뽑기 위해 애를 썼다. 이반의 부모와 같은 마음으로 당황스러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소방관과 제빵사와 푸줏간 주인과 장의사와 담배 가게 주인과 과일 가게 주인, 신문 가게 주인, 마지막으로 시장까지 마을 주민 모두 힘을 합쳤다.

  왜?

  그들은 어른이니까.

  어린 이반을 위험한(?) 꼬리로부터 구해야 하니까. 그들이 알고 있는 상식과 삶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도 용납할 수도 없는 큰(!) 일이 벌어졌으니까. 일이 생기면 어떻게든 해결해야 하니까. 머리를 맞대고 힘을 합쳐서 일상을 회복해서 다시 살아가야 하니까.   


  다시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찬찬히 바라본다.


  

 이 작고 작은 마을에서 낡은 양동이 하나로 불을 끄고, 하루에 딱 세 덩이의 빵만 굽고, 작고 까만 미트볼을 만들어 한 달에 한 번 문을 열고, 보이지 않는 관을 짊어지고, 둘로 쪼갠 담배를 들고, 사과를 딱 한 개만 들고, 몇 주간 만든 것이라곤 한 쪽짜리 신문이 전부이고, 종이 모자를 쓴 그들의 표정은 걱정근심으로 가득 차 있다. 처음 보는 꼬리 앞에서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 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뾰족한 수가 없다. 그래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한다. 이반을 위해서 되든 안되든 부딪쳐 해결해야만 한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있는 힘껏 애쓰는  수밖에. 그래서 사람들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젖히면서 힘껏 꼬리를 잡아당겼다. 꼬리가 끝도 없이 길어져서 모두 마을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산과 들판, 사막과 바다를 건너 초록 평원과 노란 평원과 빨간 평원을 지나 지구를 돌 때까지 그들은 잡고 있던 꼬리를 결코 놓지 않았다. 한심하고 어리석어 보일 진 몰라도 그것이 바로 그들이 살아온 방식일 것이다.


  대단한 요령도 없고, 가진 것도 없고, 특별할 것 하나 없는 이들이 살아가기에 세상은 결코 녹록지 않다. 성실과 다정만으로 감당하기에는 힘에 부치는 순간들이 기어코 벌어진다.  부당하고 억울한 마음을 쏟아내기엔 눈에 밟히는 것들이 너무 많다. 그럴 때마다 꿈틀거리는 꼬리를 애써 내리고, 때로는 거대한 벽 앞에서 마음에 없는 꼬리를 치고 흔들어야 한다.


  그들에게 꼬리는 감추고, 숨겨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남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특히 나의 아이들에게는 절대 들키고 싶지 않은 서글픈 꼬리... 비록 나는 어쩔 수 없이 꼬리를 갖고 살아가지만 나의 아이에게는 결코 물려주고 싶지 않은 그 꼬리 말이다. 그래서 작고 작은 마을의 그들은 자기 일처럼 이반의 꼬리를 없애기 위해 애썼던 것은 아닐까? 세상 앞에 움츠러들고, 물러서고, 피할 수밖에 없는 그 서러운 마음을 아이가 알게 되고 무너질까 두려웠던 것은 아닐까?

  그들의 염려와 걱정이 아프게 느껴지는 건, 나도 그들과 같은 어른이 되었기 때문일까?

  

  여전히 세상 앞에 맨몸으로 서 있는 그들에게, 자신의 아픔보다 아이의 아픔이 더 고통스럽고 두려운 그들에게 꼬리는 내리고 사리기만 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려주고 싶다. 그림책 <노래하는 꼬리> 속 이반의 꼬리처럼 아름다운 목소리로 느긋하게 노래 부르는 꼬리도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가만히 꼬리의 노래를 들으면서 편안해하는 이반의 얼굴을 보여주고 싶다. 꼬리를 잡고 지구를 돌아 결국에는 마을로 다시 돌아온 사람들의 행복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


  그들의 두려움과 책임감을 토닥토닥해 주면서 그러니 혼자서 다 짊어지지 않아도 된다고, 그렇게 쓰지 않아도 된다고,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당신의 아이는 더 강할 수 있다고, 쉽지는 않겠지만 가끔씩 마음 가는 대로 노래 불러도 된다고, 그러다 보면 우리는 가끔씩 행복해질 수도 있다고 그들과 나의 불안에게 가만가만 이야기해주고 싶다.


덧붙이는 글:

  한참 동안 글을 쓴다고 앉아있다 보니 꼬리뼈 부근이 움찔움찔하는 것 같다. 나의 꼬리도 노래가 부르고 싶은 걸까? 아직은 좀 부끄러우니까 혼자 있을 때만 노래해 달라고 내 꼬리에게 슬쩍 부탁해 봐야겠다^^

  그림책 <노래하는 꼬리>는 기아 리사리 님이 쓰고, 비올레타 로피즈 님이 그렸다. 시 '아버지의 꼬리'는 안상학 님이 쓰셨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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