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과 자유
이수가 일하게 된 곳은 지점 창구였다. 이수는 지난 면접 질문을 상기했다. 스스로 예쁘다고 생각하냐고 물어본 것이 지점에서 일할 직원이기 때문인가 싶었지만 이내 그게 무슨 상관이냐며 상념을 떨쳐냈다. 그녀는 주말 사이 엄마와 백화점에서 대거 구입한 정장을 입고 출근했다.
출근이란 무엇인가. 일을 하기 위해 회사로 가는 것이다. 일. 이수는 과연 그 일이라는 것을 어떻게 자신이 하게 될 것인지 궁금해졌다.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의 것이었다. 자신의 그 '일'이 회사가 돈을 주고 구입할 가치가 있는 것인가. 하지만 그 '일'을 열심히 배워보겠다는 의지는 뚜렷했다. 막판에 이 회사를 오고 싶지 않았다 하더라도 긴 싸움 끝에 주어진 운명 같은 곳이니까 잘해봐야겠다는 마음으로 가득 찼다.
'업무 매뉴얼을 주시면서 가르쳐 주시려나? 아니면 다른 회사처럼 연수기간이 있는 걸까? 3개월 간의 수습기간은 업무를 배우는 기간인 것인가?' 하지만 생각과는 다르게 이수의 회사는 체계가 없이 그저 그런 회사였다. 신입사원을 뽑으면 끝인 그런 회사.
무언가 힘이 없어 보이는 여자 팀장, 그리고 이수를 제외한 여자 팀원 2명은 손님이 올 때마다 자신이 어떻게 처리하는지 보라고 할 뿐 어떤 자료를 주거나 이해시키려 하지 않았다. 혼자서 살아남아야 하는 환경임을 이수는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그렇게 동냥을 하듯 일을 하나씩 배워나가다가 팀장이 한 달 만에 출근을 하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쉬쉬하는 소리 속에 우울증이라는 단어들이 묻혀있었다. 아직 일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 상황 속에서 그나마 일을 배우며 의지하던 팀장의 부재와 함께, 무지함 속에서 받아야 하는 업무 전화와 손님들은 이수를 불안하게 했다.
이수는 의지할 구석이 필요했다. 그래서 다른 팀원 두 명 중 하나인 강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했다. 이수는 매일 출근하자마자 강미가 좋아할 만할 칭찬을 했다. 꾸미는 것을 좋아하는 강미였기에 옷이나 장신구, 헤어스타일, 화장 등을 칭찬하면 됐다. 퇴근 이후에는 강미의 남편이 강미를 데리러 올 때까지 강미의 말동무가 되어주었다. 그리고 강미가 남편을 만나 퇴근을 하면 그제야 뒤늦게 퇴근했다. 이수는 이렇게라도 자신의 편을 만들면 그 편이 자신에게 의지할 구석이 되어줄 것이라 생각했다.
사실 의지할 구석을 넘어서 자신이 이곳에 존재할 만한 이유를 찾아야 했다. 아직 업무를 배우고 있는 수습직원의 상태에서 자신이 이곳에 꼭 필요할만한 이유를 만들기 위해서는 상사의 환심을 사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어 보였다.
강미는 이수가 말동무를 해줄 때 항상 2가지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남편이 자신을 얼마나 사랑하는지에 대한 자랑, 그리고 자신이 싫어하는 같은 팀 영업직원 지훈에 대한 뒷담이었다. 이수는 자신이 따라야 하는 상사가 타인에 대한 뒷담을 할 때 어떤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무한한 긍정과 동조만이 이수에게는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그녀는 다른 이의 뒷담에 동조하지 않는 줏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없었다. 학창 시절을 반추하며 줏대를 가지고 있어야 함을 알았다고 하더라도 은밀한 이야기가 큰 사건으로 번질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이수에게는 그저 퇴근 후에 강미와 둘이서 한 대화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 뒤로 시간이 흘러 불 같은 성미를 지닌 강미가 지훈의 행동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가 되었을 때 강미는 지훈의 행실에 대한 근거를 모아 지점장에게 일러 받쳤다. 그 행실에는 지훈의 공적인 태도뿐만 아니라 강미의 친구를 소개팅에서 저급하게 대한 지훈을 향한 악감정 또한 함께 담겨있었다. 그리고 강미가 지점장에게 제시한 근거 속에는 이수의 증언도 포함되어 있었다.
지점장을 통해 이 사실을 듣고 억울했던 지훈은 이수에게 잠깐 대화를 하자며 회사 앞 카페로 불러냈다. 지훈이 반박할 수 있는 가장 쉬운 근거가 이수였기 때문이다. 지훈은 자신에 대해 어떤 말을 했는지, 그 말을 한 것이 맞는지, 동조했는지 이수를 다그쳤다. 그리고 이수를 향한 지훈의 쌓여가는 다그침 아래에서, 지훈의 핸드폰이 이수의 말들을 녹음하고 있었다.
