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일상 고찰 03화

하이힐과 운동화

발을 피로하게 하지 말 것.

by 황태

하이힐을 오랜만에 꺼내보았다. 새로 산 바지가 기장이 너무 길어 운동화를 신으면 바닥에 끌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차피 수선을 맡길 참이라 잠깐 옷장에 넣어 놓으면 됐을 텐데 꼭 입고 싶었다. 새 옷의 기쁨은 쉽사리 거부하기 어렵다.


하이힐을 신고 기장이 긴 바지를 입으니 다리가 더 길어 보였다. 거울 속 비친 내 모습이 사뭇 마음에 들어 집을 나섰다. 그런데 집 밖으로 나와 2분 거리인 역까지 걸어가는 것이 너무 힘겨웠다. 심지어 살짝 늦었어서 뛰어서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는데, 굽 위에서 헐떡거리며 달려가는 것은 정말 극악의 고통이었다. 발 앞꿈치가 뭉개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게다가 그날따라 지하철에 자리가 잘 나지 않아 40분 정도는 서서 간 것 같다. 또 계단을 오르는 일이란. 이런저런 상상이나 생각들로 몸에 집중할 틈 없었던 지난 출근길과는 달리 모든 생각과 신경이 발에 집중되어 있었다. 진 빠지는 일이었다. 하이힐을 신고 출근하는 일이란. (아마 유난히 힘든 이유는 내가 평발이어서 그렇지 않을까 추측해 본다.)


오전과 오후가 흘러갔다. 퇴근할 때가 되어 다시 힐을 신자니 몸서리 쳐졌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신고 집으로 가서 당장 버려버려야지 다짐하며 퇴근했다. 지하철에 오르기 전 초콜릿을 샀다. 신경을 돌리고 지친 몸에 힘을 불어넣을 친구가 필요했다. 초콜릿과 야구에 기대 겨우겨우 집에 도착했다.


현관문에 도착해 하이힐에서 지상세계로 발을 내디딘 순간 너무 황홀했다. 아아.. 이런 행복이라니. 대신 온몸이 너무 피로해 빠르게 씻고 침대에 누웠다. 발을 앞 뒤로 비틀어보니 여기저기서 통증이 느껴졌다. 근육통인 것 같았다. 평소보다 극심한 피로감에 9시도 채 되지 않아 잠들었다. 고작 하이힐 하나에.


다음 날은 기필코 운동화를 신으리라 다짐하며 흰색 운동화를 꺼내 들었다. 그런데 평소보다 발이 무겁게 축축 쳐졌다. 운동화가 몇 켤레 없었기 때문에 큰맘 먹고 산 30만 원짜리 운동화였다. 슬랙스나 바지에 멋스럽게 신을 수 있는 묵직해 보이고 단정한 운동화였다. 묵직이라니! 어제 하루 종일 하이힐에 혹사 당한채 신으니 평소에는 느껴지지 않았던 발의 묵직함이 거슬렸다.



점심시간에 소화시킬 겸 회사 근처 쇼핑센터를 걸어 다녔다. 발에 매달린 묵직한 신발의 무게가 내 발을 계속해서 아래로 빠지게 했다. 늪 위를 걷는 것 처럼 힘들었다. 그때 무인양품이 눈에 들어왔다.


평소 치마를 즐겨 입는데 단화를 신으면 가죽에 살갗이 알레르기성으로 부풀어 오르거나 땀이 찬다. 샌들을 신으면 발에 땀이 많아서 계속 미끄러진다. (그래서 샌들도 정말 많이 사 보았는데 이건 신발로 보완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이참에 치마에도 신을 수 있는 단화 같은 운동화를 사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가격도 3만 원이라 신발치고 상당히 저렴했다. 그리고 신는 순간 깨달아버렸다. 아 신발은 패션이 아니구나. 신발은 하루를 더 편안히 연명하기 위한 도구이구나. 지금 나는 어떠한 신발도 편치 않는 상황에서 패션을 논할 일이 아니구나.


느끼지 않았는가. 하이힐을 출퇴근길에 잠깐 신었다고 바로 앓아누워버렸다. 2일이 지난 지금까지도 발 앞꿈치가 아프다. 발을 불편하게 하거나 무겁게 해서는 안된다. 발은 그 내딛는 걸음이 산뜻할 수 있도록 보송하고 가벼워야 한다. 나는 평생 가벼운 운동화를 신을 운명이다.


이제 다른 것에 욕심부리지 않으려한다. 오직 내 발의 평안과 안녕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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