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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풍경달다 Sep 21. 2023

우리, 끝까지 모르는 척하지는 말아요

그림책  <슬픔에 빠진 나를 위해 똑! 똑! 똑!>을 읽고

  어렸을 때 나는 자주 전학을 다녔다. 새로운 환경에 겨우 적응하고 친구들을 사귈 때쯤 다시 전학을 가는 일이 반복되었다. 그때의 나는 정든 친구들과 이별해서 슬퍼하는 것보다 낯선 환경에 어떻게든 빨리 적응하는 것이 더 중요했던 것 같다. 새로운 친구들의 이름을 외우고, 어색한 학교 지리와 규칙을 익히느라 슬픔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그때 나는 슬프지 않았을까?

  아니면 참을 수 있을 만큼만 슬펐던 것일까?

  

  어린 시절의 기억을 찬찬히 더듬어봐도 혼자서 울었거나 친구와 헤어질 때의 아픔 같은 감정은 기억나지 않는다.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때의 기억이 다 휘발된 것인지 아니면 우리 엄마 말씀대로 인정머리 없는 아이였기 때문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그때의 내가 어떤 마음이었는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그림책 <슬픔에 빠진 나를 위해 똑! 똑! 똑!>을 보면서 겉표지의 아이 얼굴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암만 봐도 내 눈에는 슬퍼하는 게 아니라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고민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이 아이도 슬픔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일이 있는 걸까?

  어느 순간 그림책 속 미간을 잔뜩 찌푸린 아이의 얼굴에 어린 시절 내 얼굴이 겹쳐 보이기 시작한다.


  어쩌면 이 아이도 슬퍼할 겨를이 없나 보다.

  자신이 슬프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하는 것일 지도, 혹은 슬플 땐 슬퍼해야 한다는 것을 모르고 있나 보다.


  슬픔은 뒷전으로 밀려나기 쉽다.

  이렇게 쓰고 나니 슬픔도 급한 것이 있고 안 급한 것이 따로 있나 싶지만, 당장 눈앞에 벌어지는 일들을 수습하느라 진짜 슬픔은 유예된다. 상을 당한 사람들조차 장례 절차를 치르는 동안 온전히 슬퍼할 정신은 없었다고 이야기들을 한다. 늘 쫓기듯 살아가고, 바쁘지 않으면 잘못된 것인 양 몸도 마음도 다그치는 세상에서 슬픔을 온전히 두고 볼 여유가 없다. 게다가 무겁고 심각한 것들로 굳이 스스로를 괴롭히고 싶지도 않다. 그냥 가볍고, 즐겁고, 명랑한 것들만 생각하고 살고 싶다. 그래서 슬픔은 다음 순위에도 끼지 못하고, 자꾸만 뒤로 밀려나다가 묻히고 잊힌다. 시간이 지나면 많은 것들이 해결될 것이라 믿으면서 그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우리는 다시 살아간다.

      

  그런 당신과 나에게 묻고 싶다.


  당신은, 나는, 정말 아무렇지 않은 것일까?

  시간이 지나면 슬픔은 저절로 지워지고 잊히고 사라지는 것일까?

  나의 슬픔도 당신의 슬픔도 그렇게 해결되는 것일까?     


  아이가 오두막으로 들어가 있는 동안 슬픔은 호수가 된다. 제대로 봐주지 않은 슬픔은 한 방울 두 방울 흐르고 흘러서 기어이 깊이를 알 수 없는 호수가 되어버린 것이다.  뒷전으로 밀쳐두었던 슬픔은 저절로 사라지지 않고 이렇게나 가까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 깊고 깊은 호숫가 옆 작은 집에 아이가 혼자 앉아있다.

  당신과 나도 지금 이 아이처럼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버린 슬픔 옆에 있지 않는가?

   

  깊고 깊어진 슬픔을 어떻게 해야 할까?

        

  슬퍼할 줄 모르던 아이가 자신의 슬픔 앞에서 똑! 똑! 똑! 눈물을 흘린다.

  비로소 자신의 슬픔에게 똑! 똑! 똑! 노크를 한다.


  안녕! 내 슬픔아!


  슬픔을 마주하는 아이의 모습이 애틋하고 대견하다. 그 커다란 호수 옆에 작은 집을 짓고 자신의  슬픔을 온전히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모르게 한숨이 쉬어졌다.


  호수만큼 커다란 슬픔을 마음속에 꾹꾹 누르고 있었을 아이는 얼마나 답답하고 막막했을까?