이수는 심장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자신이 왜 이렇게까지 곤란한 처지가 되었는지 알 수 없었다. 강미와 지훈의 싸움이 아닌가. 근데 왜 그 사이에서 이수가 논란의 중심이 되어 표면 위에 떠올랐는지, 이수의 말 한마디가 녹음을 할 정도로 중요해졌는지 이수는 알 수 없었다. 이수의 말 한마디에 상황을 뒤엎을 만한 무게가 실렸다. 그동안 잘 보였던 강미와 잘 지냈던 지훈에 대한 배신감에 치가 떨렸다.
그래도 지훈에게는 미안했다. 어찌 됐든 간에 자신과 잘 지내던 지훈이 이런 상황을 맞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수는 언제든 자신이 심판대 위에 올라 물려 뜯길 수 있음을 깨달았다. 이곳에서는 정신을 차리고 있지 않으면 언제라도 휘말릴 것이었다. 다행히 지점장은 자신의 영업 외의 사건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었기에, 강미의 소원과는 달리 지훈에게 주의 주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부풀었던 사건은 가라앉는 듯했지만 이수는 강미와 지훈 모두와 사이가 틀어졌다. 이수는 미운오리새끼가 되어버린 기분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
비워진 팀장 자리에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다른 사람들로 메워졌다. 이수는 총 4명의 팀장을 경험하게 됐다. 노처녀, 임산부, 우울증을 극복하고 돌아온 원래의 팀장 그리고 유일하게 괜찮은 사람이라 느껴졌던 한 명까지. 이수는 각기 다른 팀장들에 맞춰나가고 적응하면서 팀장을 어떤 한 사적인 관계의 사람이 아니라 공적인 성질의 생명체로 대해야 함을 깨닫고 연습하게 됐다. 좋은 말을 한 번 해주면 계속해 주어야 하는 의무가 생겼고, 그렇다고 애초부터 나쁘게 보일 필요도 없었다. 단지 좋음과 싫음의 감정을 숨긴 채 아슬아슬한 외줄 타기와 같은 직장생활을 이어나가면 되었다.
이수가 지점에서 근무하게 된 지 7개월 차에 강미가 드디어 이수의 5번째 팀장이 되었다.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 팽팽하지만 또 느슨한 강미와 지훈과의 대립, 자신과 공모한 줄 알았지만 마지막에 홀로 빠져 일을 수포로 만들었다는 것에 대한 강미의 원망 등이 섞인 복합적인 공기가 느껴졌다.
이수는 신경이 바짝 곤두선 채로 일해야 했고 일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강미는 트라우마의 전신이었다. 이수는 강미와 근무하는 매 순간 숨이 옥죄이는 것 같았다. 그것은 이수를 옥죄어 붕 뜨게 했고 3일에 한 번 꼴로 이수는 실수를 했다.
이수가 잦은 업무실수를 한지 한 달쯤 됐을 때 강미가 이수를 회의실로 호출했다. 퇴근 후 잠깐 남아 이야기를 하자는 것이었다. 3일에 한 번 꼴로 자잘한 실수를 하는 자신을 용서할 수 없었던 이수는 올 것이 왔다는 심정으로 강미가 있는 회의실로 향했다.
"이수야, 너 요즘 왜 그래? 너도 지금 네가 정신 못 차리고 있는 거 알고 있지?"
"네, 죄송합니다."
"나한테 죄송할게 아니라 정신을 차려야 할 거 아니야. 왜 자꾸 실수하는 건데. 마음이 뜬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죄송해요. 다음부터는 실수 없도록 하겠습니다."
"죄송하다는 말 좀 그만해. 진짜 죄송한 건 맞아?"
"네...... 정말 죄송합니......"
이수의 대답이 미처 마쳐지지 못한 채 끊겼다. 이수는 투명한 테이블 위에 뒤집어져있는 강미의 핸드폰에 알림이 뜨며 화면이 켜지는 바람에 녹음기가 켜져 있는 것을 보게 됐다. 이수는 대답을 마무리 짓지 않았다.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강미는 당황하며 혹시 모르니까 녹음한 것이라며 앞으로 잘하라는 말과 함께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혹시 모르니까. 강미는 뭘 몰랐을까. 이수가 혹시라도 자신을 신고할 수도 있다는 것? 그래서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녹음을 했던 것일까?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두 번의 녹음. 이수는 자신이 있는 이 자리에 소름이 돋았다. 자신이 비정상인지 이곳이 비정상인지 분간되지 않았다. 송두리째 늪 속에 파묻힌 기분이었다.
이수는 다음 날 지점장실로 향했다. 알 수 없는 광기가 이수를 사로잡았다. 또는 거대한 무언가가 이수를 떠밀었을 수도 있다. 이수는 지점장실을 바로 찾을 만한 위인이 아니었다. 담이 약하고 겁이 많아 눈치만 보고 참는 그런 류의 인간이었다. 그랬기에 이수는 흘러나오는 말소리가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대신 말해주는 것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이수의 두 귀 만이 이수가 말하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었다.
