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덜 사랑할 것을

이별은 이미 만반의 태세로 침략해 온다.

by 전성배

"세상 모든 악惡에는 그만한 사정이 있지 않을까?"라는 터무니없는 합리화를 하고, 잊어야 할 날들은 더 이상 눈도 마주칠 일 없을 거란 근거 없는 확신으로 온갖 추억들을 위태롭게 쌓아 올린다. 흔들리는 기반은 보지 않고 윗머리에 눈을 고정한 채.


자해에 가까운 일들을 가능케 하는 것은 '사랑'이라 불리는 아이보다 더 순수한 단어에서 시작된다. 이것은 아무런 대책 없이 왔다가, 대비 없이 떠나간다.


갑작스레 내리는 소나기에 준비 없이 젖는 날처럼, 하루아침에 쌀쌀해지는 10월 23일의 상강霜降처럼.

어느 날, 눈물이 뺨을 타는 소리를 들려주려는 건지, 그 빈틈을 헤집고 자신의 이별의 강점기를 털어놓으려는 건지 모를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갑자기 통보받은 이별이 원인인 듯했다. 극심한 공포를 목격하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는 말과 같은 맥락으로, 갑작스러운 이별 통보에 순간 눈물 조차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그녀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사랑한다 말했던 그가 갑작스레 통보한 이별을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다며 하염없이 울었다. 어디서부터 잘 못됐는지, 온갖 이유를 막연하게 추론하며 하염없이 울었다. 그녀의 언사에서 눈물은 한순간도 뒤쳐짐 없이 동행했다.


마치 뒤늦은 수습에 나서는 정계政界에 속한 자 같았다. 분명 '만약'이라는 만일을 생각하지 않은 건 아니었을 것이다. 삶은 '행복'이란 것이 지속되면 되려 이질감을 안겨주니까. 그것이 증발했을 때 찾아올 불행의 짐과 더불어 "만일을 위한 대비책을 세워야 하지 않을까"라는 진중한 고민을 한 번쯤은 그녀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머릿속에 수많은 생각을 그려내다 누군가의 부름에 일순간 까먹듯이, 그녀는 그가 부르는 행복에 일순간에 혹시나 할 불행마저 잃어버렸겠지.


결국 소리 없는 평화에 찌들었고, 그녀는 꽃이 자라 개화를 이루어 벌이 날아드는 전성기를 누비듯 사랑에서 절정을 누볐다. 하지만 화주 위에서 그를 안고 있던 그녀는 끝자락부터 서서히 부서져 가던 꽃잎을 보지 못했다. 꽃잎이 말라 이내 부서지고 꽃실까지 기울어져서야 비로소 꺾여가던 그의 마음과 대면했다. 부랴 부랴 물을 나르고 영양을 주려했으나 늦은 처사. 이별은 그녀를 좀 먹으며 침략해 왔다. 사랑을 죽이기 위해. 이별은 인침人侵을 감행했다. 어느 날 갑작스레.


"이럴 줄 알았으면 덜 사랑할 걸"이라는 말을 그녀는 눈물과 함께 반복적으로 뱉었다. 그 말은 즉 준비하지 못한 자신이 잘못한 거라 결론 지은 듯했다. 맞다고 해야 할까 틀렸다고 해야 할까. 이별은 모든 준비를 마치고 닥쳐온다. 그러니 준비되지 못한 이별이란 어쩌면 그녀의 말대로 철저히 준비하지 못한 약소국인 그녀에게 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눈물이 수화기를 넘어 내 베개를 적시기 직전까지 가서야 전화를 끊었다. 먹먹한 통화에 전화기가 물에 빠진 듯 버튼음에서 답답함마저 느껴졌다. 그리고 먹먹한 그녀의 모든 눈물이 떨어질 때까지 가만히 듣기만 했던 나는 끊어진 전화 앞에서도 침묵을 지켰다.

우리 삶의 모든 요소들은 수시로, 자신과 대비되는 것과 함께 양팔 저울에 올라 필사적으로 균형을 이루려 한다. 이 사실은 우리는 자각하지 못하지만, 무의식 중에 인식하고 있다. 지속적인 행복이 주는 이질감이 바로 그것이다. 행복과 불행만 보아도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져 있으면 반드시 삶은 '평등'을 위해 약소한 곳에 추를 달아 균형을 이루려 든다. 자의가 아닌 삶이 우리에게 '운명'이란 단어로 시행하는 법과 같다.


그렇기에 삶이 행복에 치우쳐져 있다고 의도적으로 불행을 고려하고 만약을 대비하는 등 스스로 불행 쪽에 추를 달아 균형을 이루려 하는 것은 무모한 짓일지도 모른다. 특히, 사랑에서 이별을 대비하는 것은 명확히 무모하고 무지한 행동이다.


모든 것은 균형을 이루려 한다. 스스로 이루려 하지 않아도 된다. 나는 그녀가 한 열렬한 사랑으로 인해 행복했던 순간들의 가치를 말하는 것이다. 그런 행복을 누렸던 당신의 삶은 참으로 눈부셨고 당신을 아름답게 했다 말하고 싶다. 그저 너무 오랫동안 누렸던 행복이기에 잠시 저울이 균형을 이루려는 것이라 여기면 좋겠다. 사랑과 이별은 동행임을 순응하길 바란다.


"삶은 불행의 연속이나 가끔씩 찾아오는 달콤한 행복 때문에 살아간다"는 말이 있지만, 나는 조금 달리 생각한다. 저울의 영점은 사실, 아주 미세하지만 행복에 좀 더 치우쳐 있다. 단지 시기심 많은 삶이 행복한 당신을 질투해 불행을 잠시 쥐어 주는 것이지 삶의 말로는, 사랑의 말로는 행복으로 기운다.


※ 사진 '와카레미치' iPhone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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