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재중 전화 11통.
어제 내 휴대폰에 찍힌 부재중 전화를 보고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아직 형사 공판 기일이 잡히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무엇이 그리 불안한지, 의뢰인은 자꾸만 전화를 해댄다.
내게 마구 전화를 거는 이 사람의 이름은 고창봉씨. 그는 사기죄로 기소 당한 피고인이다.
그가 날 처음 봤을 때, 자긴 억울하다며 대뜸 무죄 주장을 하고 싶다고 했었다. 함께 기소된 공범들이 자신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 씌웠다고 했다.
하도 억울한 목소리로 읍소를 해댔던지라 난 그의 말을 곧이 곧대로 믿었다. 국선사건인데 무죄주장을 해야하니 준비해야할게 많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가 내게 했던 모든 말들은 ‘소설’이었다는걸 깨닫는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가 지목했던 공범은 ‘김기윤’ 이라는 사람이었다. 근데 공소장을 아무리 정독해봐도 김기윤은 없었다.
기록을 뒤져보니, 수사관의 수사보고서에서 그자의 실체를 알 수 있었다.
[피의자 고창봉은 김기윤이라는 자가 시켜서 고소인을 기망하였다고 주장함. 피해금 또한 김기윤이라는 자에게 송금하였다고 진술함.
이를 확인하기 위해 영장을 받아 고창봉의 계좌를 추적하였음. 그 결과 고창봉이 5,000만 원을 입금한 입금자명 '김기윤'의 농협계좌의 주인은 '고창봉'자신으로 밝혀짐.
고창봉과 김기윤은 동일인으로 추정되므로 고창봉의 진술은 거짓으로 예상됩니다.]
그는 죄를 덮기 위해 가상의 인물을 꾸며낸 것이었다. 금방 들통날 거짓말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수사관에게 뿐만 아니라, 심지어 자신의 변호인인 나에게까지 ‘김기윤이 시켜서 모든 일을 저질렀고, 그가 주도한 일이다’ 라고 말했다.
한 숨이 나온다.
이런 거짓말을 하는 사기꾼들은 고창봉씨만 있는게 아니다. 얼마전 모임에서 만난 변호사님은 “사기사건을 맡았는데, 저한테도 사기를 치더라고요.”라며 너스레를 떨었었다.
그땐 우스개소리로 넘어갔지만, 이처럼 자신의 치부를 가리기 위해 ‘시나리오’를 쓰는 피고인들을 두고 하는 말씀이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기록을 다 읽고 고창봉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변호사님. 기록은 읽어보셨습니까?"
"네 읽어보았습니다. 그런데 정말 무죄 주장 계속 하실건가요? 경찰이 밝히기로, 김기윤씨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이던데요."
그는 내 말을 듣자마자 숨쉴틈도 없이 버럭 화를 낸다.
“그거 다 경찰이 조작한겁니다!!! 전 김기윤이 하라는대로 했을 뿐이라고요!! 경찰이 허위로 수사한거에요!!“
그러더니 그는 전화를 팍 끊었다.
이후 고창봉씨는 재판부에 연락해 국선변호인을 바꿔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난 자연스레 짤리게(?)되었다.
내 후임 국선 변호인은 무죄 주장을 끝까지 했을까. 괜스레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그가 불쌍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