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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올리브유 Apr 21. 2016

「어떤 나들이」,『월간문학』,1971.9

박완서 단편소설(2) 쇳물같은 엄마 노릇의 힘

박완서 작가는 작가이기 전에 엄마가 되었다. '엄마가 된다'는 이 한 문장이 무엇을 의미하는 지를 엄마가 되기 전에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이 세상에 가장 흔한 이름이 엄마이니까. 나에게도 엄마가 있고,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고, 엄마의 엄마에게도 엄마가 있었을테니까. 

그러니까 그 흔한 이름 뒤에 숨어있는 '엄마가 된다'는 동사가 무엇을 뜻하는지

나는 전혀 짐작조차 하지 못한 채,

그냥 자식을 낳았으니 이제 엄마가 되겠거니, 그렇게만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엄마가 된다는 것은

다름 아닌,

나를 완전히 버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적어도 나에게는.


여기서 말하는 '나'는

이제와 돌이켜보니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는 '자유의지'였다.

나는 몰랐다.

내가 그리 자유로운 사람이었다는 것을.

혼자 거리를 활보할 수 있는 자유.

카페에 들어가 차 한잔을 사 마실 수 있는 자유.

잠이 오면 잠을 잘 수 있는 자유.

보고싶은 친구를 만나 밥 한끼 사 먹을 자유.

꽃이 피면 꽃을 보러 가고

비가 내리면 잠시 창문을 열고 빗소리를 들어보고,

좋아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을 크게 틀어놓고 듣는 자유.

일상의 소소한 모든 순간이 바로 자유로운 순간이었다는 것을,

나는 엄마가 되고 나서야 알았다.


처음 갓난 아이를 품에 안았을 때에는

세상의 신비를 푼 것처럼

우주를 안고 있는 것처럼

신기하고 행복해 마음이 자꾸 벅차올랐다.


그러나 갓난 생명을 지키고 키운다는 것은

보통의 노력을 기울이는 것으로는 부족했다.

그것은 완전한 희생을 요했다.

완전한 희생이라 함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수면에서 배설까지-를 억눌러야 함을,

여자로서의 존재감의 완전한 상실을 의미했다.


나는 여자도 아니고 남자도 아닌 제3의 영역에서 온 미지의 동물이 된 것 같았다.

오로지 새끼를 죽음으로부터 지켜내는 임무를 수행하는,

그런 비장한 각오로 육아에 임했다.

매일매일이 전쟁같았다.

나는 떨어지는 포화 속에서 아이를 지키기 위해 이리뛰고 저리뛰며 고군분투하는

패잔병이 된 기분이었다. 


심한 산후우울증을 앓았던 것이다.

그렇게 내 자신을 모두 던져 구한 생명,

자식이라는 생명이,

어느 날 나를 몰라라 한다면,

엄마가 해 준 것이 무엇이 있냐고 묻는 다면,

더 이상 내 품에 안기려 하지 않는다면,

내 손을 떠나버린다면,

어떨까.


지긋지긋하고 벗어나고만 싶은 엄마 노릇에

길들여지고 또 길들여져

이제 엄마노릇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게 되었을 때에,

자식들이 엄마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면

어떨까.


그래, 나도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생생히, 노엽다고.

노엽다는 말은 서운하다는 말, 쓸쓸하다는 말, 외롭다는 말일 것이다.


자식들은 점점 자기안에 골몰해 갈 것이다.

패류처럼,

단단한 패각을 두르고.


그리고 박완서 작가가 그랬듯,

나 역시 그런 패류의 문을 열

불가사리의 촉수 같은 악착같고 지혜로운 촉수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나 역시 무위와 나태로부터 나를 지키지 못할까 두려울 것이다.

그 안일한 일상이 못견디게 불안할 것이다.

마치 암담한 늪처럼.




자식들도 아버지를 닮아 별로 말이 없고 내 보살핌을 아주 조금밖에 필요로 하지 않는다. 나는 내 자식들처럼 빨리 어른이 돼 버린 아이들을 아직 본 적이 없다.

  나는 그들이 어른이 된 날을 지금도 생생한 노여움을 갖고 기억할 수 있다.

(...)

그러니까 여남은 살부터 자식들은 내 보살핌까지 멀리하려 들더니 어느 틈에 패류(貝類)처럼 단단하고 철저하게 자기 처소를 마련하고 아무도 들이려 들지 않는 것이다.

