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이 가을의 문턱을 한 박스 사들고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요즘은 하루하루 저녁 바람이 시원하게 부니 가을을 기다리는 마음이, 곧 떠날 여행일자를 기다리는 마음만큼 설렌다. 높은 가을 하늘을 물들일 석양을 닮은 물감이 얼마나 예쁠지, 상상만으로도 끝자락인 여름에게 위로마저 보내고 싶은 요즘. 새로운 과일 하나가 눈에 띄었다. 武(없을 무)와 花(꽃 화)를 써서 "꽃이 없는 과일"이라 불리는 '무화과'다. 이것을 시작으로 식욕의 계절이라 불리는 가을은 다채로운 먹거리로 풍년을 불러일으키겠지.
오늘, 엄한 마음만 하늘에 붕 띄어 놓는 가을이 데려온 무화과를 만났다.
가장 오래된 과실
무화과는 품종에 따라 외형이 조금씩 다르지만, 지금부터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가장 많이 재배되는 '보통형Common'과 '산 페드로 형Sanpedro'을 기준으로 말하겠다.
무화과를 갓 수확했을 때 외형은 보통 노란색과 짙은 갈색이 조화롭게 섞여있는데, 마치 흙이 꽃을 보호하기 위해 감싼 듯한 느낌을 자아낸다. 땅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는 것일까? 의문을 증명이라도 하듯, 무화과는 기원전 3000년경의 수메르 왕조시대 때부터 재배됐다는 기록을 내세우며 가장 오래된 과실이라는 타이틀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오랜 역사 속에서부터 얼굴을 내민 무화과는 기원전 2000년경에 이르러 아시리아인에게 전해지는 것을 시작으로, 지중해 연안 지방, 중국에서는 당나라 시대, 신대륙은 서인도 1520년, 플로리다는 1575년경 순으로 전파되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현대와 같은 양상으로 재배를 시작한건, 현재 주산지로 알려진 캘리포니아가 시발점이며, 1769년 부터라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무화과가 자생自生한지는 오래되었으나, 본격적인 재배에 뛰어든 건1940년대경으로 다소 늦은 시기에 시작하였다. 참고로 현재는 전남 영암군에서 나오는 무화과가 우리나라 생산량의 80% 이상을 차지한다.
짧은 삶, 긴 추억
재배이력이 다소 짧음에도 무화과에 관한 추억은, 우리 위세대에게 대부분 있을 만큼 무화과는 우리에게 친숙한 과실이다. 살구, 복숭아 기타 등등 유실수有實樹라 분리는 열매가 열리는 나무처럼 생활 속에서 늘 윗세대와 함께 했던 무화과. 먹을게 여의치 않았던 과거 훌륭한 간식거리였고, 몇 개만 먹어도 배부르게 해주었던 요깃거리였다.
누구 하나 배불리 먹을 수 없었던 과거의 그들을 어루만져 주었던 무화과는, 우리나라에서 본격적으로 소비된 기간은 분명 짧으나, 고마움이라는 추억으로 윗세대 기억에 깊게 각인되어 있다.
어머니 曰 어린 시절에는 참 맛있게 먹었는데, 옛날 생각난다
생김새와 다른 연약함
눈에 보이는 것만을 믿는 것에 길들여진 우린, 상대방의 외적인 강함과 약함을 기준으로 내적인 것을 판단하는 섣부른 행동을 한다. 그러한 행동은 색깔을 보면서도 행해지는데, 검정, 갈색, 회색과 같은 어두운 색에서는 무겁고, 단단한 느낌과 함께 강하다는 인식을 갖는다. 그래서 이 무화과를 처음 접하는 이는 흙과 같은 색과 모양새를 보며, 단단하고 오래가는 과실이라 여기는 사람도 있다.
