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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mille Feb 27. 2024

Next Stop...버스는 간다

영어로 보는 삶의 풍경 #18


미국 유학 시절, 버스에 관한 두 가지 에피소드....


#1

우리 대학 스쿨버스는 아주 독특했다. 엔진과 바퀴, 운전대와 좌석 등 자동차의 뼈대만 갖춘 그 각진 버스는 대학 로고만 박혀있을 뿐, 70년대 영화에서 걸어 나온 스쿨버스나 죄수 호송차량처럼 레트로 그 자체였다. 날렵한 외모로 거리를 누비는 일반 메트로 버스와 달리, 돈 많은 대학이 학생들을 위해 마련해 준 그 무료 버스는 일자 노선을 늙은 노새처럼 느릿느릿 오갔다.


첫 학기 첫 수업을 듣고 집에 가기 위해 이 거대한 버스에 몸을 실었다. 책과 사진으로만 보던 유명한 교수님을 처음 만난 설렘과 긴장이 풀리자, 이 버스의 조금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딱딱한 직각 좌석과 목적지를 알리는 전광판이 없는 것은 그렇다 쳐도, 내릴 때 눌러야 할 벨이 없었다. 정류장에 알아서 서는 건가? 순간, 누군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NEXT STOP!"


그제야 깨달았다. 이 버스는 벨 대신 고함을 쳐서 세워달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와 고물 버스. 근데 별 거 아니네.... 그러면서도 내심 누군가 내가 내릴 곳에서 대신 소리쳐 주기를 기대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목적지에 거의 온 것 같았고 이제 내가 소리를 질러야 할 차례였다... 그런데 최악의 타이밍에 무대 공포증이 나를 덮쳤다. 뒷자리에서 본 운전기사와 그 옆의 출입구가 아득하게 느껴졌다. 우람한 체구의 기사는 결코 돌아보지 않을 거인의 등짝처럼 보였다. 음... 2음절 짜리 쉬운 문장이잖아. 입에 살짝 침을 바르고 대사를 몇 번 웅얼거리다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정작 공기를 타고 나간 소리는 생선 가시가 목에 걸린 것 같은 목쉰 소리, 게다가....


"네크스스스스탑"

(어라 이게 아닌데) 당황해서 다시 소리쳤다.


"넥크탑."

(헐....)


모음 2개와 자음 6개, "x-t-s-t" 자음의 4 연타로 이어진 이 불친절한 조합은 긴장한 내 혀와 입술을 꽁꽁 묶어버렸다. 다행히 강아지가 낑낑 대는 소리를 들었다는 듯 버스는 '엣다'하고 멈춰서 문을 열었다. 도망치듯 내린 나를 뒤로 한 채 쿨럭쿨럭 멀어지는 버스를 보며 다시 발음을 해봤다. 넥-크-스-트-스-탑... 넥스트 스탑.... 넥스탑... 수백 번은 목놓아 외쳐야 끝날 고달픈 유학생활렇게 시작됐다....


#2
학위를 마치고 학교를 옮긴 2년 후 어느 날, 나는 정류장 벤치 한편 끝에 앉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거리를 두고 흑인 할아버지 한 분이 앉아있었는데 갑자기 내게 말을 걸어왔다. 뭐라 하는지 잘 들리지도 않았지만 손을 쑥 내미는 제스처를 보자마자 길거리에서 "spare quarter"를 달라며 달라붙던 익숙한 상황들이 떠올랐다. "No, sorry." 난 퉁명스럽게 답하고 엉덩이를 옮겨 좀 더 거리를 두었다. 그런데 혼자인 줄 알았던 할아버지 옆에는 부인이 앉아있었다. 모자를 쓴 그의 흰머리가 살짝 보였고 남편을 나무라는 소리가 들렸다.

"뭐 하러 그랬어요? What did ya do that for?"
"그냥 내 슬립을 주고 싶었어 Just wanna give ma slip."

슬립(slip)은 버스 환승권이다. 할아버지는 자기가 받은 환승권을 학생으로 보이는 내게 주려고 했던 것이고, 부인은 냉랭한 나의 태도를 보고 속이 상해서 남편에게 뭐라 한 것이다. 손에 든 친절은 보지 못한 채, 피부색과 제스처만 보고 선입견으로 판단해 버린 나. 인종차별을 걱정하던 나라에서 부지 중에 인종차별을 해버린 나. 사과를 하기에도 애매한 상황이었기에 이번엔 도망치듯 버스에 서둘러 올라탔던... 이것 역시 잊히지 않는 시린 기억이다.


버스는 간다.
삶도 그렇게 쿨럭거리며 일자 노선을 달린다.

내려야 할 곳은 어제보다 오늘 더 가까워진다.

입이  붙은 채 next stop을 외쳤던 그 시절의 청년은 이제 좀 더 용기 있게  그의 스탑 외치게 되었을까?

타인이 내민 손길을 외면했그때 그 청년은 이제 자신의 환승권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되었을까?

손에서 손으로 건네지는 환승권,
목소리를 들어야 멈추는 버스,
문득 그 시절이 그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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