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단 둘이 떠난 스페인여행
오전 7시 40분, 카탈루냐광장에서 집합해 몬세랏 수도원으로 이동하는 일정이었기에 숙소에서 7시에는 출발해야 했다. 혼자 또는 남편과 둘이 여행했었더라면 6시 반쯤 기상했겠지만 어른들은 아침에 여유롭게 준비하는 법이니까 5시 30분에 일어났다. 아빠는 아직 시차적응이 되지 않아 잠을 또 3시간가량 밖에 주무시지 못했다고 했다. 8-9시간을 내리 잠든 나조차도 너무 피곤했는데 3시간이라니. 스페인 여행의 최대 적은 시차와 음식이었다.
아침에 가져온 컵밥을 하나 돌리고 사과, 바나나, 감, 양상추를 잘라 요플레를 부어 샐러드를 만들었다. 컵밥마저 가져오지 않았으면 아빠는 살이 더 빠지셨을지도 모른다. (여행 후 아빠는 3킬로나 빠지셨으니까.) 비록 요리의 영역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마트에서 장을 보면서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됐다. 스페인은 과일이 저렴한 편이고, 사과와 감이 특히 맛있다는 사실이다. 그중에서도 감이 정말 맛있었다. 보기만 해도 떫은 대봉처럼 생겼으면서 씨 없이 부드럽고 달달한 최상급 감이었다.
패키지로 멀리 다녀오는 여정이었고, 몬세랏 수도원에서는 뷔페를 이용하지 않는 이상 간단히 샌드위치 등으로 요기해야 했기 때문에 평소보다 더 든든히 아침을 먹었다. 먹어봤자 과일을 조금 더 먹는 것이었지만 그래도 먹어야 살지 않겠는가.
스페인은 12월 한 달 중 1주일이 우기라고 하는데, 마침 그 주에 방문한 바람에 날씨가 꽤나 쌀쌀했다. 모두가 말하는 날씨 좋은 스페인을 상상하고 도착한 우리는 생각보다 추운 나머지 가져온 옷을 십분 활용해야 했다. 아빠와 나는 살기 위해 히트텍 위에 니트를 무려 두장씩 껴입었다. 평소라면 사진을 이쁘게 찍기 위해 추위를 어떻게든 참았겠지만, 참을 수 있는 추위도 아니었고 아빠와 떠나는 여행이니 유달리 옷에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래도 여행의 목적이 사진이 아니게 된 순간 체면을 버리고 여행에 깊숙이 빠질 수 있었다. 비를 맞거나 땀을 흘리는 것이 무섭지 않았으니까.
경보로 카탈루냐 광장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보니 하나 둘 한국어가 들려와서 집합 장소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먼저 이동할 곳은 몬세랏 수도원이었는데 검은 성모상을 볼 건지, 소년성가의 음악을 감상할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자유시간을 가질 건지 옵션을 고를 수 있었다. 고민하다가 아빠와 상의 후 자유시간을 가지는 옵션으로 입장권을 결제한 후 버스에 탑승했다.
3일 내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아빠가 걱정되어 버스에서 내내 아빠가 주무시는지 곁눈질했다. 눈을 감으시는 것 같다가도 처음으로 바르셀로나 시내를 떠나는 것이었기 때문에 아빠는 계속해서 풍경에 눈을 빼앗기시는 것 같았다. 그러다 내가 스르륵 잠에 들려할 때 나를 꺠우는 아빠의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들어 차창 밖을 바라보니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엄청난 크기와 높이의 바위산이 나타났다. 이런 걸 찍어야 한다는 아빠의 신나는 목소리를 들으니 덩달아 신이 났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마음이 무거웠다. 높은 산에 올라 경치를 바라보러 가는 날, 하필 비가 와 안개가 가득 끼다니. 금방 날씨가 좋아질 거라는 생각을 해보려 애썼지만 산을 오르면 오를수록 안개는 짙어졌다. 그때 가이드 분이 소년성가의 찬양을 틀어주셨다. 차창 밖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안개, 그리고 천사의 목소리를 상상하자면 이런 목소리일까 싶었던 찬양, 이 모든 것이 더해지자 참을 수 없는 안도감이 몰려왔다. 그래 지금 안개가 무슨 소용인가. 지금 당장 이렇게나 행복한데.
더 행복했던 점은 음악에 전혀 관심이 없는 아빠가 먼저 소년성가를 들어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고 하셨던 것이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가이드 분께 소년성가가 포함된 입장권을 다시 살 수 있냐고 여쭤보았다. 소년성가를 듣는 비용만 따로 결제할 수는 없고, 소년성가 듣기가 포함된 입장권을 다시 사야 한다는 말에 돈을 중복해서 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버스 안에서 들었던 그 거룩한 목소리가 마음을 유하게 만들어줬다. 그래 여기까지 왔는데!
