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연속되는 우연은 운명인가 아니면...

운명과 자유_자유 편

by 황태

봉세는 회사에서 근무하면서 모았던 돈과 할아버지께서 보태주신 돈을 가지고 광주로 내려갔다. 그의 부모와 달리 할아버지는 손자에게 공부하라며 쌈짓돈을 내어줄 수 있는 여유가 있었다. 바로 그 여유 때문에 자신의 아버지가 미래의 도움을 바라며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봉세는 할아버지의 도움은 감사했지만 자신의 아버지의 모습은 한심했다.


광주에 있는 전남대 로스쿨은 등록금이 저렴해서 그에게 알맞았다. 작은 원룸방을 전세로 얻은 후 그는 로스쿨 공부에 열중했다. 사랑했던 여자친구와 헤어졌고, 그동안 어울렸던 친구들과 연락을 끊었으며, 가족들과의 교류도 없었다. 자신의 모든 과거에서 떠나와 봉세는 드디어 불모지에 도착했다. 운명을 개척해 나가기 위한 첫 단계였다.


불모지 속 봉세에겐 부모님을 향한 반항의 상징으로 피워왔던 담배만이 안식이었다. 하루 세 번 담배를 태우기 위해 밖으로 나와 서성이는 시간 말고는 봉세에게 허락된 여가 시간이란 없었다. 봉세는 철저하게 자신의 운명을 향한 삶 이외의 것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리고 봉세는 고시에 합격했다. 당연한 일이었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찾아오는 것 만큼이나 당연했다. 봉세는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 작곡했다는 파가니니를 떠올렸다. 자신도 고시에 합격만 할 수 있다면 영혼이라도 팔 수 있다는 심정으로 공부하지 않았던가. 그런 그에게 고봉세는 고시에 합격했다는 말이 당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전남대 로스쿨에 졸업했다는 좋지 않은 스팩 때문에 봉세는 어떤 회사에 지원해야 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때 대학교 1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내왔던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자신이 다니는 회사에서 사내변호사를 모집하고 있는데 지원해 보는 것이 어떠냐는 제안이었다. 계속해서 그저 그런 로펌들만 지원하고 있었던 봉세였기에 친구의 추천으로 면접 보게 될 사내변호사 자리는 너무나 달콤한 이야기였다.


친구인 혜진이 자신에 대해 얼마나 이야기를 잘해줬는지는 모르겠지만 혜진의 회사에서 본 면접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필요한 순간에 찾아온 친구의 제안이라니. 이보다 더 운명 같은 일이 있을까 싶었지만 봉세는 이 또한 자신이 그동안 살아왔던 행실의 결과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잘 살아왔기 때문에 좋은 친구를 만났고 또 기회가 찾아온 것이 아닌가. 다가온 우연의 인과관계를 애써 스스로 설명하며 봉세는 1층 로비에서 혜진을 기다렸다. 면접을 보러 온 김에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와 잠깐 대화를 나눌 참이었다.


10분 정도 기다렸을 때 혜진은 여자 동료로 보이는 사람과 걸어오고 있었다. 함께 어딘가를 다녀온 듯했다. 평소 남들에게 무관심하고 또 무관심하려고 노력하는 봉세는 지나가는 사람이나 스치듯 대화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분은 정말 우연히도 봉세가 그동안 만나왔던 사람들 중에 제일 이상형에 부합했다. 봉세는 이렇게 의도치 않게 의도치 못할 상황 속에서 자신의 이상형을 만나게 되는 것이 묘했다. 무언가...... 이것은 무언가 봉세가 경험해보지 못한 류의 운명과도 같은 그런 것이었다. 이상형을 눈앞에 두고도 자신이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다는 것 또한 봉세에게는 익숙하지 않았다. 전 여자친구는 스스로 행동해 인연을 만들어 내지 않았는가.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우연과 우연과 우연.


혜진은 같이 온 동료에게 봉세를 자신의 친구이며 오늘 회사에 면접을 보러 왔다고 소개해주었다. 혜진의 동료는 봉세에게 살푹 눈인사를 하고 다시 회사로 돌아갔다. 봉세는 그 뒷모습을 눈으로만 계속해서 쫓았다. 그런 봉세에게 혜진이 물었다.