그러한 착각은 애써 사놓은 과일을 며칠 만에 버리는 실수로 이어진다. 무화과는 과육을 보호할 수 있는 단단한 외피도 없는 데다가, 과육 자체가 연약하기까지 하다. 결국, 온도에 민감할 수밖에 없어 상온에 두면 하루가 다르게 짙은 보라색으로 변하면서 물러지기 시작한다. 이러한 약점은 유통과정에서도 제한 되었기에, 수년 전까지만 해도 수도권에서 생과로 접하기 어려웠던 과실이었다.
하지만 최근에 들어서 유통과정의 개선과 농가와 소비자의 직거래가 용이해지면서, 싱싱한 무화과를 상처 없이 접할 수 있게 되었다. 단, 여전히 온도에 민감하고 과육이 약해 유통기한이 짧으니 구매 직후 2~3일에 내에 소비하는 것이 가장 이상적이겠다.
무화과를 맛보다
날씨가 워낙 뜨거우니 뭔가 특별하게 당기는 음식이 없었다. 더위를 먹은 탓이다. 과일가게에 가보아도 특별한 과실이 눈에 띄지도 않고, 입은 심심 하나 특별히 먹고자 하는 음식이 떠오르지도 않았다. 그러던 중에 오랜만에 무화과가 눈에 띄었다. 벌써 무화과의 계절이 온 것이다. 곧 가을이 온다는 소식과 진배없는 등장.
나는 지금 이 가을의 문턱을 한 박스 사들고 집으로 향하기로 했다.
싱싱한 무화과 한박스를 사들고 집에 도착해 뚜껑을 여니, 실해 보이는 무화과가 눈에 확 들었다. 기분이 좋았다. 나는 맛있어 보이는 무화과 몇 알을 꺼내 흐르는 물에 헹궈 하얀 접시에 담아 식탁에 올렸다.
무화과를 껍질 째 먹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농약이 있을 수 있다 생각하며 기피 하지만, 무화과는 위에 언급했듯 과육이 약한 과실이기에, 농약을 사용하면 살이 녹을 수도 있어 농가에서는 농약을 거의 사용하지 않는다. 그러니 흐르는 물에 깨끗이 씻고 난 후에는 껍질 째 먹어도 무해하다.
나는 무화과를 하나는 껍질 째, 하나는 그냥 먹기로 했다. 먼저 하나를 집어 볼록한 머리를 잡고 껍질을 찢어 벗기니, 바나나처럼 삭 발라지면서 무화과의 하얀 속살 일부가 고개를 내밀었다. 서둘러 두어 번 행동을 더 반복하니 헐 거 벗은 하얀 무화과가 완성되었다. 칼로 조각을 내지 않고 한입에 넣기로 했다. 그래야만 햇무화과의 맛이 입안 가득 퍼질 것 같았다.
속살만 내민 무화과 한알을 그대로 입에 넣어 씹기 시작했다. 무화과의 과육이 날치알처럼 톡톡 소리를 내며 터졌다. 섬유질을 가진 케이크처럼 부드럽게 씹히는 식감과 얕은 단맛이 입안 전체를 은은하게 돌며, 무화과 특유의 풀내음이 코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람에 따라서는 호감을 느낄 수 없을지도 모르나,
나는 대놓고 들어내기보단 은은히 뽐내는 달콤함을 좋아하니, 썩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입추立秋와 함께 찾아온 가을의 첫술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그저 좋을 수밖에.
이후에 껍질 째 먹은 무화과도 변함없는 기대로 가을을 알려주었다.
p.s "꽃이 없는 과일"이란 뜻의 무화과에는 사실 꽃이 있다. 위 사진을 보면 마치 융털 같으면서도 문양을 그리는 듯한 과육을 볼 수 있는데 저것이 바로 꽃이다. 즉, 꽃이 밖이 아닌 안으로 핀 것이며, 우린 그 꽃을 먹는 것이다. 하지만, 겉으로 꽃이 보이지 않는 탓에 '무화과'라 이름 지어진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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