 나에겐 패류의 문을 열 불가사리의 촉수 같은 악착같고 지혜로운 촉수가 없다. 나에겐 또한 남편이나 자식들의 것 같은 스스로를 위한 패각(貝殼)도 없다. 도저히 그들이 나에게 후하게 베푼 무위와 나태로부터 나를 지킬 도리가 없다.

일년에 한두 번쯤 상경하는 시골의 시어머니가 그 샐쭉한 실눈으로 나를 흘겨보며

 "쯧쯧, 어떤 년은 저리도 사주팔자를 잘 타고났노. 시골년이 금시발복을 해도 분수가 있지. 서방하고 잠자리하는 것밖에 할 일이 없는데도 밥이 주러운가 의복이 주러운가..."

나는 이 소리가 미칠 듯이 징그러울 뿐 추호의 이의도 없다. 팔자가 좋다는 건 얼마나 구원이 없는 암담한 늪일까?
p.40,『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문학동네.


어떤 나들이의 주인공 '나'는 이미 장성한 아들들과 무심한 남편의 뒤에 가려져 있는 주부다. 주부라는 이름에 가려져 있는 한 여자다. 그는 아무도 자신을 그다지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소외감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권태로운 일상 속에 차갑게 식어버린 쇠붙이 같은 자신을 발견한다.

그런 그녀가 잠시라도 인간으로서의 열정을 느끼는 순간은 찬장 깊숙히 숨겨둔 소주를 숨어 마시고 그 취기에 기대어 있을 때이다. 취기가 오른 채 화려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혼자만의 음주 나들이를 떠난다. 휘청이는 거리 위에서 '나'는 비틀거리다 넘어지기도 하고, 버스를 타고 아무 남자에게나 기대어 잠을 자기도 하고, 서울 시내가 내다보이는 공원에 올라 벤치에 앉은 청년에게 농을 치기도 한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자신이 얼마나 다시 뜨거워지고 싶은가를.

그리고 또 동시에 느낀다.

자신은

소주 한 병으로는 도저히 다시 용해될 수 없을 만큼, 차갑게, 단단하게, 굳어버린 쇠붙이같다는 것을.



점점 더 춥다. 대접만한 꽃무늬의 폴리에스테르 섬유는 가을 숲속에서 현란하지만 비정하다. 이 강인한 광물질은 사람의 옷이면서도 사람의 체온과는 무관하다. 나는 춥다. 

인제 내 내부의 땔감이 완전히 회진(灰塵)되었음을 나는 안다. 

다시는 그 천진한 즐거움도 뜨거운 격앙도 없다. 다 가버린 것이다.

열한 평의 틀에 부어진 채 싸늘하게 굳어버린 쇠붙이인 나를, 나는 똑똑히 자각한다. 이미 오래 전에 그렇게 굳어버린 것이다.

소주 한 병쯤이 굳어버린 쇠붙이를 다시 쇳물로-무한한 가능성을 잉태한 이글대는 쇳물로 환원시킬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소주 한 병이 그렇게 뜨거운, 냉혹하도록 뜨거운 열원(熱源)일 수는 없었던 것이다. 나는 다만 녹슬어가고 있을 뿐 이글이글 용해될 수는 도저히 없는 것이다. p.62,『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문학동네.



하지만 보라.

박완서 작가 자신이

얼마나 뜨거운 사람이었던가를.

소설속의 그녀는 차가운 쇠붙이였을지 모르나,

그런 쇠붙이 같은 엄마의 이야기를 대신 해준

박완서 작가 자신은

1971년의 이야기로

2016년의 엄마들을 위로한다.


다시 뜨거워지라고.

다시 이글이글

무한한 가능성을 잉태한 쇳물이 되라고.


계산해보면 등단 이후 평균 한달에 1편의 소설을 발표해온

왕성한 에너지의 소유자.

그 누구보다 열정적이고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가꾸어 갔던

박완서 작가의 힘은,


다름아닌


엄마의 힘이 아니었을까.

타인을 위한 완전한 희생,

자기 자신을 완전히 잊어버리며 오로지 하루하루 일상의 과제를 수행하지 않으면

도저히 돌아가지 않는 집구석의 충실한 종같은

엄마 노릇의 힘이 아니었을까.


그리하여 나는 이 밤,

수면부족과 만성피로를 이겨내며

나와의 약속을 지켜본다.

하루가 될 지 이틀이 될 지 모르겠지만,

먼 미래를 생각하기 보다는

오늘 하루를 생각하며,

매일 글을 쓰겠다는 약속을 지킨 나를 칭찬하며,


조금 더 충실하게

조금 더 성실하게

조금 더 밝게,

마음을 다잡아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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