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논문이라는 편지
녹음기 앞의 아버지
아버지 옆에 앉았다. 정확히는 90도 각도로. 마주 보고 앉으면 부담스러울 수 있어서였다.
녹음기와 카메라를 설치하고, 연구 참여 동의서에 서명을 받았다. 간단하게 내 논문의 취지를 설명했다.
재일교포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 적은 많았지만 항상 식사를 하면서라든가 무언가를 하면서였는데, 인터뷰 방식으로 하는 건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평소와 다름없이 앉아 계셨지만, 우리 사이의 공기는 어색했다.
녹음 버튼을 누르는 손이 떨렸다.
박사논문을 위한 인터뷰였지만, 사실 나에게는 단순한 연구 이상의 의미가 있었다.
왜 아버지였나
내 전공은 사회언어학, 그중에서도 담화분석이다.
사람들의 대화를 분석하고, 그 배경에 어떤 사회적 문제가 있는지를 밝히는 연구다.
석사 때는 다른 주제들도 다뤘지만, 박사논문이라는 대작을 쓰게 되었을 때 다루고 싶은 주제는 명확했다.
재일교포.
이것은 내게 단순한 연구 주제가 아니라 라이프워크였다.
그리고 재일교포 문제에 대해 나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이 바로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재일교포 인권운동가다.
목소리 없는 재일교포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온 사람이다.
민단 활동을 통해 재일교포의 지방참정권 운동 등, 차별 철폐를 위해 힘써 왔고, 우리 지역에서는 재일교포 인권운동가로 알려져 있다.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 재일교포 문제에 진심으로 몸담고 있었다.
물론 고민이 없었던 건 아니다. 아버지를 연구 대상으로 한다는 것은 객관성 문제를 비롯해 여러 어려움이 따랐다. 하지만 그런 문제들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론으로 무장했을 때, 아버지는 오히려 가장 완벽한 연구 대상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가장 연구하고 싶었던 사람이 아버지였다.
한 사람의 개인적인 이야기에서 사회를 읽어내는 것이 내 연구 방식이었고, 그 한 사람으로 아버지만큼 적합한 사람은 없었다.
칼과 불
아버지의 활동은 때로 위험했다.
활동가로서 알려지면서 여러 사건이 일어났다.
민단에 도착한 우편물에 카터칼이 들어 있던 날이 있었다.
민단 사무실 앞에서 극우 단체가 확성기를 들고 소리 지르던 날도 있었다.
가장 큰 사건은 아버지가 운영하시던 회사 공장이 방화당한 일이었다.
불길이 치솟던 그날 밤, 물질적, 경제적 피해보다 우리 가족을 사로잡은 것은 공포였다.
다음에는 또 어떤 일이 일어날까. 어떤 위험하고 무서운 일이 기다리고 있을까.
얼마 후 범인이 잡혔다. 퇴직한 경찰관이었다. 역시나 극우적 사고를 가진 사람이었다.
아버지는 고민하셨을 것이다. 가족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른다고. 이 길을 계속 가도 되는 걸까.
그날 할머니와 어머니가 얼마나 무서워하셨는지 기억한다. 집 안의 긴장감, 침묵, 그리고 불안.
그래도 아버지는 굴하지 않으셨다.
우리 가족 모두 아버지의 결심을 응원했다. 두려웠지만, 옳은 일이라는 것을 알았으니까.
나는 그런 아버지의 뒷모습을 보고 자랐다.
매일 듣는 목소리, 그리고 알게 된 것
연구를 시작하고 나서 나는 매일 아버지의 목소리를 들었다.
녹음된 인터뷰를 반복해서 듣고, 한 문장 한 문장을 받아 적고, 분석했다.
그 말을 하실 때 아버지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왜 그런 표현을 선택하셨을까. 그 침묵은 무엇을 의미했을까.
연구를 하면서 나는 아버지가 왜 그렇게까지 활동에 열심이셨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민단 활동을 하시면서 1세들을 많이 만나셨다.
1세들 중에는 억울하게 살아가시는 분들이 있었다.
식민지 시대를 겪고, 해방 후에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고 일본에 정착했지만 일본 국적을 박탈당하고, 사회적 보장도 받지 못한 채 차별 속에서 살아오신 분들.
그분들이 한 분 한 분 세상을 떠나고 계셨다.
아버지는 생각하셨을 것이다.
'시간이 없다. 이대로 억울한 채로 돌아가시게 할 수 없다. 우리가 사회를 바꿔야 한다.'
동시에 또 다른 생각도 하셨을 것이다.
1세들은 이미 대부분 돌아가셨고, 새로 태어나는 세대들은 일본인과 결혼하면서 자연스럽게 일본 국적을 갖게 된다. 이대로 가면 재일교포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진다.
그렇게 1세, 2세가 돌아가시고 나면, 재일교포 문제는 그냥 '없었던 일'이 되겠지.
이 억울한 삶 자체를 아무도 기억하지 않게 되는 걸까?
그런 절박함이 아버지를 움직였다.
칼이 든 우편물도, 방화도, 그 모든 위협 속에서도 아버지가 멈추지 않았던 것은 바로 그 사명감 때문이었다.
억울함이 묻혀서는 안 된다는 신념, 그리고 3세, 4세, 5세인 우리 후손들이 더 나은 일본 사회에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다.
인터뷰 녹음을 들으며, 나는 그것을 알았다.
말하지 못한 것들
사실 나는 아버지에게 내 마음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이다.
아버지도 그러실 것이다. 한국식 부자관계가 그렇지 않은가. 우리 사이에는 늘 보이지 않는 거리가 있었다.
존경한다는 말, 알고 싶다는 말, 고맙다는 말을 직접 하지 못했다.
그래서 박사논문을 선택했는지도 모른다.
공무원이라는 내 직업상 직접적인 정치 활동에 제약이 있지만, 사실 나도 무언가 표현하고 싶은 사람인 것 같다. 아버지를 보고 자라서 그런지. 아버지는 아버지의 방식으로 목소리를 냈고, 나는 논문으로 목소리를 내기로 했다.
논문의 문장들 하나하나에 내 마음이 담겨 있었다.
존경합니다.
알고 싶었습니다.
당신의 싸움을 이해합니다.
저도 제 방식으로 이어가겠습니다.
말로는 한 번도 하지 못한 그 말들을.
이 논문은 사회에 던지는 나의 메시지인 동시에,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였다.
미완의 편지
사실 고백하자면, 나는 이 2020년도 박사논문을 아직 아버지께 보여드리지 못했다.
박사학위는 받았지만, 연구가 완성되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시간제한이 있어서 일단 제출했지만, 내 연구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래서이기도 하고, 또 어쩌면 부끄러워서이기도 하다.
두꺼운 논문집이 책장에 꽂혀 있다.
언젠가 이걸 아버지께 드릴 수 있을까. 아니, 드려야 할까.
어쩌면 이 논문은 영원히 미완으로 남을지도 모른다. 아버지께 전하고 싶은 말들이 너무 많아서, 논문 한 권으로는 부족해서, 계속 연구하고 계속 쓰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녹음기 앞에서 나눈 대화들, 매일 듣고 또 들었던 아버지의 목소리, 한 문장 한 문장 분석하며 느낀 것들.
그 시간들이 이미 나와 아버지 사이의 대화였으니까.
지금도 나는 아버지의 방식과는 다르지만, 내 방식으로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글도 그중 하나다.
말로 하지 못한 마음을 글로 쓰면서, 나는 조금씩 아버지께 다가가고 있다.
완성되지 않은 연구처럼, 완성되지 않은 편지처럼, 아직 끝나지 않은 우리의 대화는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