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 그대로 읽기" 28편

“퇴화(退化)하는 인간”

by 조작가Join

『붉은 수수밭』하(下) 편 모옌(Guan Moye)(2012년 노벨문학상 수상자)


신화는 없다


공산주의자의 소설 속에서 신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아가는 독자들은 작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어려울지도 모른다. 그리고 신화가 아니기에 소설은 허구가 아니다.

물론, 과거의 중국은 다른 국가들이 그랬듯이 토템(totem)이 넘친다. 그러나 이러한 믿음도 절대화되지 못한다. 현실은 신화가 아니다. 절대적 판단자가 있는 성경이 아니고, 인간과 닮았지만, 그 위에 신이 존재하는 그리스 신화도 아니다.

현실, 현존만 있기에 이상은 없다. 전쟁 중, 혹은 치열한 전투 중에 이상(理想)이 있을 수 있을까? 없다. 오직 살아남는 게 정답이다. 토비와 팔로군이 싸우고, 팔로군과 국민당 군이 싸운다. 그들은 멀어봤자 같은 중국인이고, 가깝게는 같은 마을 주민이다. 그들이 뭘 알아서 각자 다른 군대에 지원했을까? 그들을 지휘하는 지휘자들은 다른 부류일까? 그렇지 않다. 정의가 없는 현실 속에서 생존 이외의 답은 존재할까?

그래서 신화는 쓸데없는 에너지 낭비가 되고, 내일에 대한 기대는 피크닉 날 쳐다보는 하늘의 구름과 다를 바 없다.


진리가 없는 사회


작가는 『개구리』에서 ‘생명’을 강조했다. 계획출산 당시를 비판했고, 현대 문명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성토했다. 『붉은 수수밭』에서도 역시 ‘생명’을 다룬다. 단, ‘생명’이라고 하기보다는 이미 태어난 자들의 ‘목숨’을 다룬다. 귀가 잘리고, 성기가 잘리고, 살가죽을 다 벗겨내 내장이 다 보일 지경에 이르러서도 쉽게 멈추지 않는 심장을 다룬다. 목숨이 그렇게 질기다는 말이다. 소설 말미에도 윤간을 당하고, 온몸이 망가져 겨우 숨이 붙어있는 상태지만, 죽지 않는 화자의 작은 어머니가 등장한다. 민초(民草)의 생명력을 상징하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열광적이고 잔혹하며 얼음처럼 싸늘한 사랑 = 위출혈 + 산채로 껍질 벗기기 + 벙어리 노릇 하기이며. 이런 과정은 무한히 순환 반복되면서 그치지 않는다. 사랑의 과정은 붉은 피가 오동나무 기름 색 대변이 되는 과정이고. 사랑의 표현은 형체를 알 수 없게 피투성이가 된 두 사람이 함께 누워 있는 것이고. 사랑의 종말은 허연 눈을 부릅뜨고 있는 두 자루의 얼음과자가 되는 것이다. 『본문』 중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열광적이고 잔혹하며 얼음처럼 싸늘한 사랑”으로 표현했다.


그리스 신화의 “페르세포네”를 떠올려 보자. 죽음과 지하의 신 하데스가 그녀를 납치한다. 그녀는 봄과 식물의 성장, 그리고 씨앗을 의미한다. 하데스는 당연히 죽음을 의미한다. 즉, 열매를 맺기 위해서 씨앗은 철저히 망가져야 한다. 죽음 이후에 생명이 잉태한다는 말이다. 하데스와 페르세포네의 사랑은 바로 “열광적이고 잔혹하며 얼음처럼 싸늘한 사랑”이라고 할 수 있다.


광활한 수수밭은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그 정도쯤이야!’라고 말하는 듯이 살아남고, 누구의 편도 들지 않지만, 모든 사람의 편이 되어 주는. 자연은 진리가 아니다. 그러나 자연은 곧 생명이고, 살아있음을 의미한다.

작가는 소설 말미(末尾)에 잡종 수수밭을 비판하는데, 문명에 대한 비판이다. 똑똑한 현대인, 과학 발전, 그리고 숱한 문명의 이기. 그러나 인간의 삶은 더 불평등해졌고, 생명은 경시된다. 생명을 창조할 수 있는 시대가 돼서일까? 목숨을 존중하는 시대가 아니다.


