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큼함이 어금니를 누르듯 짜증을 달래는 개운한 맛
#쉰두 번째 글
우거진 숲
여름 숲은 총천연색(總天然色)을 이루며, 바람에도 자연스러운 풀내음을 실어 날린다. 가을과 겨울의 합작으로 죽어 잠들게 한 것들을 다시금 봄이 보채어 여름이 일으킨다. 무한정 반복하는 계절의 순환. 그래서인지 땅에서 태어나는 과일에는 그 날의 계절이 깊게 배어있다.
오늘은 그중에서 여름의 푸르름이 깊게 배인 과일 하나를 말하려 한다. 사과이지만 가을처럼 붉은 것이 아닌, 숲의 푸르름을 두른 아오리 사과를 말이다.
초록이 아름답다.
아오리 사과는 일본에서 태어난 품종으로 1970년대 중반, 우리나라에 들어왔을 당시에는 씨알도 작고 덜 익은 듯한 색상 덕에 '풋사과'라 불리기도 했다.(물론 현재도 '풋사과, 아오리, 초록사과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린다.) 크기와 색, 거기에 시큼한 맛까지 더해지니, 많은 사랑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 게다가 당시에는 현재 가장 대중적인 품종으로 알려진 '부사'가 도입된 직후였기에 더 그랬으리라.
하나, 현대에 들면서 아오리를 옹호하는 의견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여름 시기에 맛볼 수 있는 몇 안 되는 '햇사과'라는 점과 시큼한 맛이, 상당수 젊은이들의 입맛을 사로잡으면서 매년 수요가 증가하고 있다.
웃픈 사연
일부 사람들이 "아오리 사과가 빨간 사과를 덜 익혀서 출하한 것 아니냐"라 말하고 있다(친구 曰). 사실 아오리는 일본에서 1975년에 교잡종(두 개체 이상을 교배하여 얻어 낸 신품종)으로 등록한 품종이다. 정식 명칭은 '쓰가루'. 이것이 1973년에 우리나라에 도입되어 1976년에 정식 선발되면서 아오리란 이름으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일본에서 품종을 등록하면서 사건이 벌어졌다. 어떠한 품종을 교배하여 얻어 냈는지 기록해 놓은 라벨을 분실한 것이다. 결국, 그 작은 실수는 최근까지 아오리의 부모 개체를 모른 체 재배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고, 기술 발달 후에야 유전자 분석을 통해 '홍옥'과 '골든 딜리셔스'라는 품종을 교배하여 얻어낸 것이라 확인하였다.
아오리를 맛보다
구름을 잃은 하늘이 속살까지 내 보이며 떠다니고 있다. 햇빛이 강하게, 뜨겁게 하늘을 태우고 지면에 내리기를 반복하는 오후. 분명 어린 시절 빛은 땅에 닿으면 튕겨 나가는 것이라 배웠는데, 이 여름의 햇빛은 지면에 지독하게 쌓이기만 하는 듯, 열기가 강렬하다. 그 탓에 아오리도 벌써 눈에 띈다. 8월에나 맛볼 수 있던 녀석이, 미친 듯 내리는 햇빛 위에 수북이 쌓여있다.
가게 주인에게 주먹보다 작은 이 녀석을 몇 개 담아 달라고 하니, 하얀 봉지에 좋은 놈만 쏙쏙 담아 주셨다. 봉지마저 검은 녀석이었으면, 어지간히 가는 길이 괴로웠을 텐데 다행이다. 천리 같던 10분 남짓에 거리를 걸어 집에 도착해 이 녀석들 모두를 냉장고에 넣고 샤워를 했다. 내가 더운 탓에 몸을 물로 헹궈내는 것처럼, 이 녀석들도 차가운 공기를 좀 맞고 있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샤워를 마치고 어깨에 수건을 두른 채 아오리 사과 하나를 꺼내 들었다. 흐르는 물에 뽀득뽀득 소리가 나게 닦아 내고, 물기를 탁탁 털어내어 '와그작'.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청량감이 입안에 밀려들어 온다. 과일에서 이런 맛을 느낄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있을까? 입안이 개운해진다. 상큼함이 어금니를 지그시 누른다. 아오리의 상큼함이 이리 개운하고 좋았던 적은 또 있었을까? 입맛이 변한 것이 분명하다.
여름이 달궈 놓은 땅위를 걷는 내내 짜증이 안 날 수 없는 하루였으나, 상큼함이 어금니를 누르듯 짜증을 달래는 개운한 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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