"봉세야 오랜만이다. 면접은 잘 봤어? 어땠어. 안 그래도 상무님이랑 팀장님이 너에 대해 얼마나 질문하셨는지 몰라. 관심이 있어 보이시길래 나는 좀 기대하고 있었는데, 너는 어떤 것 같아?"

"아 정말? 고맙다 혜진아. 덕분에 면접도 잘 본 것 같아. 이미 나를 마음에 드셔하시는 것 같더라고. 같이 면접 본 분들이 스팩이 좋아서 조금 걱정이긴 한데, 그래도 일 잘하는 나혜진이 말을 잘해줬으니 가산점이 붙지 않겠어?"

"농담하고는. 내가 뭐 해준 게 있다고. 넌 솔직히 네가 붙을 것 같잖아. 네 성격에 이미 확실히 준비하고 왔겠지."

"열심히 준비하긴 했지. 일단 내가 뽑고 싶은 사람이어야 뽑을 테니. 그래도 고맙다 혜진아."

"그래. 잘 됐으면 좋겠다. 아무튼 결과 나오면 연락해. 난 이만 일하러 들어갈게."


봉세는 다시금 우연이나 운명 같은 건 세상에 없다고 생각했다. 좋은 기회들이 찾아왔다고 해도 일단 봉세 자신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사람이어야 했다. 그렇게 스스로 계속 다짐하며 우연히 마주친 이름 모를 그분은 서서히 봉세의 머릿속에서 희미해졌다.


그리고 봉세는 혜진의 회사에 합격했다. 작은 증권사였고 서초동의 일반 로펌에서 받을 수 있는 초봉도 받지 못했지만 그래도 봉세는 만족했다. 안 그래도 자본시장법을 공부하고 싶었던 차에 연봉이 조금 성에 차지 않더라도 배우는 기간이라고 생각하면 됐다.


봉세는 태어나서 이보다 행복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는 부모로부터 벗어나 철저히 자립할 수 있었다. 전라남도 본가에 걸린 자신의 고시 합격 축하 플래카드, 먼 친척으로부터 걸려오는 상담 전화, 부모님의 생활비 요구 등이 자신을 두르고 있는 거미줄을 희미하게 비춰왔지만 봉세는 애써 무시했다. 곧 완벽한 자유를 찾을 것이다. 자신을 얽매는 사람은 이제 더 이상 없을 것이었다.


봉세는 혜진의 팀에 배정됐다. 공교롭게도 혜진 또한 법무팀의 직원이었던 것이다. 같은 법학과를 나왔으니 당연한 결과이긴 했지만 봉세는 신기했다. 평생 우정을 이어갈 친구와 한 팀, 그것도 옆자리에 나란히 앉게 되다니. 이것은 과연 우연인 것인가.


혜진은 친구가 많았다. 그녀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향을 지닌 친구들을 끌어모으는 능력이 있었다. 자신이 간택한 친구들과 매일 아침 커피를 사러 가는 시간이 그녀에게는 회사생활의 즐거움이었다. 그리고 그 친구들에 봉세가 빠질 리 없었다. 혜진과 봉세, 그리고 그녀의 친구들은 커피를 사기 위해 커피숍으로 향했다. 모두 조용한 사람들이었지만 각자 다른 개성의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 은은한 빛의 조화가 봉세는 사뭇 편안하게 느껴졌다.


그때 혜진이 한 사람이 더 올 것이라 말했다. 친한 동생인데 커피를 사러 오는 시간이 비슷해 항상 마주치곤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말과 함께 혜진이 반색했다.

"이수야! 얼른 와. 안 그래도 오늘 너한테 소개해 주고 싶은 사람이 있었는데 오늘도 마주쳤네?"

봉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녀였다. 자신의 이상형인 그녀가 걸어오고 있었다. 뒷모습을 눈으로 쫓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그녀였다. 33년 인생에서 단 한 번도 마주하지 못했던 이상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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