  자신의 슬픔을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한 아이가 제 몸보다 훨씬 커진 슬픔 앞에서 무섭지는 않았을까?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프다.


  하지만 제 슬픔을 정면으로 바라본 아이는 더 이상 도망치지 않고 호수만큼 커다래진 슬픔 옆에 집을 짓고 가만히 응시한다. 깊고 깊은 호수에는 어느새 별빛과 달빛이 일렁인다.

  

  그리고 아이는 기꺼이 슬픔이 남겨질 자리를 마련한다. 슬픔이 없어지길 바라는 대신 온전하게 슬퍼할 수 있는 자리를 남겨둔다. 언젠가 또다시 거센 바람이 불어와 호수를 뒤집고 아름다운 풍경이 사라질지도 모르지만 그때에도 아이는 바람이 지나고 물결이 잠잠해질 때까지 슬픔이 남겨질 자리에 앉아 기다릴 것이다. 다시 별빛과 달빛이 일렁이는 호수를 바라보며 담담하고 씩씩하게 슬퍼할 만큼 슬퍼할 것이다.  



  슬픔을 응시하는 아이의 모습이 외롭거나 불편해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다.

  아이가 스스로 슬픔을 마주할 수 있기까지 먼저 다가와준 작은 새와 나무가 여전히 아이 곁에 함께 있기 때문이고, 슬픔의 시간이 지나면 다시 이곳에서 웃을 수 있다는 것을 이미 아이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슬픔이 남겨질 자리를 남겨두었는가?


  이왕이면 내 슬픔이 마음 편히 슬퍼할 수 있도록 편안하고 따뜻한 자리를 만들고 싶다. 그곳에서 실컷 자고, 일렁이는 호수를 보고 물멍도 할 수 있게 오래 앉아있어도 편안한 의자도 두고, 그 옆에 예쁘고 푹신한 쿠션과 포근한 무릎담요도 가져다 두어야겠다. 계절이 바뀔 때면 벽에다 어울리는 그림도 걸어둬야지. 볕 잘 드는 창가에다가 초록초록한 화분도 몇 개 놓아두면 더 좋겠지. 작지만 따뜻하고 안전한 그 공간에서 내 슬픔이 목놓아 울고 싶을 때 실컷 울게 놓아두고, 가끔은 웃게도 만들어줘야지. 내 옆에서 오래오래 온전히 슬퍼할 수 있도록 충분히 기다려주고 안아줘야지.   

 

  당신과 내가 슬픔에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는 미뤄둘지언정 끝까지 모르는 척하지는 말자는 것이다. 

  유예된 슬픔 앞에서 이제는 눈물 흘리고 기꺼이 슬퍼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느새 호수만큼 깊어져있는 슬픔의 존재를 인정하자는 것이다.

  결국에는 온전히 슬퍼할 줄 아는 사람만이 타인의 슬픔도 알아보고, 똑! 똑! 똑! 닫힌 마음의 문을 두드려줄 수 있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전학을 자주 다녔던 어린 시절 나에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친한 친구들과 헤어져서 많이 슬펐지? 새롭고 낯선 환경에 무섭고 힘들었을 거야. 그럴 때마다 도망치고 싶고 소리 내어 울고 싶었던 내 슬픔은 당연한 거야. 부끄러워할 것도 꼭꼭 숨겨야 할 것도 아니지. 참느라 애썼어.(토닥토닥)

   오늘은 나랑 같이 마음속 저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는 슬픔을 꺼내보면 어떨까?

  오래 묵혀둔 내 슬픔을 조심스레 꺼내어 먼지도 탈탈 털어주고, 햇빛에 바삭바삭 소독(?)도 하고, 시원한 바람도 좀 쐬어준 뒤에 슬픔이 남겨질 자리에 편안하게 놓아두자. 여기에서 실컷 슬퍼해도 된다고, 가만히 쉬어도 좋고 그러다가 웃어도 괜찮다고 다정하게 말해주자. 그러면 오랫동안 혼자 두어서 심술 난 슬픔이 내게 슬쩍 미소 지어줄지도 모르잖아^^


  그림책 <슬픔에 빠진 나를 위해 똑! 똑! 똑!>은 조미자 님이 그리고, 쓰셨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아이의 집 문을 똑! 똑! 똑! 두드려준 나무와 구름과 작은 새와 바람에게도 감사하다. 덕분에 아이가 자신의 슬픔에 똑! 똑! 똑! 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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