벌써 10년도 더 지난, 2013년 그즈음 일이다. 그날의 에피소드는 여전히 미소를 머금게 한다.
그날, 007 작전이 필요했던 그 사연은 이렇다. 지난 주말 홈쇼핑에서 주문한 그릇세트가 배달된다는 문자를 근무 중에 받았다. 50 PCS가 넘는 그릇세트라 박스가 크고 무거울 게 뻔했다. 문제는 그 박스를 남편 몰래 집안으로 들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남자들은 이해 못 한다. 밥그릇 국그릇이 없는 것도 아닌데 왜 또 사는지를. 그건 낭비일 뿐이라고 온갖 잔소리를 할 게 뻔했다. 007 작전이 필요했다. 첩보영화만큼은 아니라도 작전이 필요했다.
그 당시 우리 두 사람의 직장이 가까운 곳이라 차 한 대로 출퇴근을 하고 있었다. 그러니 더 문제였다. 퇴근 전까지 머릿속이 바쁘게 움직였다. '남편에게 나를 내려 준 후 마트에서 뭘 사 오게 하고, 그 사이 나는 박스를 옮긴다?' 아니면, '지하주차장으로 들어가기 전에 나는 내려서 급히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 박스를 옮긴다?' 이 궁리 저 궁리를 해 봤지만 마땅치 않았고, 답을 찾지도 못한 채 퇴근시간이 되었다. 퇴근하는 차 안에서도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엉덩이가 들썩였고, 집이 가까워질수록 입술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파트 마당에 들어서자마자 화장실이 급하다는 핑계를 대고 내렸다. 그리곤 쏜살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러 갔다. 아뿔싸! 맨 꼭대기 22층이다. 발을 동동거리며 손가락은 내림버튼에, 고개는 한껏 젖혀 22,21,20,19.... 숫자를 눈으로 좇고 있었다. 그러나 바쁜 내 맘은 아랑곳없이 중간중간 정차를 하며 엘리베이터는 제 임무에 충실했다. 맙소사! 거기다 내 뒤에 남편이 와서 선다. 1층에 주차할 데가 있어 지하로 안 갔단다. 망했다!! 소심한 007 작전은 그렇게 실패로 돌아갔다. '잔소리하면 그냥 듣고만 있자'라고 다짐하며 집 앞에 도착했다. 아니나 다를까 대문 앞을 커다란 박스 2개가 높게 쌓여 앞을 막고 있다. 순간 '저 아재가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며 남편의 눈치를 살폈다. 그러나 예상과는 달리 남편은 덤덤한 목소리로 “뭘 이리 시켰노?” 하며 무거운 박스들을 집안으로 옮겼다. 혼자서 북 치고 장구 치며 졸였던 마음이 머쓱해졌다. 그때부터는 오히려 내가 더 말이 많아진다. 몇 달 전부터 그릇을 사려고 어쩌고 저쩌고 하며 그릇을 사야만 했던 이유를 쏟아냈다. 그 와중에도 비실비실 새어 나오는 웃음은 숨겨지지 않았다.
저녁 준비는 뒷전이고 언박싱이 먼저다. 박스를 뜯고 그릇을 싼 포장박스를 하나하나 열 때마다 감춰지지 않는 웃음과 돌고래소리의 감탄사를 연신 쏟아냈다. 여자라서 행복한 순간이었다. 내가 산 그릇은 영국 도자기 '웨지우드의 사라스 가든‘ 시리즈였다. 가장자리에 칠해진 앤티크 느낌의 파스텔연두와 블루, 옅은 엘로우가 나머지를 채우고, 그 가운데 각각의 꽃과 열매, 나비가 박힌 영국 정원을 그린 그릇이다. 여태껏 어디서도 보지 못해 흔하지 않음이 좋았고, 소박하면서도 우아했고, 고급스러우며 기품도 있었다. 딱 내가 찾던, 내 취향의 식기들이었다. 내가 너무 좋아하니 남편도 “그리 좋나?” 하며 주방으로 와 그릇들을 구경하다 한마디 한다. "밥그릇이 거기서 거기지 뭐시 다르다고 그리 골라 샀더노? 내 보기엔 다 거기서 거기구만." ’으이구~ 어련하시겠어요 갱상도 아자씨!!‘ 속으로 대거리를 해보지만, 저런 반응을 보이는 남편도 싫지 않다는 표현임을 아는지라, 그 말은 콧등으로도 들리지 않는다. 괜히 혼자서 007 작전을 세우고 난리를 피운 내가 잠깐 머쓱했었지만, 행복해하는 마누라를 이해해 주니 오히려 고마웠다.
남편은 미리 알았는지도 모르겠다. 행복하게 차린 밥상이 가족들에게 사랑으로 전해질 것을. 해마다 돌아오는 가족들의 생일상, 주말의 브런치, 손님 초대를 위해 테이블을 채운 식기들엔 사랑과 정성이 담겨 행복이 되었다. 여전히 매일 마주하는 영국 정원 분위기가 좋다. 첫 만남의 설렘, 행복은 밥과 국에 담기고, 이제는 가족의 사랑과 추억이 보태져 더 소중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