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옛적에..."
"Once upon a time... "은 동화의 시작처럼 과거에 일어났고, 이제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시간의 서글픈 불가역성을 일깨워줍니다. 시간 위의 시간... 출생 이후부터 켜켜이 그 위에 쌓인 시간들은 우리에게 과거이자 기억의 창고이고, 오늘도 그 위에 내려앉고 있는 또 한 겹 시간의 베일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입니다. 한 켜, 한 켜 쌓일 때마다 나와 세상은 변해갑니다. 나는 편도 여행권을 끊은 인생의 여정에서 조금씩 더 늙어가고 종착역은 어제보다 한 걸음 더 가까워집니다. 주변의 세상 역시 생성과 변화와 사멸을 끝없이 오가며 이 땅에 영원한 것은 없음을 실감케 합니다.
살아온 시간의 두께만큼이나 먼지가 쌓여 잊혀 가는 기억들... 망각은 꼭 나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잠이 우리의 곤한 몸을 쉬게 하듯 망각은 어쩌면 여행객의 지친 몸을 쉬기 위한 달콤한 낮잠 같은 것이라고... 저의 건망증을 위로해 봅니다.
그런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는 기억이 있습니다.
영국의 시인 딜런 토마스(Dylan Thomas)는 자신의 시 <펀 힐 Fern Hill>에서 그 시간을 이렇게 부릅니다.
"Once below a time..."
세월의 켜가 쌓이기 이전, 출발을 알리는 시간의 초침이 움직이기 이전의 그 시간. 모든 것이 멈춰있고 영원할 것 같던 에덴동산과 같던 그때...
"집 근처 사과나무 가지 아래 즐겁고 푸른 풀과 같이 행복했을 때,
골짜기 위 밤하늘은 별이 빛났고,
시간은 내가 기쁘게 외치며 오르게 한다.
그의 눈에 나는 황금빛 한창때,
나는 마차를 타고 존경받는 사과 마을 왕자였다. 그리고 영원한 시간(once below a time)에
난 나무와 숲을 거느리고
데이지꽃과 보리가 뒤를 따랐다
행운의 빛이 수 놓인 강을 따라..."
나의 '시간 이전의 시간'을 찾아가 봅니다. 나의 시간 앨범에도 시인과 같은 영원의 시간들이 담겨 있습니다.
따뜻한 할머니의 등. 비닐우산 위로 또륵 또륵 떨어지던 빗방울...
턱에 찬 숨소리. 졸졸 흐르던 개울가. 무릎을 따갑게 스치던 풀들. 함께 달리던 친구들 웃음소리.
아버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태워준 무등. 내려다보던 그 세상...
새벽. 일렁이는 오렌지 전구 불빛, 입에 들어오는 따뜻한 우유. 흐릿한 엄마의 얼굴...
새내기. 야외공연장. 홀로 앉아 손에 든 문고판 하이데거. 나른한 햇살. 아득한 소음
고요한 밤. 문득 돌아본 그대의 잠든 모습. 모든 것이 안전하고 따스했던 그 순간...
시인은 슬프면서도 아름다운 고백으로 시를 마무리합니다.
"시간은 나의 푸르름(green)과 죽어감(dying)을 안아주었다
비록 내가 사슬에 묶여 바다처럼 노래했지만."
시간은 모든 것을 잠식하고 죽음은 모두에게 찾아오지만, 우리에게는 시간이 허락한 축복의 '푸르른' 순간들이 있습니다. 그렇기에 사슬에 묶인 인생의 탄식 속에도 우리는 영원히 빛났던 그 시절을 보듬고 그리워하며, 언젠가 다시 돌아갈 꿈을 꾸며 살아갑니다.
사족:
나의 once upon a time은 누군가의 once below a time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