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만들어 나가고 싶은 운명이 없을 때

운명과 자유_자유 편

by 황태

봉세는 자신에게 인사를 하는 이수의 모습에 시선을 고정했다. 살면서 자신이 원하는 이상형을 만난다는 것은 얼마나 힘든 것인가. 그런데 지금의 이 상황은 운명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단 한 번도 운명을 믿지 않았고, 심지어 운명은 자신이 직조해 나간다고 생각했던 봉세였기에 이러한 우연이 혼란스러웠다.


그래도 우연이 찾아온 지금 봉세는 다신 없을 기회와 마주한 것이 아닌가. 이제는 자신의 모든 것을 총 동원해 쟁취하면 될 일이었다. 자신이 변호사라는 꿈을 이루어 부모에게서 벗어난 것처럼. 회사라는 장소와 혜진의 친구라는 사실이 걸리긴 했지만 이내 그것이 자신을 가로막을 방해물이라는 생각에서 금세 벗어났다. 자유롭게 나아가는 것이다. 자신을 속박하는 것들이 있다면 끊어내면 될 것이었다. 아니 오히려 지금은 같은 회사라는 것과 혜진의 친구라는 사실이 반갑기만 했다. 어떻게든 친해질 기회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뒤로 며칠, 몇 주, 몇 달의 시간이 흐를 때까지 봉세는 이수와 가까워질 수 없었다. 아무리 매일 아침 만나는 사이라고는 하나 여럿이서 모이는 자리에서 심지어 혜진까지 있는 자리에서 봉세는 이수에게 호감이 섞인 말을 걸 수 없었다. 그리고 말을 걸 수 없었던 더 큰 이유는 이수가 자신을 쳐다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치 투명인간처럼. 자신은 이 자리에 속해 있지 않다는 듯이 이수는 자신에게 눈길 한 번도 주지 않았다. 그 모습에서 봉세는 절망감 마저 느껴졌다. 운명을 개척한다? 자신이 원하는 운명을 만들어 나간다? 자신이 원하는 운명은 이수인데, 그녀가 자신을 원치 않는다면 봉세에게는 개척할 운명이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세상 사람들은 자신의 이상형을 만났을 때에도 이렇게 바라보기만 하는 것인지 봉세는 궁금해졌다. 아니 이 넓은 세상에 이수 말고 자신의 이상형이 없는 것인지 궁금해졌다.


마침 32살의 나이와 사내 변호사라는 그럴듯한 명패 덕분에 물밀듯이 소개팅 연락이 오고 있는 최근이었다. 요즘 소개팅 시장에서는 남자가 귀하다고 하던데, 그러한 상황이라면 이수 말고도 충분히 자신의 마음에 꼭 드는 사람을 찾을 수 있을 테 였다.


봉세는 그 뒤로 한 달에 두 번은 소개팅을 나갔다. 30대 초반의 변호사, 의사, 검사 등과 소개팅을 하고 난 뒤 봉세는 자신과 비슷한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은 만날 수 없겠다고 생각했다. 특히 변호사는 더더욱 만날 수가 없었다. 업무가 끝난 후였음에도 업무와 관련된 이야기밖에 할 수가 없어 피곤함이 몰려왔다. 봉세는 그들과 자신 사이에 감정이 끼어들 만한 틈을 조금도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자신은 사람을 많이 가리는 사람이 아니었는가. 처음 만난 사람들에게 어떻게 감정이 생기는지 전혀 알 수 없는 봉세였다.


근 6개월 간의 18번에 가까운 소개팅을 통해 봉세는 한 가지 결론을 내렸다. 자신은 처음 만난 사람과 감정을 키울 수 있는 부류의 인간이 아니라는 것. 또는 새로운 사람들에게 눈길이 가지 않는 이유가 매일 아침 10분씩 마주치는 이수 때문일 수도 있겠다는 것. 봉세는 어디 한 구석에 끼어있는 듯한 밀폐감을 느꼈다.


시간이 흘러 11월이 되었고 회사에서 연탄봉사 지원자를 받는다는 공지가 올라왔다. 매번 자신의 팀장님만 봉사활동에 참여하셨기 때문에 이번에는 자신이 지원하겠다고 말씀드렸다. 마침 혜진도 함께 지원하겠다고 한 참이었다. 사내 봉사활동은 봉사활동이 끝난 후의 뒤풀이 때문에 악명이 높았다. 그래도 매번 자신의 팀장님만 사지로 내보낼 수 없는 노릇이었으므로 봉세는 마음을 다잡고 연탄봉사장으로 향했다.


노인들을 위해 무료 급식을 배식하는 급식실에서 사전 안내가 이루어졌다. 일회용 작업복과 장갑등을 배부받고 자신의 자리를 확인했다. 사전에 수령받은 이름표로 자신의 조를 확인한 참이었기에 2조가 서있는 줄로 향했다. 그리고 봉세는 기함을 찰 수밖에 없었다. 그 줄에는 이수가 서있었던 것이다.


자신이 이렇게나 하늘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던가. 또는 운명의 힘을 얻는 사람이었던가.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봉세는 헛웃음만 지었다. 마침 자신을 알아본 이수가 가볍게 인사했다.

"어? 안녕하세요. 대리님도 봉사활동 지원하셨네요?"

"아 네네. 저희 팀장님께서 항상 봉사활동에 나가셨던 터라. 이번에는 제가 지원했습니다."

"아~ 그러셨구나. 저도 뭐 마찬가지예요. 팀원분들이 대부분 애기 엄마들이셔서 눈치껏 제가 지원했어요."

"아하. 아. 혜진이도 같이 지원해서 왔어요. 다른 팀이라 같이 없긴 하지만요."

"아 그래요? 다행이다. 이따 뒤풀이에서 어색하진 않겠네요."

"네 그렇겠네요."


한차례 어색한 인사를 나눴지만 봉세는 감격스러웠다. 이수가 자신을 똑바로 쳐다본 채 말을 걸고 있다는 것이 봉세에게는 감동을 다가왔다. 서로의 시선이 닿을 때라면 가끔 다 같이 사진을 찍자며 혜진이 나섰을 때뿐이었다. 화면 속에서는 함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같이 있지 않는 듯한 긴 시간 끝에 처음으로. 단 둘이.


봉세는 봉사활동 이후의 뒤풀이가 너무 기다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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