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아름다워 지겠구나
껍질을 찢어 벗기면 주황색의 속살이 아닌 향을 먼저 대면한다. 아니, 껍질을 찔렀던 손톱 자리부터 이미 귤 향이 피어 오른다. 누군가 상큼한 향을 말하라 하면 이것을 말하면 되겠구나 싶을 만큼, 진한 향이다. 정확히는 진해지려고 하는 향이다. 이 향은 다음 달이면, 그 다음 달이면, 계절이 차갑게 식어 갈 수록 더 진해질 것이다. 아직은 초록색이 마치 얼룩 마냥 노란색의 옷에 묻어 있는 듯 보이지만, 곧 색 노란 옷 만을 남겨 진한 향을 뱉을 것이다.
극조생귤
귤은 10월부터 1월까지가 제철 이라고 하지만 엄연히 사계절 내내 하우스 재배를 하고 있으니, 제철에만 즐기는 과일이라는 범주에서 벗어난 지는 이미 오래다. 반면 노지 귤은 얘기가 다르다. '노지露地'란 지붕 따위로 덥지 않은 땅을 일컫는 말로, 귤을 계절과 날씨의 영향력 아래 자연 그대로 키우는 것이기에 재배 시기가 정해져 있다.
귤은 10월에 노지에서 수확하기 전까지는 하우스로만 재배하기에 높은 가격대를 갖고 있지만, 연말부터는 노지 귤도 함께 수확이 가능해지니 요 맘 때 가격 부담이 상당히 줄어 든다. 하지만 그 뿐. 가격은 저렴해 졌어도 요즘 귤을 보면 하나 같이 초록색이 얼룩처럼 귤 껍질에 물들어 있어 선뜻 손이 잘 가지 않는다. 이유가 무엇일까?
우선 이 초록의 귤은 '영귤, 청귤, 풋귤'이라 불리는 귤이 아닌 '극조생'이라 불리는 귤로, 우리나라 귤의 품종은 대부분 '온주밀감'(밀감은 일본어 '미깡'에서 유래 된 단어로, '온주감귤'이라 칭하는 것이 올바르다.)이지만 수확 시기에 따라 '극조생, 조생, 중생, 하귤' 등으로 이름을 달리하는데, 그 중 첫 번째로 재배하는 귤을 말한다.
'조생'이란 단어에서 조는 '早 이를 조'를 써 과일 따위의 작물이 일찍 성숙한다는 뜻으로, 극조생은 조생 앞에 극을 붙일 만큼 아주 이른 시기에 열렸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초록끼가 아직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먹어도 괜찮은 걸까?
간혹 이 초록의 귤을 "먹어도 아무 상관 없는 것이냐"라는 질문을 받으면 "상품성이 있으니 시중에 유통 되는 것이겠지?"라 웃으며 말하지만, "아직도 일부 소비자가 여전히 거부감을 갖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든다. 하나, 과거에는 그 거부감이 더 심했다.
아무래도 초록끼가 있다는 건 덜 익은 것이고, 맛도 당연히 덜할 수 밖에 없다는 인식이 강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고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이 극조생귤 같은 경우에는 노란색으로 익지 않아도 맛을 낼 뿐더러, 이 귤을 마냥 나무에 달아둔다면 이후에 열릴 조생귤에 방해가 되니 수확하여 유통하는 것이 당연했다. 그러나 이 사실을 모르는 소비자 입장에선 거부감이 들 수 밖에 없었고 결국, 일부 농가에서 에틸렌 가스와 같은 약품을 의도적으로 사용해 귤을 노랗게 익혀 출하 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화약 약품은 소량이더라도 소비자 건강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에 얼마 안가 적발되어 법적 제재가 이루어 졌고, 이후에 초록 귤에 대한 인식 개선을 위해 농업계와 농민들이 힘을 쏟은 덕에 현재는 초록끼가 있는 그대로 출하 되어도 활발하지는 않지만, 꾸준한 소비가 이루어지고 있다 한다.
귤을 맛보다
단풍이 물든 어느 숲 속을 들어가 카메라를 꺼내 들었다. 카메라의 프레임 모양은 둥근 것으로 바꿨다. 사각의 프레임이 진부해, 오늘은 이 장면을 둥근 프레임에 담아보고 싶었다. 카메라의 렌즈와 시선을 동일 선상에 두고 천천히 상체를 틀었다. 그리고 어느 순간 시선에 한 풍경이, 렌즈에 한 장면이 담겼다.
숱한 컬러로 물들어 있는 풀들에 초록이 애처롭게 묻어 있는 듯 보였다. 딱 이맘때의 귤과 같았다. 이 귤은 단풍에 물드는 잎들을 연상케 했다.
이맘때 귤이 크기 별로 맛 차이를 내봐야 얼마나 내겠나 싶어, 입안 가득 넣어 먹고자 조금 큼지막한 귤을 몇 알 샀다. 특별한 도구가 필요 없는 과일이니 바로 먹고자 봉지에서 한 알을 꺼내 양손으로 반을 갈랐다. 곧 상큼한 향이 피어올랐다. 정확히는 미세한 과즙 방울들이 튀어 오른 것이라 해야 했으나, 그저 이 향이 좋으니 아무 상관 없었다. 껍질을 벗길 것 없이 귤 한 조각을 떼어냈다.
껍질의 두께 감이 다소 있어 살이 잘 떼어졌다. 나는 곧장 그 한 조각을 입에 넣고 씹기 시작했다. 한 겨울에 먹던 귤만큼 진한 맛을 느낄 수는 없었다. 그때의 귤 맛에 물을 탄 듯한 연한 맛이었다. 하지만 썩 나쁘지 않았다. 반년을 넘도록 먹지 못하다 먹었던 첫맛이었으니, 되려 그 은은함이 더 좋았다. 적당한 산미와 은근한 단맛이 마치 속을 달래는 듯했다. 앞으로 더 맛있어질 자신을 대비해 맛만 보여주는 것이라 말하는 듯했다.
저녁 무렵 한 과일가게에 진열되어 있던 귤이었다. 노란색 전구가 있는 힘껏 빛을 쐬어 주고 있음에도 초록끼가 그대로 보였던 귤은 옆에 있던 단감이나 연시, 사과, 배, 포도들이 본연의 색을 선명하게 뽐내고 있는 것에 비해 예쁘지 못한 모양새가 안쓰러워 보였지만, 정작 귤은 그곳에 올려져 있을 때부터 말하고 있었다.
난 점점 더 아름다워질 테니, 지금의 나를 괘념치 말아라.
※ 사진 '와카레미치' iPhone 8 plu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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