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올리브유 Apr 22. 2016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틀니」,『현대문학』,1972.8

박완서 단편소설(3) 

그러나 한번 떠오른 생각을 다시 그 심층으로, 잠재의식 속으로 밀어넣을 수는 없었다.
P.72,『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문학동네.




나는 생각이 많은 아이였다. 한 번 생각을 시작하면 끝을 보고나서야 제풀에 지쳐 나동그라졌다. 자전거를 처음 배우는 사람처럼, 달릴 줄은 알았으나 멈출 줄을 몰랐다. 생각은 연기처럼 이리저리 형체없이 사방으로 피어나갔다. 생각이 뻗어나가는 것을 어찌 할 수가 없어, 나는 생각을 멈추기 보다는 차라리 뻗어나가는 생각을 조금 멀리서 떨어져 보는 쪽을 택했다. 그리하여 내 안에는 내가 있고, 내가하는 생각이 있고, 내가 하는 생각을 바라보는 내가 있었다.


  한 번 시작된 생각은 대부분 벽에 부딪쳐서야 끝났는데, 대부분 아팠다.

  아프지 않기 위해 나는 강해져야겠다 생각했다.

  강해지려면, 씩씩해져야 하고, 씩씩해지려면 밝아져야 하고, 밝아지려면 웃어야 한다고, 웃으려면 행복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증, 어쩌면 나는 행복해야 한다는 내가 만든 강박관념 속에 갇혀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불행해서는 안된다.

 타인을 부러워하는 것은 세상에서 제일 바보같은 짓이다.

 나는 행복하다.

 나는 나를 사랑한다.

 나는 강한 사람이다.

 나는 행복한 사람이다.

 나는 내 인생을 사랑한다.

 나는 언제나 합리적인 선택을 한다.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그 무엇도.


이런 종류의 자기 암시와 세뇌와 다짐 속에

나는 어쩌면

조금 불행해질 자유

나를 싫어할 자유

타인을 부러워할 자유

후회할 자유를 스스로 거부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조금 불행해도 괜찮은 것을.

조금 나를 싫어해도 괜찮은 것을.

가끔은 남을 부러워해도 된다는 것을.

인생의 모든 선택이 최고의 선택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조금 후회해도 괜찮다는 것을.


받아들이기에 나는 너무 여리고 약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틀니」는 박완서 작가가 세번째로 발표한 단편이다. 그 소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여직껏 얼마나 교묘하게 스스로를 이중 삼중으로 기만하고 있어나를.

 내 아픔은 결코 틀니에서 기인한 아픔이 아니었던 것이다.
P.87,『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문학동네.



기만. 남을 속여 넘기다.

나 또한 어쩌면 나를 수없이 기만해온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틀니」의 주인공은 이웃집 설희엄마와 친구가 돼 일상을 공유하며 살아간다. 마음 속으로 조금은 자신이 설희엄마보다 조금은 더 사는 꼴이 낫겠거니, 하며 지내던 어느 날 설희 엄마가 미국으로 이민을 간다는 소식을 듣는다. 평소 이민에 대해 부정적인 생각을 갖고 있던 나는 조금도 부럽지가 않다. 오히려 자신의 팔자가 더 편하다 여기며 설희 엄마를 공항에서 배웅한다.


"에이 지긋지긋해, 살아가기 말도 많고 탈도 많고 걸치적대는 것도 많은 놈의 세상...당신이나 나나 어디로 훨훨 이민이나 갈까?"


  나는 물론 반대했다. 이민이 어디 그렇게 떡 먹듯이 쉬우냐고 대꾸해줘도 되는 것을 마치 훤히 트인 이민길을 굳이 거절이라도 하듯이 모든 출국을 여행이건 유학이건 이민이건 이 나라에 돌아와서 봉사할 것을 전제로 하지 않은, 도피성을 띤 모든 출국을 맹렬히 매도했다. 그 동안 서르여덟의 찌든 여편네는 주체성이니 사대주의니 하는 어려운 말을 몇번이고 써가며 마치 금메달을 목에 걸고 태극기를 우러르는 올림픽 선수보다도 더 애국적이었다. P.87,『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문학동네.



  그리고 돌아와 누운 방바닥 위에서 비로소 깨닫는다. 자신을 괴롭혀온 통증은 서른여덟의 나이에 해넣은 틀니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를 교묘히 이중 삼중으로 속여온 자기 기만 때문이란 것을.



 틀니가 천근의 무게로 턱뼈를 눌러 꼭 턱이 떨어지고 말 것 같았다. 나는 손으로 턱을 받쳐도 보고, 슬슬 주물러도 보고, 더위먹은 짐승처럼 턱을 축 늘어뜨려 입을 헤벌리고 침을 흘려도 보았으나, 턱뼈가 부서질 듯한 동통은 조금도 덜어지지 않았다.

  몸의 온갖 신경이 턱뼈를 중심으로 방사선으로 전신에 퍼진듯, 중압감에 수반한 동통은 턱뼈에서 목구명으로, 귓속으로 골로 퍼져 내 두상은 완전히 틀니의 횡포가 지배했다.

  누가 이런 고통을 감히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P.85,『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문학동네.



  옴짝달싹할 수 없으면서도 펄펄 뛰지 않고는 또 못배길 것 같은 중압감과 동통은 여전하지 않은가? 이미 입 속엔 빼버릴 틀니도 없는데.

  빼버릴 틀니가 없기에 그 고통은 절망적이다.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여직껏 얼마나 교묘하게 스스로를 이중 삼중으로 기만하고 있어나를.

  내 아픔은 결코 틀니에서 기인한 아픔이 아니었던 것이다.

 나는 설희 엄마가 부러워서, 이 나라와 이 나라의 풍토가 주는 온갖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녀가 부러워서, 그녀에의 선망과 질투로 그렇게도 몹시 아팠던 것이다.

  나는 그런 아픔이 부끄러운 나머지 틀니의 아픔으로 삼으려 들었고, 나를 내리누르는 온갖 한국적인 제약의 중압감, 마침내 이 나라를 뜨는 설희 엄마와 견주어 한층 못 견디게 느껴지는 중압감조차 틀니의 중압감으로 착각하려 들었던 것이다.

  비로소 나는 내 아픔을 정직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나는 결코 내 아픔을 정직하게 신음하지는 않을 것이다. 정교하고 가벼운 틀니는 지금 손바닥에 있건만 아직도 나는 이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또하나의 틀니의 중압감 밑에 옴짤달싹 못하고 놓여진채다.P.88,『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문학동네.


나에게 말해준다.

조금은 강해진 내가

여리고 약하고 겁 많던 나에게.


조금 불행해도 괜찮아.

조금 후회해도 괜찮아.

조금 네 자신을 싫어해도 괜찮아.


그리고 또 이렇게.


삶은 계속되니까.

그게 끝이 아니니까.

끝날 때 까지는 끝난 게 아니니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