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와 단 둘이 떠난 스페인 여행
전날 어금니 사태로 혼이 빠졌지만, 오늘의 태양은 또 뜨는 법이니까. 그래도 다행히 하루 종일 아웃렛만 다녀오면 되는 일정이었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이 얼마나 공교로운 타이밍인지. 그리고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아침에 평소처럼 컵밥과 샐러드를 먹으려 했지만, 이가 다친 아빠가 밥을 드시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 같아서 죽을 만들어보기로 했다. 옆방에서 아빠의 숨소리가 들려오는 걸 보니 다행히 주무시고 계신 듯했다. 삐꺽거리는 나무 마룻바닥을 최대한 조심히 걸어 부엌으로 향했다. 황태컵밥으로 어떻게 죽을 끓일까 하다가 일단 냄비에 물을 붓고 밥과 분말을 넣어 계속 졸였다. 죽은 태어나서 처음 끓여보는 건데, 실수했다간 당장 일용할 양식이 부족한 사태가 일어나기 때문에 쉬지 않고 죽을 계속 저었다. 다행히 죽은 제 모양을 갖춰 나갔다.
주무시고 계신 줄 알았던 아빠가 부엌으로 나오셨다. 잠을 여전히 길게 들지 못하셨다고 하셨다. 잠을 충분히 자고, 영양분도 제대로 섭취해야 치료한 어금니도 덜 아플 텐데 참 걱정이 됐다. 면역력이 떨어져서 더 통증을 느끼시는 것 같았으니까. 아니면 치료가 제대로 됐을 리 없다는 생각에서 오는 통증이었을지도 모른다.
간단하게 아침을 해결하고 밖으로 나왔다. 사뭇 가라앉은 분위기였지만 그래도 이렇게 일정을 소화할 수 있다는 사실이 감사했다. 그동안 카탈루냐 광장 인근만 맴돌다가 조금 더 멀리 걸어 나왔는데 동네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이 느껴졌다. 조금 더 부촌인 듯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청담동 주택가를 걷는 기분이었다.) 말끔하게 정돈된 모습의 건물들이 줄지어 있었고,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정부청사가 보였다. 아빠와 나는 옛 건물이 보일 때마다 구글 지도에 나온 명칭을 검색해 보며 이곳이 어디인지 확인해 보았다. 그리스 신전에나 세워져 있을 법한 조각상이 입구에 있는 건물은 대학교 부속 건물이었고 북유럽의 성처럼 지어진 건물은 공공기관이었다. 빠르게 목적지를 향해 걸어가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멈춰 서며 건물명을 찾아보는 과정이 즐거웠다. 우리들만의 보물 찾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예상치 못한 순간 엄청난 광경을 목격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파리에서 보았던 개선문과 비슷하게 생긴 독립문이 넓은 광장 위에 세워져 있었고, 그 양 옆으로 조각상들과 야자수가 줄지어 있었다. 돌로 이루어진 기다란 정원이었다. 그리고 그 뒤론 이제 막 떠오르는 주황빛 태양이 번져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남은 나날들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충분히 즐거워질 수 있음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멋진 광경에 기분이 좋아진 아빠와 나는 사진을 한 장씩 찍고 공원을 거닐다가 화장실을 한 번 다녀오기로 했다. 스페인에서는 생각보다 공중화장실을 만날 일도 없고 아무 카페나 들어가기 애매해서 스타벅스를 찾아갔다. 아빠에게 고열량을 제공해야 한다는 생각에 두꺼운 초코칩 쿠키 하나를 사고 먼저 화장실을 다녀왔다. 카페 문 앞에서 보란 듯 쿠키를 꺼내 들고 서있는 아빠가 보였다.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 혹시라도 왜 아무것도 사지 않고 가만히 서있냐고 물어볼 것을 걱정하신 것 같았다. 그 상황이 웃기면서도 슬프게 다가왔다. 항상 기대기만 하던 부모님께 의지할 구석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나는 이제 부모님의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드려야 한다.
목적지 인근의 터미널에 들어왔다. 한국사람들이 많이 모여있는 버스를 하나 발견했는데 버스에 오르는 길이 순탄치 않았다. 터미널 건물이 공사 중이라 버스가 있는 곳까지 건물을 통해 건너갈 수 없었고, 차도로 이동하려고 하니 안전요원분들이 이동하지 못하게 하셨다. 이도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중에 사람 1명이 겨우 지나갈 정도의 틈새 통로가 보였다. 그쪽으로 쓱 통과해 버스기사님께 표를 보여드리고 나서야 마음이 편안해졌다. 이러한 두려움과 스릴을 즐길 수 있는 상태가 되어야만이 온전히 여행을 즐길 수 있게 될까.
45분가량 이동한다는 말에 눈을 좀 붙이고 싶었는데 대화를 나누시는 무리와, 담배 냄새가 나는 무리가 있어서 도통 잠에 들지는 못했다. 전날에 큰일이 있고 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났고, 또 버스에서도 잠에 들지 못해 피곤이 절정인 상태에 아웃렛에 도착했는데, 10시 오픈까지 20분가량 시간이 붕떠서 추위를 꾹 참고 아웃렛 거리를 걸어 다녔다. 여러모로 컨디션을 회복하기 힘든 여정이었다. 이날의 목표는 어머님과 엄마의 버버리 패딩, 아빠의 양복 위에 걸쳐 입을 수 있는 경량패딩을 구하는 것이었는데 신혼여행 때 다녀온 아웃렛에는 재고가 없었던 기억에 긴장이 많이 됐다.
