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만둔 건지 잘린 건지
1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그만뒀다.
그만두기 2달 전, 절반 이상의 동료들이 권고사직을 당했다.
뉴스에는 IT 업계 투자 시장이 위축되고, 정리해고 이슈가 핫했던 시기였다.
금리 인상으로 인해 금융 관련 업종이던 회사가 많이 힘들던 시기이기도 했다.
시장이 어떠하든 권고사직은 아무런 신호도 없이 통보되었고, 통보 다음날 동료들은 회사를 떠나야 했다. 그리고 회사의 유지를 위해 최소한의 인원만이 남았다. 나는 그 남은 인원중 한 명이었다.
아무런 복지도, 체계도, 사수도, 심지어 연차제도까지 없던 회사의 유일하게 좋은 복지는 동료들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 많았다. IT 업계엔 원래 이렇게 좋은 사람들만 가득한 건가'라는 착각을 할 정도로 함께 일하는 게 즐거운 사람들이었다. 업무적으로 만난 사람들에게 마음을 쏟지 않는 편인 내가 사람들을 떠나보내며 참 많이 울었을 정도이다. 정말 좋아하는 우리 개발팀 식구들.. 앞으로도 자주 만났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퇴직서에 결재받은 날짜와는 다른 날짜의 퇴직을 권고받았다.
1년 차가 넘어가면 발생하는 연차수당을 줄 수 없다는 이유였다. 받고 싶은걸 다 받을 수 없다는 말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크게 얼굴 붉히고 떠나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그렇게 떠나게 되었다.
이건 그만둔 건지 잘린 건지.. 기분이 참 이상하다.
회사의 재정문제
2022년 12월 갑작스럽게 강제 휴가가 통보되었다. 회사의 재정문제가 이유였다.
사람들을 떠나보낼 때와 같이 갑작스러웠으며 별다른 설명도 없었다. 갑작스럽게 쉬어야 한다는 말이 전부였다.
회사의 사정으로 사람들을 떠나보내야 할 때에도 벌세우듯 세워두고 퇴사 통보를 하였으며, 모든 것을 알고 있던 팀장님은 별일 아니라는 듯 팀원들을 대표실로 보냈다. 남은 사람들 또한 대표실로 불려 가 너희가 두 배 세배 일해야 한다는 격려 아닌 격려를 받았을 뿐이었다.
물론 충분한 설명이 있었다고 해서 쉽게 납득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나 또한 언제든 갑작스럽게 내보내질 수 있겠다.'라는 불안함을 갖게 했다.
나는 무얼 하는 사람인가
개발과 디자인이 전문직이라면 나는 말 그대로 잡부였다.
대표님은 기획자가 무얼 하는 사람인지 모르셨고(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 어필이 부족한 것도 문제였고 어필 방법도 잘못되다), 나의 팀장님은 '너는 전략 기획도 하고 서비스 기획도 해야 해'라고 말씀하시며 정부지원과제 사업계획서를 쓰게 하셨다.
회사의 비전도 목표도 방향성도 아이템도 없이 사업계획서를 작성하기 위한 소설을 썼다. 내가 생각한 BM이나 아이템을 쓰고 내용이 괜찮은지 정도의 검토를 받았다. 대표님께 사업계획서를 가져다 드리면 이걸 가져오면 어쩌란 거냐고 물으셨고, 난 모르겠으니 알아서 하라고 말씀하셨다.
서비스 기획을 아주 안 한 것은 아니다.
화면을 그리고 서비스 정책을 만들었다. 하지만 회사 방향성의 부재로 정책과 화면은 자주 바뀌어야만 했고 나는 마치 생각 없이 정책을 만들어 개발자를 힘들게 하는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 밖에도 이게 기획자로서 해야 하는 일인가.. 에 대한 많은 일들을 해왔다.