가이드를 따라 몬세랏 수도원을 향해 긴 다리를 건너갔다. 비가 꽤 많이 와서 아빠와 혹시 몰라 챙겨 온 우산을 함께 쓰고 걸어가는데 안개가 너무나 자욱해서 산은커녕 가이드의 모습도 희미할 지경이었다. 다시 한번 산을 볼 수 없다는 생각에 아쉬우면서도, 이렇게 짙은 안개를 경험한 적이 없어 신기한 마음에 주변을 계속 두리번거렸다. 신비한 세계로 건너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몇 분 후 가이드님이 보이지 않는 안갯속 십자가를 가리키며 설명하시는데, 그 순간 바람이 불며 안개가 걷혔고 십자가의 모습이 저 멀리서 희미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아빠와 나는 불가항력적으로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는 말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절대 걷히지 않을 것 같았던 견고한 안개가 사라지는 순간 보이는 십자가라니. 너무 흥분됐고 너무 감사했다. 찬양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다시 수도원을 향해 걸어갔다.
수도원 내부의 성당을 방문한 후 자유시간을 주신다고 했다. 비가 오고 안개가 짙으니 순례길을 따라 십자가까지 갔다 오는 코스는 추천하지 않는다고 하셨지만 참을 수 없었던 아빠와 나는 무조건 순례길을 걸어보고 오기로 했다. 열두 사도가 조각된 성당을 구경하고 한 시간 30분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날씨가 궂어 사람들은 뷔페를 가거나 아니면 성당이나 박물관을 둘러보려는 듯했다. 아빠와 나는 일단 마트 안의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간단히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인스턴트 오일 파스타와 샌드위치, 크루아상을 고르고 추운 날씨에 얼어붙은 몸을 녹이기 위해 따뜻한 커피와 녹차를 샀다. 300ml쯤 되어 보이는 작은 컵에 담긴 커피와 차에 살짝 억울해지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게 어디인가. 비를 맞으며 걸었던 탓에 따뜻한 커피와 데운 인스턴트 파스타는 술술 들어갔다. 아빠에게 뭔가 제대로 된 한 끼를 아직도 먹게 하지 못했단 생각에 가슴이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간단히 식사를 하고 생수 한 병을 사들고서는 경보걸음으로 순례길을 향했다. 이슬비가 내렸고 안개는 여전했지만 비를 핑계로 아빠와 팔짱을 낀 채 안개 가득한 길을 걸어가는 것은 퍽 행복했다. 그리고 우리는 곧 이 안개가 걷힐 것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5분가량 걷다 보니 비가 잦아들어 쓰고 있던 우산을 접었다. 그리고 그 순간 우리는 함성을 질렀다. 안개가 빠른 속도로 가라앉고, 다시 채워지고 있었다. 산이 보였다가 가려졌다가 하는 신비로운 광경을 보며 자연의 위대함을, 그리고 그를 주관하시는 하나님께 경외감을 느낄 수 있었다.
한걸음 떼며 감탄, 또 한걸음 떼며 사진을 찍으면서 아빠와 나는 정말 많이 신났던 것 같다. 걷고 또 걷다가 십자가 첨탑을 두 눈으로 마주하고 나니 30분 안에 돌아온 길을 빠르게 되돌아가야 한다는 것이 떠올랐다. 소년성가를 감상하는 인원들이 만나서 한꺼번에 입장하기로 했기 때문이다.
땀이 나서 둘 다 겉옷을 하나 둘 벗어 둔 채로 우산을 번갈아 가며 들고, 1/3 밖에 남지 않은 물을 조금씩 나누어 마시며 빠른 속도로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막판에는 땀이 비 오듯 쏟아지고 목이 너무 말랐지만 쉴 수 없었다. 도착장소까지 5분을 남기고 아빠는 화장실에 다녀오시고 나는 빠른 속도로 물을 한병 더 샀다. 30초를 남기고 겨우 약속장소에 도착한 우리는 잔뜩 상기된 채로 소년성가를 듣기 위해 성당 의자에 자리 잡았다.
한 시간을 우중 등산을 한 터라 의자에 앉아있으니 아늑한 감정과 함께 온몸이 노곤해졌다. 그때 소년성가단원들이 입장했다. 아빠는 엄청난 감동을 느끼진 못하신 것 같았지만 나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털이 쭈뼛서는 듯한 감각을, 전율을 경험했다. 높고 둥근 성당을 부딪히고 메아리치는 깊고 커다란 파이프 오르간의 울림과 티끌이라고는 없는 맑은 소년들의 목소리, 그리고 화음. 영혼이 정화되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나는 하나님께 올리는 찬양에 정성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은 이렇게 최선을 다해 최고의 소리로 찬양을 드리고 있지 않는가.
성가를 듣고 버스로 가는 길에 꿀을 팔고 있는 가판대가 보였다. 아빠가 꿀을 엄청 좋아하시기도 하고 몬세랏 수도원에서 산 꿀은 질이 좋다는 가이드 말이 떠올라 재빠르게 10유로와 꿀을 교환한 후 버스로 뛰어올랐다. 시작부터 마무리까지 잠시도 방심할 수 없는, 그리고 한 순간도 안 즐거운 적이 없었던 몬세랏 수도원의 일정이었다.
이번엔 시체스로 향했다. 산, 그리고 바다 아빠가 좋아하는 자연투어였지만 시체스는 스페인 일정 중 최악의 장소였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음 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