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 대신 전염병?
필자는 성경을 10번 이상 읽었다. 신약만 따지면, 스무 번 정도 읽었다. 개인적으로는 성경 10독, 신앙 서적 100권, 기독교와 관련한 종교 서적 100권 정도는 기본적으로 읽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 않고 스스로 기독교인으로 생각한다면,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교회에 다니는 교인일 수는 있지만, 기독교인은 아니다. 물론, 개인적인 상황에 따라 차이는 인정한다. 그러나 누구나 기본적인 기독교인의 소양은 갖춰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현실은 어떨까? 10년이 넘는 간사 활동을 하면서 20대 청년들을 양육했는데, 항상 양육 시작 전에 성경통독 경험을 물어봤다. 대부분 오랜 기간 교회에 다녔지만, 통독 경험이 있는 청년을 만나기 어려웠다. 당연히 신앙 서적, 기독교 관련 서적을 읽는 청년은 더 보기 힘들었다.
성경은 한 번, 읽는다고 해서 이해할 수 있는 책이 아니다. 물론, 수십 번 읽는다고 해서 완벽하게 알 수도 없다. 하지만 그래도 읽어야 이해할 기회가 생긴다. 1주일에 한 번 설교 듣는 것으로 만족한다면, 도대체 어떤 근거로 자신이 기독교를 믿는 신앙인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복음의 핵심은 간단하다. 구주 예수를 영접하고 우리 죄로 인한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복음을 믿는 신앙은 성경을 읽음으로써 확실해진다. 우리는 초대 교회 성도들처럼 직접 예수를 본 것도 아니며 당시 증인들(제자 등)로부터 말씀을 듣지도 못했다. 오직 성경으로만 말씀을 이해할 수 있으며, 복음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은 종교개혁 당시 루터가 주장했던 핵심 내용 중 하나인데, 일반인들이 직접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야 한다는 의미다. 당시 성경은 사제들의 전유물이었다. 당시 성경은 작은 마을 12개 정도의 가격일 정도로 매우 귀중했다. 따라서 일반인이 읽는다는 것도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종교개혁 이후 루터는 독일어로 신약을 번역했고, 마침 구텐베르크의 인쇄기 발명이 있었기에 성경을 쉽게 보급할 수 있었다. 당시 인쇄기술 발전은 개신교가 볼 때 하나님의 은총이라고 여길만한 것이었다. 물론 구교의 입장에서는 사탄의 계교로 여겼을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도 모든 성도가 성경을 열심히 읽지는 않았을 것이다. 다만 ‘Sola Scriptura’는 종교개혁의 상징이었고, 성경에 접근하고 이해하는 새로운 방법이었다. 당연히 접근이 쉬워진 만큼 과거와 비교할 때 더 많은 사람이 성경을 읽었고, 다양한 언어로 성경이 번역될 수 있었다. 현재 우리가 어디서나 성경을 읽을 수 있는 것이 종교개혁의 산물인 셈이다.
그러나 인간은 쉽게 먹을 수 있고, 볼 수 있는 것에 대해 소중함을 모른다. 이런 상황은 기독교인들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쉽게 읽을 수 있다 보니, 역으로 잘 읽지 않는다. 그러다 보면, 기본적으로 갖춰야 할 기독교 소양을 갖출 수 없게 된다. 성경에 무지한 기독교인을 기독교인이라고 할 수 있을까?
종교개혁으로 성경은 만인의 것이 됐지만, 성경은 여전히 가깝지 않다. 특히, 연령대가 낮을수록 성경과 거리는 멀어진다.
청소년들은 입시 때문에 성경 읽기가 힘들고, 대학교에 가서는 다양한 모임과 행사로 인해 읽을 수 없다. 그리고 장년이 돼서는 직장 생활로 바빠서 성경 읽기가 쉽지 않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어 시간이 나서 읽어 보려 한다. 그런데, 이젠 눈이 좋지 않다. 시간도 되고, 마음도 있으나 육신이 약하다.
