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 단편소설
"많이 늙었다"
라고 시작하는 이 소설은 첫 문장부터 마음을 사로잡는다.
마흔 살에 등단한 작가. 그는 '많이 늙었다'는 그 첫 문장을 자신에게로 보낸 것일지도 모른다.
이 소설은 나이 마흔에 '나목'이라는 장편소설을 여성동아에 발표하면서 데뷔한 박완서 작가가 1971년 3월, 세상에 처음으로 내 놓은 단편소설이다.
이 소설로 당신과 나의 천국의 문을 연다.
까닭은
아직까지도 꿈의 가장자리를 서성거리며
이젠 늦은 것이 아닌가
모든 것이 헛된 욕망이 아닌가
스스로에게 자꾸만 자신이 없어지는 나에게
박완서 작가의 뒤 늦은 등단이 내뿜는 희미한 불빛이
나의 어두운 방의 붉을 언제나 밝혀주고 있기 때문이다.
인생의 어두운 골목길을 걸을 때에도,
나 자신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오로지 엄마로서의 삶만 허락되는
육아에 지쳐 허덕일 때에도,
흔들리는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에서 어딘가로 떠나는
잠깐의 여행 중에도,
이도 저도 아니고
나는 그 무엇도 아니고
모든 것이 엉망진창이고
언젠가 어디서부터인가 무엇이 꼬여
지금 이 지경에 이르렀나 싶어
잠 못드는 괴로운 밤에도,
나는 박완서 작가의 단편소설에 기대어 살아왔다.
하여,
나는 당신과 내가 만들어갈 천국의 첫번째 이야기로
박완서 작가의 첫 단편 '세모'를 꼽는다.
공무원의 아내로 쪼들리며 네 딸의 엄마로 살던 '나'는 막내 아들 인수를 사립초등학교에 보내놓고 담임 선생님께 밑보일까 걱정이 된다. 공무원이던 남편이 수완을 발휘해 서울 외곽 신도시에 식료품 점을 내 어느정도 가난을 벗어나자, '나'는 가난을 멀게 느끼며 부유층 틈에 끼어보려 애를 쓴다.
첫번째 스승의 날이 다가오자 '나'는 인수의 담임 선생에게 그럴듯한 선물을 하기 위해 고심하다가 현금보다 더 좋은 선물은 없으리라 생각하고 빈손으로 아들의 학교로 향한다. 그 곳에서 '나'는 밍크목도리를 두른 부유한 엄마들 틈에 기가 죽어 끼지 못하고 빙빙 겉돌다 그만 도망치고 만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 서점에 들렀다가 책장 한 켠을 가득 매운 위인전들을 보며 부조리함을 느낀다. 그리고 이 부조리한 세상에 너무 아름다운 낱말들은 어울리지 않는다 생각하며 눈 밭 위로 가래침을 내뱉는다.
지폐가 새로 탄생했을 때의 그 생경한 체질에서 차차 세파를 겪으면서 우아하고 원만하게 늙어갈 때의 체취는, 어떤 동식물의 체취하고도 안 닮은 착잡한, 그러나 비할 데 없이 구수한 것이다. -p.22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 문학동네]
밍크의 정교한 눈이 나를 말끄러미 보고 있는 것 같아 딴 데를 보려니 내 앞의 여자뿐 아니라 선생님을 둘러싼 여자들이 일제히 밍크를 두르고 있어 밍크의 노란 의안(義眼)들이 한결같이 나를 주시하고 있는 것 같다.-p.25
때 묻고 구겨진 돈들을 추리다보니 성한 돈이 별로 없다. 어쩌자고 게다가 맨 백원짜리 뿐이다.
처음으로 돈의 늙음이 추하고, 나는 그게 섧다.
나는 마치 절에 가실 때의 어머니처럼 돈을 매만지고 추린다. 오래오래 구겨진 곳을 쓰다듬는다.
매점 아가씨의 눈이 밍크의 눈처럼 깜짝도 안하고 나를 비웃는다.
될 수 있으면 아무도 못 보는 곳에서 이 일을 하고 싶다. 잔디 위 측백나무 밑에 앉는다. 다시 돈을 추린다. 어쩌면 한 장도 선생님 드릴 만한 돈이 없다. 나는 그래도 추린다.
오래오래 헛수고를 한다. 웬만한 새 돈도 자꾸 흐을 잡아 빼놓는다.
드디어 나는 왜 내가 이렇게 늑장을 부리며, 애꿎은 돈 타박만 하나를 안다.
나는 도저히 내 앞을 가로막은 밍크목도리를 뚫을 수 없는 것이다.
그 사이를 헤집고 선생님 앞에 봉투를 내밀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그것을 깨닫자 가슴이 답답하고도 아팠다.-p.33
한 지로 된 위인전이 눈에 띈다.
소크라테스, 링컨, 에디슨, 슈바이처, 퀴리 부인, 이순시, 김유신, 이율곡....소년들의 꿈의 인물들.
나는 그것을 흥정하려다 말고 그 책들이 와락 싫어진다. 마음이 좀더 어두워진다.
역경과 간난을 이기고 입신양명한 이야기들, 그건 적어도 스승과 제자, 스승과 제자의 어미 사이에 대화가 이썼던 때의 이야기인 것이다.
스승과 제자, 사람과 사람 사이에 그렇게도 질기고 추한 허세와 허위가 성새처럼 가로막고 있던 때의 이야기는 결코 아닌 것이다.
나는 내 아들을 돕지는 못할망정 기만할 수는 없었다.
돌아다오려다 말고 남편에게 줄 만한 것을 사볼까하고 선물용으로 된 아름다운 단행본 쪽으로 갔다.
수필집 소설 시집, 장정뿐 아니라 제목도 빼어나게 아름답다.
이렇게 아름다운 말들이 모두 우리말이라니.
그러나 지나치게 아름다워 꼭 밍크목도리 같다.
그 자신 생명도 없으면서, 죽었으면서, 요염하고 오만한 밍크의 허위.
이 책들은 남편에게 좀더 쓸쓸하고 좀더 미운 웃음을 웃게 할 것이다.
나는 사지 않는다.
어느 틈에 거리에는 눈이 오고 있었다.
나는 문득 작고한 어느 시인의 시가 생각나면서 가래침이 뱉고 싶어졌다.
"카악."
목구명을 크게 울렸으나 가래침은 나오지 않고 가래침은 그냥 고여있고 가래침이 고여 있는 자리는 답답하고 아팠다.-p.35
1971년의 일이다. 1971년의 일인데도 2016년의 우리들에겐 낯설지 않은 풍경.
자식을 키우는 부모의 마음은 다 같겠지만,
그 시절에도 똑같이 돈이 위세를 떨치고 있음이,
그 위세 앞에 요염하고 오만한 밍크의 허위가,
사람과 사람 사이 질기고 추한 허세와 허위가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나는 몹시 씁쓸하다.
박완서 작가가 살았던 1971년과
내가 살아가고 있는 2016년 사이
45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사람과 사람사이
씁쓸한 인간사는
그대로 인 것 같다.
그래도
살아있는 한
희망을 갖고 살아가야 하겠지.
그것이 살아남은 자들의 몫일거라고
그런 성실한 하루하루가 모여
이 세상 한 켠을 비추어줄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기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