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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쓰는 디자이너 Jun 28. 2024

28년 지기 친구가 안녕을 고했다.

새벽의 차가운 공기

아기 낳고 힘들었던 것 중에 하나가 새벽 유축이었다.

새벽 수유는 아기와 함께여서 그나마 덜 힘들었는데, 새벽 5시에 하는 유축은 너무 추워서 일어나기가 괴로웠었다.


우리 집은 연식이 좀 있는 집이어서 전기량이 부족했다. 라디에이터 2대를 동시에 틀었더니 두꺼비집이 내려갔다. 어쩔 수 없이 거실과 방을 번가라 가면서 라디에이터를 사용했다. 아기가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서 방의 온도가 달랐다.

(중국은 바닥 보일러가 없다. 상하이에서 한국인이 많이 사는 지역에는 바닥 보일러 있는 집이 많이 있는데, 우리는 그쪽에 살지 않았다.)


중학교 친구 셋이 있는 카톡 그룹이 있다. 11월의 추운 어느 날, 친구 한 명이 그 단톡방을 나갔다.

고의가 분명했다.

-ㅇㅇ야, 그룹방을 나갔는데, 혹시 나 때문이니? 왜 나갔는지 이유를 물어봐도 될까?

-이제 내 인생을 나를 응원하고 나와 맞는 사람들하고 살기로 결심했어. 이제 서로 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새벽 유축을 하면서 그 친구와 짧은 대화를 읽고

또 읽었다. 28년의 우정이 잘라져 나갔다.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공기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다. 의식하지 않으면 기억하지 못하는 존재.

우리는 인생의 타임라인이 너무 달랐다. 그녀가 한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동안 나는 상하이에서 클럽을 다녔고, 내가 아기를 키워야 하는 시간이 왔을 땐, 그녀는 일을 시작했다.

서로가 섭섭한 것을 말로 표현하기엔 우리의 물리적인 거리가 너무 멀었다. ‘에이 뭐 이런 걸 말해. 좀 지나면 괜찮아지겠지.’하면서 넘겼던 말들. 나는 안다. 이건 누구의 잘못도 아닌 시간이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을.


가끔 새벽에 깨면 그때의 그 새벽 공기가 떠오른다. 차가웠고, 유축기로 빠져가가는 모유 속에 내가 빠져나가는 기분.


신생아를 품에 안고 종종 그녀를 생각했다. 아니 우리가 함께 했던 시간들이 떠올랐다. 처음엔 내가 누군가에게 버림받는 것 같아서 당황스러웠고, 창피했다. 내가 무엇을 잘 못 했었는지 과거의 페이지를 넘기고 넘겼다. 이런저런 생각이 들기 시작하면서 아쉬움도 미련도 남아있지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우정의 유통기한이 다 된 것뿐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슬프지만 슬프지 않았고, 미웠지만 미워하지 않았던, 수많은 좋았던 감정들은 가슴 한쪽에 고이 묻어두기로 했다. 28년의 우정의 시간이 아까워서 앞으로의 30년 시간을 마음에도 없는 사람과 보낼 수는 없는 없었다.


아기에게 집중해야 하는 시간을 다른 것들로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없었더라면 그 이별의 시간이 힘들었을 것 같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 생각들. 그곳에서 나를 빠져나오게 한 것은 아기였다. 생후 3주 된 아이가 나를 일으켜 세웠다.


이렇게 나는 엄마가 되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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