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자유_운명편
이수는 자신을 탐탁지 않아 하는 팀장이 상무로 진급할 때까지 4년의 시간 동안 자신의 필요를 입증하기 위해 완벽한 노예근성을 배웠다. 한 팀의 막내 사원에서 한 본부의 막내 사원으로서 일을 시키기 전에 알아서 일을 하는 법을 배웠고, 영업으로 바쁜 아저씨들을 대신해 회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관리하고 책임졌다. 제대로 된 실무를 알려주는 사람이 없어 옆팀 다른 직원분들께 배움을 동냥하며 일을 배워나갔다. 이수는 철저히 혼자였다. 원래 노예들은 윗사람과 어울리는 것이 아니었으니까.
이수는 자신에게 기선제압을 하던 팀장의 모습을 떠올렸다. 자신이 남자였으면 벌써 죽여버렸을 것이라고 엄포를 놓던 팀장의 모습에 상하관계는 확실히 맺어졌고 이수는 두려움이 각인된 채 눈치를 보며 묵묵히 일해나갔다.
자신을 사이에 두고 아저씨들 간의 유치한 신경전, 이간질 등이 이루어질 때도 지난 경험을 되살리며 꿋꿋이 중립을 지켰다. 그러한 시간들 속에서 이수는 20살의 자신이 얼마나 사회생활을 모르던 사람이었는지 알 수 있었고 더욱 단단해졌다.
비록 시작은 노예근성이었지만 4년 간 충성하며 일종의 신뢰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다고 생각한 이수의 뒤통수를 치는 일이 벌어졌다. 상무님은 항상 자신의 진급을 빌미로 삼아 자신이 꼭 책임지고 승진을 시켜주겠다고 호언장담을 했었는데, 이수의 직급년차에 팀이 300억 원이라는 큰 손실을 입으며 본부원 전원이 퇴사를 해야 하는 상황이 일어난 것이다.
퇴사가 결정된 12월 초 한 달간 상무님과 팀장님은 회사에 나오지 않았다. 남은 본부원들은 모두 자신의 살길을 찾기에 바빴고 홀로 정규직이었던 이수는 자신의 승진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임을 직감했다. 아무 일 없이 그저 출근만을 하며 회사에 나온 지 25일째 회사에서는 자신을 다른 팀으로 부서이동 시킬 것이라고 통보했다. 그나마 정규직이라 살아남은 것에 감사하면서도 한순간에 버림받은 듯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4년간 충성했던 시간은 그들에게는 그리 중요한 시간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수는 그렇게 승진이 누락된 채 새로운 팀에 발령 나게 됐다.
새로운 팀에 발령받으며 자신을 둘러싼 여러 소문들을 듣게 되었다. 처음 지점에서 한차례 소동이 일어난 후 자신에 대한 평이 좋지 않은 상태였기에 임원진이 새로운 팀장에게 자신을 받아도 괜찮겠냐고 걱정을 한 것, 자신이 좋은 팀에 갔었다며 4년 내리 자신의 욕을 하던 강미가 또 좋은 팀으로 간다며 욕을 한 것 등 다양한 소문들이 들렸다. 아무래도 좋았지만 자신의 흥미를 사로잡는 소문은 이것이었다.
자신이 가게 될 팀에는 원래 엄청난 빌런이 있었는데 자신이 들어가는 조건으로 빌런을 퇴출할 수 있었다는 모종의 딜과 관련된 소문이었다. 아 그래서 나름 좋은 팀이라고 이름난 이 팀은 나를 받은 것이구나 생각했다. 이 또한 참으로 운명 같았다.
그리고 이수는 그 빌런에게 인수인계를 받아야 하는 상황에서 아무런 인수인계를 받지 못했다. 빌런은 자신의 업무가 어떤 업무인지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이수는 결국 또 홀로 성장해나가야 했던 것이다.
이수는 표면적으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일을 꽤나 잘하는 편이었다. 하지만 빌런 덕분에 이수는 실수만 하지 않았는데도 손쉽게 일을 정말 잘한다는 평가를 얻을 수 있었다. 또한 그전 자신의 습관이 되어버린 노예근성의 모습이 현재의 팀장의 마음에 쏙 든 모양이었다.
콧대 높고 자신의 할 말을 다 할 수 있는 애기 엄마들이 모여있는 팀에 아저씨들의 완벽한 수발을 들던 직원이 들어온 것이다. 이수는 자신이 마치 군대를 제대하고 들어온 직원같이 느껴졌다.
떠돌이 생활을 청산할 때가 되었다. 이수는 이 팀에 최선을 다하기로 다짐했다. 업무의 홀로서기와 지독한 노예근성이 이수의 심신을 지치게 했지만 그래도 번듯한 일자리를 얻지 않았는가.
이수는 현재의 자리에 최선을 다하고 싶었던 만큼 잠시 잠깐의 돌파구가 필요했다. 원래라면 출근하기 전에 커피를 사들고 오겠지만 이수는 꿋꿋이 출근 후 급한 업무가 끝난 8시 20분경에 커피를 사러 나갔다. 이 시간은 절대 아무의 눈치도 보지 않을 것이라 다짐했다. 커피를 사 오는 10분의 시간은 빼앗길 수 없는 시간이었다.
마침 커피를 사러 나가면 예전부터 친하게 지냈던 타 팀 언니들을 항상 마주쳤다. 각자 커피를 사며 말장난하는 잠깐의 시간이 이수에게는 휴식과도 같은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하루들이 반복되고 반복되던 어느 날 언니들 사이에 한 남자가 보였다. 혜진언니에게 들은 정황상 언니의 친한 친구가 사내 변호사로 입사한 것 같았다. 이름은 고봉세라고 했다. 고봉 세는 하얗고 넓은 얼굴, 양 옆으로 작게 찢어진 눈, 그리고 높게 솟은 코, 앙다문 입술을 하고 있었는데, 딱 봐도 고집이 세 보였다. 그리고 그뿐이었다. 조금의 이성적 흥미도 생기지 않는 외모였으므로 이수는 살포시 눈인사만 한 뒤 시선을 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