10시에 오픈 하자마자 버버리 매장에 들어가 어머님과 엄마의 경량패딩을 하나씩 골라집었다. 다행히 사이즈도 있었고 그날따라 70%가량 세일을 하고 있어서 좋은 가격에 구할 수 있었다. 이제 아빠의 패딩을 골라야 하는 데 고르기도 전에 걱정이 많이 됐다. 자신의 옷을 사야 쇼핑이 즐거운 법이지 맘에 드는 옷이 없을 때는 더욱 피로감을 느끼게 되기 때문이다.
버버리에서는 아빠 마음에 드는 패딩이 하나 있긴 했는데 사이즈가 너무 커서 수선을 해 입을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몽클레어는 너무 비싸서 한 바퀴 돌고 나왔고, 프라다는 사이즈도 없는 데다 엄청 비쌌다. 중간중간 다른 브랜드들을 들어가서 보려는데 남자 양복 패딩이 없는 곳이 태반이었고, 있더라도 애매한 브랜드거나, 예쁘지 않거나, 가격이 합리적이지 않았다.
아빠는 이제 단단히 지쳐 보이셔서 남은 시간은 없는데 구한 것은 없는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할까 하다가 마지막으로 대충 둘러봤던 몽클레어 매장에 들어왔다. 처음에 봤었던 대로 여성 의류가 가장 많았지만 안으로 깊이 들어가다 보니 한편에 작게 마련된 남자 경량패딩존이 있었다. 제일 인기 있는 듯한 패딩을 입어보았는데 사이즈가 없다고 해서 이제 포기해야 하나 상심하고 있는데, 저 구석에 패딩이 하나 보여서 잽싸게 꺼내보았다. 처음 입어보는 스타일이다 보니 정장에 걸치기 애매할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팔 쪽에 기다란 퀼팅 부분과 가슴팍에 사선으로 나있는 자크 때문이었다.
하지만 사이즈가 꼭 맞았고, 원래 아빠 옷을 입은 것처럼 너무 잘 어울리셨다. 문제는 원래 필요한 용도대로 양복 위에 입을 수 있을 것이냐 하는 것이어서 아빠는 망설이셨다. 가격을 듣고 나니 더 망설이셨다. 할인이 들어가지 않기도 했고, 비싼 옷을 자신이 입어도 되냐는 생각 때문이신 것 같았다.
하지만 아빠는 한 번도 그렇게 비싼 옷을 입어보신 적도 없고, 심지어 삼촌이 입다가 물려주신 옷을 매일 입으시다 보니 목부분이 해져서 새로 사러 온 것이었기 때문에 꼭 한 벌 사드리고 싶었다. 더 고민하시기 전에 당장 결제를 하고 점심을 먹으러 나왔다.
토마토 파스타와 크림 파스타를 하나씩 시켰는데, 토마토는 너무 물탄 토마토 맛이었고 크림은 너무 짰다. 한국에서 맛있는 파스타들을 먹고 또 집에서 만들어 먹다가 보니 참담했다. 난 한 번도 맛있는 음식을 대접할 수 없는 것인가. 이도 다친 터라 아빠는 눈을 감고 천천히 씹어 드셨고 나도 그 속도에 맞추다 보니 금세 배가 불렀다. 파스타를 한가득 남기고 아빠는 이제 너무 피곤해서 더 이상 못 돌아다니실 것 같다고 하셔서 예약한 패키지 상품에 서비스로 껴있었던 VIP라운지 이용을 위해 라운지를 찾아갔다.
라운지 직원분이 처음에는 메일을 보여달라는 둥 계속 입장을 안 시켜주셨었는데 관리자 분이 곧 대신 나오셔서 환영해 주셨다. 차도 따라주시고 과자도 주셔서 아빠는 소파에 몸을 간신히 기대 계셨고 나는 직원분의 안내에 따라 회원가입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늘 하루가 참 힘겹게 느껴졌지만 쇼핑백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한 시간가량 휴식을 취하다 돌아가는 버스를 타고 터미널로 돌아왔는데 비가 내렸다. 꽤 많이 내리는 비에 당황하다가 택시를 부르기로 했다. 세워져 있는 택시를 타기에는 뭔가 사기를 당할 것 같다는 생각에 카카오택시를 불렀는데, 한참을 기다려도 잡힐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는 몰랐는데 돌아와서 알아보니 카카오택시는 일본만 이용가능하다고 한다.) 그리고 우버 택시를 깔기에는 데이터 연결이 원활하지 않아서 고민 끝에 쇼핑백을 우산 삼아 지하철역으로 뛰어갔다. 우리의 첫 지하철이었다.
그동안 매번 걸어 다닌 탓에 지하철을 탈일이 없었는데 처음으로 지하철에 오니 표를 어디서 끊어야 할지 무엇을 끊어야 할지 갈팡질팡했다. 어렵사리 찾아간 매표기기에는 1회권이라는 옵션이 없어서 고민하다가 급한 대로 1일권을 끊고 지하철을 탔다. 소매치기에 대한 많은 영상들을 본 뒤였고, 우리는 로고가 큼지막하게 적힌 쇼핑백을 들고 있었기 때문에 길거리에서보다 훨씬 더 긴장이 많이 됐다. 긴장감에 소지품을 꽉 쥐고 몸에 힘을 잔뜩 쥔 채로 서있다 보니 너무나 피곤했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터덜터덜 집으로 걸어 들어왔다. 일찍 일정이 마무리 됐음에도 벌써 저녁이 되서 마트에서 장을 봐가지고 들어왔다. 또 다시 컵밥과 샐러드로 간단히 저녁을 마무리 했다. 일상에서도 쉬는 날이 필요하듯 여행에서도 쉬는 날은 필요하니까. 전날 큰일이 있고서 하루 쉴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그래도 좋은 옷을 찾을 수 있었음에 감사하며 하루를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