"지점장님, 바쁘신데 정말 죄송합니다. 혹시 잠깐 면담 신청해도 될까요?"
"면담? 어 그래 이수야. 일단 앉아."
"네, 감사합니다."
"하고 싶은 말 있으면 편안히 말해봐."
"다름이 아니라 부서이동을 신청드리고 싶습니다. 어떤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고요. 제가 이 팀에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지점장님은 살짝 당황하신 듯했지만 네 뜻이 그렇다면 알겠다고 하셨다. 가고 싶은 부서가 있는 건지 여쭤보셨지만 따로 없고 인사팀의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다. 지점장실에서 나와 이수는 동기들에게 부서 이동 신청을 했다고 말했다. 혹시라도 회사에 남는 자리 있다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는지 떠보기 위해서였다.
'도망치는 것은 부끄럽지만 도움이 된다'라는 드라마의 제목이 생각났다. 하지만 이수는 과연 이 벌어지는 일이 도망침이 맞는지 단정 지을 수 없었다. 평소의 자신이라면 절대 하지 못했을 과감한 부서이동 신청이었다. 심지어 직속 상사인 강미를 건너뛴 지점장과의 면담이었다. 이것은 도망침이 아니었다. 거대한 흐름이었다. 이수는 그저 그 흐름에 몸을 맡길 뿐이었다.
그 흐름이 하나의 소식을 물고 왔다. 마침 동기의 팀이 2개 팀으로 나뉘게 되어 나뉜 팀에서 막내 사원을 뽑으려 한다는 것이었다. 분명 지점장님이 아직까지 자리가 없어서 기다려야 할지도 모른다고 하셨었는데 이렇게 빨리. 이수는 흐름을 거부할 수 없었다.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지점장실을 찾아 동기가 말한 팀으로 부서 이동하고 싶다고 말했다. 지점장님은 이번에도 별 말이 없었다.
그 뒤로 인사팀장과 2번의 면담이 있었지만 이수는 왜 부서이동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뚜렷이 대답할 말이 없었다. 섣불리 강미를 언급하고 싶지도 않았다. 강미는 자신의 남편을 포함해 자신의 편들이 많았다. 그래서 일이 맞지 않는다며 눈물로 호소할 수밖에 없었다.
일이 맞지 않으면 회사에 왜 다니냐는 이수를 향한 비난 어린 소문이 전사에 맴돌았지만 이수는 아무래도 좋았다. 그저 그 구렁텅이 같은 곳을 떠나는 일에 집중했다.
그리고 마지막 난관, 강미와의 면담이 시작됐다.
"이수야 넌 내가 우습니? 어떻게 직속상사를 두고 지점장님께 바로 말씀드릴 수가 있어? 네가 그러면 나는 밑에 직원도 관리 못한 상사가 되는 거야. 알아?"
"죄송합니다. 제가 잘 몰라서 생각이 짧았습니다."
"그리고 너 가고 싶은 곳 딱히 없다고 하더니 영업팀에 가고 싶다고 했다며? 처음부터 영업팀 가고 싶다고 말을 했으면 내가 아 얘 좋은 팀 가고 싶어서 그러는구나 하고 이해라도 해보겠는데, 아닌 척 쓱 빼더니 뒤에서 몰래 지원하는 거야? 우리가 그렇게 우습니?"
이수는 어리둥절했다. 영업팀이 모두 가고 싶어 하는 선망의 팀이었던가. 저 질책은 분명 질투가 섞인 질책이었다.
대리 이상의 직급으로 승진하지 못하고, 성과급도 제대로 받지 못하는 지점에서 벗어나 본사 부서로 가고 싶어 하는 자신의 상황을 빗댄 선명한 질투였다. 하지만 별 상관없었다. 영업팀으로의 이동이 결정된 이상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피하고 싶을 뿐이었다.
거대한 흐름이 이수를 싣고 내려놓은 곳은 새롭게 팀장님이 될 영업팀장과의 면담 자리였다. 여자들 속에서만 일하다가 50대 아저씨와 마주한 이수는 긴장됐다. 이번에는 남자직원과 일하는 법을 배우는 것인가 생각하고 있을 때, 팀장이 말했다.
"안녕하세요, 영업팀장 심두환입니다. 이제 앞으로 같은 팀에서 일할 사이니까 미리 말 편하게 해도 되죠?"
"네 그럼요."
"그래 이수야 시작부터 이런 말 꺼내고 싶진 않았지만, 말을 해야 네가 더 진지하게 우리 팀에 임할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니 기분 나쁘게 듣지는 말아라. 나는 사실 너를 뽑고 싶지 않았어."
이수는 또 다른 난관에 봉착한 기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