공산주의의 진리는 평등이었다. 결과의 평등. 그러나 결과를 똑같게 만들지 못했다. 우뚝 선 일인 자 아래 한없이 추락한 나머지만 존재할 뿐이었다. 세상은 1:99를 비판하고, 불평등한 세상을 전복하기 위해서 애쓰는데, 공산주의 사회는 1:99를 받아들인다. 왜냐하면, 적어도 99는 똑같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정신 승리다.

1 때문에 99가 희생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도달할 수 없는 1의 위치를 포기하고 99의 평등으로 만족한다. 그러면 목숨은 공평하게 부지할 수 있으니 말이다.


또 다른 진리는 역시 목숨이다. 그냥 살아있는 것이다. 전체주의는 다수를 위한 개인의 희생을 당연시했다. 그러다 보니, 역설적으로 개인의 목숨을 파리처럼 여길 수 있었다. 대약진 시대에 수천만 명이 아사(餓死)했고, 문화 혁명 시대에는 다른 문화적 취향만으로도 죽을 자격이 부여됐다.

“진리가 없다!”라는 말이 신화가 된 순간 그 신화를 지키기 위해 피 값을 치러야 했다.


퇴화(退化)


세상은 진보하지만 그와 동시에 종(種)은 퇴화한다는 것을 난 절실하게 느낀다. 『본문』 중


작가가 말하고 싶은 바가 인간의 퇴화일까? 공산주의는 인간 개조가 가능하다고 여기는 종교 아니던가? 물론, 현재 그런 발칙한 상상력은 멈춘 지 오래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는 상상력을 멈춰서는 안 된다. 그리고 서구의 자본주의나 문명을 흉내 내서도 안 됐다. 그래서 독특한 자본주의를 만들어 냈다.


난 가끔씩 인종의 퇴화가, 갈수록 더 부유하고 편리해지는 생활 조건과 관련이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곤 한다. 『본문』 중

사실, 위와 같은 작가의 생각이 중국을 말하는 것인지, 아니면 서양을 비롯한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것인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현 지점을 고려할 때, 양자를 대상으로 한 비판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경쟁했다. 더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 노력했다. 한쪽은 전체의 힘으로 개인을 능멸하면서까지 앞서려고 했고, 한쪽은 인간의 본능을 존중하면서도 전략적으로 승자를 만들면서 다른 쪽을 이기려고 했다. 그 결과 전자는 체제가 붕괴했고, 후자는 천민자본주의가 기승하고 있다.


부유하고 편안한 생활은 인류가 분투노력하는 목표이고 또한 반드시 도달해야 하는 목표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또한 불가피하게 간담을 서늘하게 하는 심각한 갈등의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본문』 중

잘 살기 위한 서로의 노력은 갈등을 나았고, 그 갈등이 지불해야 했던 대가는 너무나도 컸다.

인간은 바로 자신의 노력으로 인간의 우수한 품성을 소멸시켜가고 있는 것이다. 『본문』 중


실제로 인간은 먹고사는 문제에 집착해 도덕을 잃었고, 가치를 포기했고, 진실을 외면했다. 명분 싸움을 하고, 진실과 마주하기 위해서 노력했던 인류는 이제 수수밭의 시체를 먹고 인간이 되고자 하는 야생 개처럼 퇴화한다. 지금도 마찬 가지다. 코로나 19의 팬데믹 선언 이전에 세계는 중국의 발병과 전염 현상을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공조해서 전염병을 퇴치하는 데 힘을 모아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지 않았다. 국내도 마찬가지다. 대구에서 전염병이 돌 때, 모든 지역에서 "대구에서 오셨습니까?"라는 질문을 했다. 현재는 이 질문이 "수도권(서울)에서 오셨습니까?"로 바뀌었다. 영호남을 나누던 정치적 갈등이 이제 코로나를 중심으로 새로운 금을 그리고 있다. 이것이 21세기 세계와 한국의 모습이다.


이제 마을은 다시 폐허가 되었다. 인간이 세우고 다시 인간이 무너뜨린 것이다. 『본문』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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