물론 스타트업이기 때문에 인력이 부족하고, 그것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해왔던 일들이 중요한 자산으로 남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주니어 기획자로서 잘 성장하기 위한 좋은 조건이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다양한 업무의 경험
다양한 업무를 경험한 것은 떠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날 성장시킨 요소 중 하나이기도 하다.
입사 당시 스타트업이라는 단어는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끊임없이 성장할 수 있는 지름길로 걸어 들어간다고 여겼다.
언젠가 법인을 운영하고 싶은 사람으로서 운영과 인사, 자금조달 방법 등 다양한 분야를 경험하고 싶었다. 때문에 투자 관련 콘퍼런스도 가보고 다른 회사의 발표자리에도 참석해 보았다.
사업계획서 작성 방법 강의도 들으러 가보고 직접 투자자들에게 IR 피드백도 받아보았다.
물론 운영진이 원치 않는 방향이었기에 추진해보지 못했지만 주니어 기획자로서 경험해보지 못할 많은 것들을 경험해 볼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물론 당시에는 배우면서도 이걸 왜 내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양한 업무들로 인해 얻은 결론은 회사는(스타트업은)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해야만 한다는 것. 이 한 문장을 이해하는데 참 오랜 시간이 걸렸다.
스스로 하는 성장
사수 없이 혼자 성장하며 힘들었던 것은 부족한 부분을 스스로 인지하는 것이었다.
업무를 잘 해내는 것보다 나를 객관적으로 돌아보고 모자람을 받아들이는 것이 참 어려웠다.
그동안은 누군가가 나를 가르쳐주었고, 부족한 부분을 알려주었기 때문에 홀로 문제에 직면했던 경험이 확실히 부족했다.
하지만 부족한 경험에 비해 기획자의 업무 영역은 너무나도 방대했고 알아야 하는 것 또한 많았다.
도대체 무엇부터 손대야 할지 몰랐던 나는 우선 닥친 일들부터 하나씩 해결해 나갔다.
당장 실무에서 도움을 받고 싶었던 내게는 책 읽을 시간보다는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급했기 때문에 퍼블리나 요즘 IT, 디스콰이엇, 서핏, 메일리를 하루가 멀다 하고 뒤적거리고 기획자, PM 분들이 많은 카카오톡 단톡방을 통해 많은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동안은 누군가 나를 가르쳐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하는 성장은 더디기만 할 뿐 큰 의미는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문제에 직면하여 스스로 해결하려고 노력했을 때 가지는 성취감과 배움은 누군가에게 배우는 것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서버에 대한 이해
회사에서 마이데이터를 준비하며 온갖 보안 관련 지침을 재정했다.
도움을 받을 사람도 없었지만 도움을 줄 수 있었다고 해도 모두가 너무나 바빴다.
도움을 요청하면 CTO님께서 전반적인 설명을 해주시기는 했지만 문서를 만들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정부기관과 대학교의 지침들을 참고해 정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은 정말 새로운 배움들로 가득했다.
나는 앞으로 새로 시작하는 스타트업에서 자리를 잡고자 한다.
일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을 모으고자 하는 대표님의 밑에서 우리의 서비스를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과 함께 일해볼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내가 만드는 서비스에 빠져서 지내보고 싶다는 작은 꿈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번 회사에서는 그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 같다. 내가 푹 빠진 서비스의 개선점을 밤낮으로 고민하고 같이 논의할 수 있는 환경에서 더 많은 문제를 해결 나가보고 싶다.
그리고 퇴직자들과 함께하는 사이드 프로젝트를 통해 개발 프로세스에 대해 이해하고, MVP의 중요성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사용자의 피드백을 받아 서비스를 개선해 나가는 경험 또한 병행해보고자 한다.
또 하나. 나에 대해 더 많이 들여다보고 고민하여 내가 진정하고 싶은 일과 이 일을 하는 이유에 대해 정리하는 시간 또한 가지려고 한다.
2023년은 아주아주 바쁘게 보내며 큰 폭으로 성장한 나를 마주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