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거의 독점하다시피 사용한 서재가, 아들의 독립과 동시에 나만의 공간이 되었다. 작은 책장 몇 개를 더 들이고, 빨간색 1인용 소파와 사이드 테이블을 놓아 공간을 꾸몄다. 언젠가 음질이 근사한 스피커와 LP 플레이어도 들일 생각이다. 책상 옆 빈 공간엔 이젤이 있고, 벽을 기대고 각기 다른 크기의 캔버스들이 세워졌다. 그림이 그려진 캔버스도 있고, 아직 하얀 그대로의 새 캔버스도 세 개나 있다. 언제든 그리고 싶을 때 시작할 수 있는 든든함을 장착해 둔 셈이다.
세 개의 다리로 삼각형을 만들어 무게 중심을 잡은 이젤 위에, 새하얀 리넨 캔버스를 올려놓는다. 리넨으로 만들어진 캔버스는 표면이 얇고 부드러워 물감이 잘 스며들고 색감 표현도 잘 된다. 조금 비싸도 늘 리넨 캔버스를 사는 이유다. 크고 넓은 나무 팔레트에 여러 색의 물감을 짜고, 얇고 둥근 붓을 골라 오일을 살짝 찍어 물감을 섞어 본다. 기본 밑그림을 그린 후, 이틀 정도 말리고 색을 칠하며, 그림을 그려 나간다. 일체 다른 생각 없이 오로지 색을 칠하는 그 행위에 집중한다. 이젤 앞에 앉으면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 모른다. 잘 그리고 못 그리고는 크게 중요하지 않다. 그저 그리는 것이 좋아 그것을 즐기는 사람이다.
2015년 초여름. 처음 화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오일과 물감이 섞인 냄새가 이상하리만큼 마음을 안정시켰다. 냄새에 꽤 예민한 편인데 유화물감 특유의 오일 냄새가 싫지 않은 게 신기했다. 십 대 소녀의 두근거림으로 들어선 화실은 열어둔 창으로 햇살과 바람이 드나들어 시원하고도 아늑한 분위기였다. 화가이신 선생님의 도움으로 필요한 미술도구들을 장만했었다. 연필, 각 호의 붓들, 기본색의 물감들, 팔레트, 이젤, 캔버스, 오일, 세척용 오일 등등. 그렇게 하나둘씩 기본을 배워 나갔다. 소묘로 시작해서 유화 그리기로 넘어가는 데는 한 달 정도가 걸렸고, 유화는 모네, 베르나르 등 유명 화가들의 작품을 모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그러다 사진의 풍경이나 정물들을 그렸다. 사진 속의 색감을 그대로 따라 하지 않고 나만의 마음을 담아 다른 색으로 채색하여 분위기를 바꿔 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저러한 상황들이 생기면서 화실생활은 그리 길게 가지 못했다. 짧은 배움의 시간을 지나 혼자서 취미로 즐길 수 있게 된 것으로도 내겐 큰 성장이었다. 화실 문을 열고 들어간 발걸음은 그림을 향하게 한 터닝 포인트였다.
그림을 그려서 좋은 점은 나와 마주하는 시간을 갖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그려진 그림들은 특별한 날을 맞이한 소중한 이들에게 선물로 전하는 즐거움도 안겨준다. 개업을 하거나 이사를 간 친구에게 마음을 담은 그림들을 선물했다. 노랗고 환한 해바라기엔 새로 시작한 사업이 승승장구하며 대박 나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았고, 연 핑크와 퍼플로 그린 모란엔, 새 집에서 화목하고 행복하기를 바라는 기원을 담았다. 어느 날엔 친구 K가 올린 카톡 프로필 사진의 구도와 색감이 좋아 그림으로 그렸다. 그림이 거의 완성되어 가는 그 무렵, K의 사무실이 새롭게 단장을 했다. 레몬 그린으로 칠해진 벽을 보는 순간 그림이 걸릴 곳이 어딘지를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그림은 주인을 찾아 한쪽 벽면을 장식하며 걸렸다. 물론 작품성이 뛰어난 그림들은 아니다. 시간과 정성, 우정이 담긴 그림은 소중함의 가치를 지니고 마음을 전하는 매개체다. 그 의미를 주는 이도 받는 이도 더 크게 생각하니, 우리는 친구로 남아 여전히 우정을 나누며 산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남편에게 맡기고 서재로 들어간다. 좋아하는 음악을 켜 블루투스 스피커와 연결을 하고 이젤 앞에 앉는다. 이제부턴 물감과 오일 냄새가 섞인 향수를 맡으며, 붓끝을 통해 나만의 세계에서 노는 시간이다.
오늘. 여기서, 행복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