일반인과 사제의 평등함을 강조하면서 성경을 대중 앞으로 가져왔으나, 성경은 여전히 신학 전공자들의 전유물이다. 교역자로 불리는 목사, 전도사 등이 주로 읽고, 해석해서 교인들에게 전해 준다. 그러다 보니, ‘선데이 크리스천’이라는 말을 넘어서 ‘한 시간 크리스천’이라는 말이 나왔다. 예배 시간 이후에 기독교인으로 살지 않는다는 말이다.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강조하지만, 일반 교인은 그 역할을 감당할 수 없다. 심지어 빛과 소금의 의미조차도 모른다. 이유는 간단하다. 성경을 모르기 때문이다. 실천을 위한 이론을 알지 못하니 행동도 어렵다. 그러다 보니, 이상한 목회자를 진리로 따르는 현상이 종종 벌어지는 것이다. 최근 사랑제일교회도 그 문제점의 본질은 일반 교인의 무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개신교는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고 선포한다. 그렇다고 해서 선행을 간과하는 건 아니다. 다만, 믿음을 우선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대체 믿음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구원은 하나님의 은혜라는 말씀도 옳고, 인간의 행위로 구원 얻는 것이 아니라는 말도 다 좋은데, 성경을 읽지 않고 어떻게 이러한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이렇게 모른 채 무탈하게 살아가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하나님을 알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지 않고, 1주일에 한 번 들은 설교 내용을 기반으로 막연하게 살아가는 교인들이 어떻게 자신의 믿음을 확신할 수 있을까? 1주일에 한 번 대충 듣는 설교는 그날이 지나기도 전에 머릿속에서 사라진다.
결론적으로 일주일에 한 번 듣는 설교에 의존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산다는 건 불가능하다. 겉으로는 교회에 다니는 교인이지만,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이다.
현대 개신교인들은 성경과 신앙에 관련한 대부분을 교역자에게 위임한다. 종교개혁으로 위임했던 것을 다시 찾아왔는데, 현재 교인들은 자기의 권한을 다시 위임하고 신(新) 중세 시대의 교회를 만들었다.
성경에 무지한 성도들이 많다 보니, 교회에서는 삶의 나눔은 많으나, 말씀(성경) 나눔은 별로 없다. 삶의 나눔은 간증이라는 형식으로 예배 시간에 전하기도 하는데, 특별 계시(계시에는 일반 계시와 특별 계시가 있다)를 체험한 성도가 그 경험을 나누는 방식으로 진행하며, 성도들은 다 듣고 난 후에‘아멘’으로 화답하면서 감명받는다.
그런데, 안타까운 점은 나눈 경험에 감명받은 성도들은 이후에 유사한 특별 계시를 경험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대부분 교인은 간증 시간에 들었던 간증 자의 경험을 거의 하지 못한다. 혹 초현실적인 간증 내용으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믿는 것이라면,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에서도 경험한 초현실적인 현상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기적은 출애굽기를 봐도 나온다. 모세와 대적했던 이집트 마법사들에게도 있었고, 사무엘서에서도 사울이 찾아간 박수무당도 죽은 사무엘의 영을 불러내는 등의 초현실적인 일을 했다.
간증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알 수 있는 개인적인 체험이지 보편적인 증거는 아니다. 물론, 성경에도 예수의 초현실적인 사역과 사건이(오병이어, 병자를 치유 등) 많이 등장하고 있지만, 예수 사역의 핵심은 복음을 가르치고, 전파하는 것이었다.
초현실적인 현상은 개인적인 신앙을 굳게 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몰라도 핵심은 아니다. 기적을 체험하지 못했고, 혹은 나에게 치유의 은사가 없어도 구원에 대한 확신을 가질 수 있다. 그리고 그 구원의 확신을 바탕으로 복음을 전할 수도 있다. 그 방법은 바로 성경을 읽고 해석하고, 함께 나누는 것이다. 교회 안에는 초현실적인 경험과 관련한 간증에는 감명받지만, 일상적인 하나님의 말씀에는 감동하지 못하는 교인이 많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 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즉, 하나님 말씀은 힘이 있고, 그 말씀을 읽는 자를 변화시킬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런데, 성경을 읽는 교인이 적기에 교회를 오래 다녀도 변화하는 사람이 적다. 그리고 말씀을 모르기에 교회는 더 세속화됐다. 이런 세속화 속에서 교회는 변질해 권력을 추구하고, 복음을 훼손하는 작태를 저지르고 있다. 하나님의 교회라 하면서 부자 세습을 강행하고, 하나님의 일이라고 하면서 복음 대신 전염병을 전하는 게 성경 어디에 나온단 말인가?
이 모든 일은 한국 교회 교인의 우둔함이 원인이며, 근본적인 원인은 바로 성경에 대한 무지함이라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